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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원 Mar 03. 2021

아름다운 이별은 없다.

남김 없는 완결이 있을 뿐이다.

결코 쉽지 않은 기다림을 통해 나 자신을 찾았다. 그가 기여한 선물이었다. 고마움이 스며든다. 남김 없는 완결... 고요와 자유가 있다.

 


새로운 프로젝트에 입문한 지 여러 달이 지났다. 그의 조언대로 우리의 관계를 잠시 내려놓고, 나의 삶에 몰입했다. 가장 먼저,  함께 사는 엄마와 베스트 프랜드가 되었다. 듣기 싫어 못 들은 척 무시한 엄마의 잔소리가 무한한 사랑임을 알아차렸다. 군대 간 두 아들이 차례로 내 품에 안겼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아가적 모습 그대로 내 안에 들어왔다. 예전의 나는, 아이들에게  했어야지 혹은 해야지, 과거와 미래에서 왔다 갔다 한 우매한 엄마였다. 현재에 깨어 아이들을 마주하지 않았다. 고전하는 어미의 삶을 따르느라 얼마나 고됐을까. 지금, 이 순간을 얻으며, 나는 세 아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되었다.


나를 깨우치는 과정을 통해 맹점을 봤고, 자유롭게 사실 그대로의 자기표현이 가능해졌다. 이것이 얼마나 힘 있는 삶을 살게 하는지! 밤새 아들들과 이야기 꽃을 피우는 사이가 되다니!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굳이 행복하다 말하지 않아도 행복인 걸 명확히 알게 되었다.


감히 내가, 평범한 주부인 내가 어떻게 비범한 결과를 낼 수 있을까? 두려웠다. ‘행동만이 변화를 만든다’는 말에 ‘움직이지 않은 곳에 변화를 만들어 드라마틱한 가능성이 실현된다!’라는 뜻을 세우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롤러코스터가 극에 달할수록 ‘비어있고, 의미가 없다’를 얻었다.


그동안의 깨달음은 나의 전반적인 삶에 영향을 미쳤다. 다시 클래스를 열었고, 브런치 작가도 되었다. 나는 ‘원하는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굿 뉴스를 지속적으로 주변에 알렸다. 나와의 관계가 전환되고 나서 새롭게 나타난 결과물이다. 나의 견지가 개인적인 삶의 돌파구를 넘어 변화를 일으켰다. 감동은 전파된다.


“인생의 진정한 기쁨은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힘이며, 탓하고 불평하고 이기적인 사람에게 세계는 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헌신하지 않는다. 나의 삶은 전체 사회에 속해 있으며 나는 하나의 의견이다, 그리고 내가 살아있는 동안 사회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하는 것은 나의 특권이다. 나에게 있어서 삶은 이 순간 내가 들고 있는 “찬란한 횃불”과 같다. 나는 이 횃불을 다음 세대에게 전해 주기 전까지 가능한 가장 빛나게 만들 것이다.”


“조지 버나드 쇼”의 “가치 있는 삶”은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보여 준다. 인생의 목표가 뚜렷하지 않다면 이내 공허해진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집착과 이해, 기대와 체념, 좌절과 극복의 복되는 삶이 더 이상 아니다.


내가 그를 사랑한 것은 꿈의 파트너라는 확신에서였다. 자유로운 보헤미안에서 사회를 위한 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한 곳을 향해 같은 소명으로 동행할 사람이기에 그렇게 깊이 빠져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하루도 버티기 어려운 나날을 무려 백일을 넘기고 육 개월을 보냈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심정이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밸런타인데이도 지났다. 이틀 내내 함박눈이 흩날리던 날도 있었다.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도 모르게 그를 떠올리자 눈에 물이 고였다.


어느 날 갈라 파티에서 “현재 새로운 관계에서 진정 자유롭고 행복하다”는 그의 말을 들었다. 뭔가 울컥, 슬픔이 올라왔다. 시간을 갖고 고심하겠다는 그를 존중해 모든 걸 내려놨는데… 새로운 관계라고? 나와 완결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우리 관계를 묻지 않겠다는 약속을 붙들고, 묵묵히 때를 기다렸다. 그가 군대 간 것도 아니고, 화성(Mars)에 있는 것도 아닌데, 만나지 않더라도 커뮤니케이션 안에 존재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에게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는 것에 신물이 났다. 나의 꿈을 충족하고 사랑하는 삶을 창조하는 존재라고 말하고 다니면서, 정작 나는 반쪽자리 인생을 사는 게 아닌가? 이중생활과 다를 게 없지 않나?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전화로 대화한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가 제안한 두 달, 그 이후에 늘어난 시간 속에서 그의 생각과 심정의 변화를 물었다. 확인하는 질문에는 뭐라고 대답할지 모르겠다고 그는 말했다. 또다시 미궁에 빠졌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명확하지 않다, 모르겠다… 로 일관된 그의 말에 허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사랑이 식었고, 끝이라고 인지한 순간 왜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어?

