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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원 Dec 23. 2020

하몽 & 사케, 한여름 밤의 꿈

와인과 하몽, 사케와 무화과와 함께 한여름밤의 꿈은 시작되었다. 그러다 골목 어디선가 우연히 만난 고양이 한 마리.

                          


그의 연락처를 접하자마자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나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 졌다. 도슨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톡으로 처음 그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놀랍고 당황스럽고 두근거리고… 복잡한 감정이 올라온다”  그의 심정을 이렇게 전해 왔다. 아니, 두근거린다고? 그 말에 나 역시 가슴이 뛰었다. 기대 이상의 답이라 그랬을까. 설렘이 오래도록 떠나지 않았다.


이튿날 그를 볼 수 있는 아트페어가 또 열렸다. 멀리서 늘 바라만 봤는데. 이번에는 그가 날 알아보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서로 아는 척 하기엔 여전히 어색했다. 그러다 스치듯 마주쳤을 때, 그는 몇 마디 말을 건네었고 짧게나마 대화란 걸 나눌 수 있었다. 뜻밖에도 그다음 날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는 그만 숨을 멈추었다.


 “어제 지나가듯 대화했었는데 기억해요? 언제 한번 만나서 얘기하자고, 연락했어요.”


“그럼요, 기억해요.”


“어디가 좋으세요? 선호하는 지역이 있으면 그쪽으로 가고.

아니면 연남동, 이태원, 대학로 중에서 고르시죠. “


이태원은 내게는 낯선 곳이었다. 하지만 드라마에 등장한 이 곳이 우리에게 즐거운 만남을 선사하길 바랬다.


“이태원, 좋아요!”


그와 처음 이야기를 나눈 이후 보름이 지나서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느껴서였을까? 로맨스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된 듯, 나는 한껏 기대감에 부풀었다. 이태원이란 개방적인 도시와 어울리기 원한 건지,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은 건지, 나는 각선미가 드러나는 파란색 니트 원피스를 입고, 평소보다 정성껏 마스카라를 발랐다.


이태원 3번 출구, 스타벅스 앞에서 우리는 정시에 만났다. 갤러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의 만남이어서 그런 걸까? 서로를 알아보고 왜 그렇게 부끄러운지,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곧바로 그는 예약한 장소로 나를 안내했다. 우리는 이태원 한 복판을 걸었다. 넘쳐나는 인파와 화려한 네온사인, 이국적인 음악. 서먹한 건 잠시, 자유가 물씬 풍기는 거리에 자연스레 동화되었다.


그와 함께 한 모든 순간에 흠뻑 빠져든 나는 장미 빛 연애를 하게 되었다고 확신했다. 살랑거리는 바람과 함께 그에게 눈웃음을 날렸다. 클라이맥스가 다가옴을 직감했다. 그때 서로의 눈동자가  겹치면서 공명이 일어났다. 시간과 공간이 모두 정지한 찰나, 나는 마음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가볍게 흑맥주 한 잔을 시원하게 들이켜고는 그는 입을 열었다. 앞으로 바젤 아트페어 기획에만 집중하고 싶다고! 연애 생각은 아직 없다, 담백하게 말하였다. 정중하지만 기분 상하지 않게 거절한 것이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알겠어요. 그럼 왜 나오셨어요? 그 말하시려고 만나자고 한 거예요? “


약간 볼멘소리가 토라진 것을 감출 수 없었나 보다. 그는 나의 당황한 모습이 솔직하면서 귀여웠다고, 조금의 가능성이 보이는 찰나였다고 나중, 나중에 말했다.


그도 나처럼 이혼을 하였다. 두 번째 결혼은 마지막 사랑이었음 한다고,


“아내가 얼마나 자신이 소중한 사람인지 알게 해 주고 싶다” 고 말을 이어갔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어떻게 하면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있어요?”


그는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하는지 신기했다고 나중, 나중에 또 말했다. 퇴짜 맞았음에도 그의 아내 자리가 너무 탐이 났다. 나도 모르게 소리 지르듯이 물어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데이트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즐거웠던 그 날의 여운이 가실까, 소소한 안부를 물으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오늘도 가볍고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아침에 눈을 뜨니 문자가 와있네요. 새삼 행복하네요. 감사해요”


“제가 행복을 줬다니 저도 기쁘네요. 그렇게 말해주셔서 감사해요.”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그는 담에 걸린 듯 목과 어깨에 통증이 있어 한의원을 다닌다고 했다. 당장 담에 효과가 있는 현미가  면 주머니를 들고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내 마음이 그에게 닿았는지, 이태원에서 본 지 딱 일주일 만에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는 친절하게도 스페인에 살았던 나를 배려해 강남에 스페인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와인과 하몽이 곁들여진