뻔히 궁금해하는 걸 알면서! 온전하지 않잖아!

끝인 줄 알았으면 내가 이리도 힘들지 않았을 텐데…

육 개월이 얼마나 긴 시간인데… 지옥이었어.

그냥 끝이라고 말해주면 될 것을…

하루라도 빨리 벗어날 수 있었잖아.”


그제야 그는 “미안해…“라고 말했다.


“내게 아직 헌신이 있어?

있다면, 궁금해서 물어 본거 설명해 줄 수 있지 않아?”


그는 말이 없었다. 잘 지내던 우리가 갑작스럽게 이별한 까닭은 영영 알 수 없었다. 떨어져 지낸 동안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고려했는지 조차 미스터리로 남았다. 나는 무엇을 위해 길고 긴 반년을 기다렸던가... 멀미가 났다. 토가 올라왔다.  


누군가에게 그는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을까?”


인간은 모든 인식과 판단의 도구를 쓰지만, 어떤 것을 더 선호하느냐를 나타내는 지표일 뿐이다. 이로써 사고방식의 많은 이유가 설명된다. 그는 원하는 것을 선택했을 뿐, 아무런 의미도 이유도 필요 없다.


나는 그에게 투사하거나 그를 비난하는 걸 멈추고, "우리는 서로 다르다"라는 당연하면서도 어려운 사실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자아’라 여기는 에고의 멍에와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원망이 올라올 때마다 상한 심령을 포기하려 애썼다. 쉽지 않았다. 무엇도 생각하지 않으려 머리를 흔들어봐도 떠오르는 상념을 막을 길이 없었다. 언제 만날 수 있는 걸까? 그를 만나서 이 지경에 이르게 된 이야기를 덤덤하게 듣고 싶었다. 그를 이해하고 그의 선택을 받아들이려 했다. 나로서는 최선이라 생각했다. 사랑한 그에게 내어줄 수 있는 마지막 관대함으로 이별하고자 했다. 이 생각이 결국 나의 프레임에 갇힌 생각이었다는 걸 그와 통화를 끝내고 나서야 알았다.


아름다운 이별은 없다. 완결이 있을 뿐이다. 완결이란 남김이 없다는 뜻이다. 어떻게 남김 없는 완결을 할 수 있을까? 일 년을 함께 사랑을 하고, 육 개월은 홀로 사랑을 지켜왔다. 결코 쉽지 않은 기다림을 통해 나 자신을 찾았다. 그가 기여한 선물이었다. 고마움이 스며든다. 어둠이 빛에 의해 사라지듯, 분노와 증오가 서서히 그쳤다. 이제 명확해졌다. 남김 없는... 고요와 자유가 있다. 힘 있게 말할 수 있다. 고마웠다고. 진정 그의 행복을 빌어줄 공간이 생겼다.




글을 쓰면서 지금의 나를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마음을 추스르고, 정리가 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살기 위해 글이란 걸 선택한 것이었다.


눈이 사랑과 같다고. 소리 없이 왔다 허락 없이 사라진다고. 어느 날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등장한 그가 갑자기 별 다른 예고 없이 저 멀리 떠나갔다.


설렘이 허망함으로 바뀌면 어쩌나. 어떻게 이리될 줄 알았는지 예전에 그와 이별에 관한 생각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는 원하는 바를 말하고, 요청하고 안되면 그때 헤어지는 시점을 알게 되겠지 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믿었다.


빛과 어둠이 함께 공존하듯, 사랑과 이별은 항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었다. 서서히 올 수도 느닷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을 뿐.


문득문득 떠오르는 진한 감정을 어디에든 간직하고 싶었다. 그를 다시 만나기 전, 이 시간이 소중한 것은 나의 모든 감정을 글에 담아 둘 수 있기 때문이리라. 이 심정은 그리움이고, 애증이고, 아쉬움이다.


모든 나의 마음을 글에 남기고, 나에게는 그 무엇도 남겨짐이 없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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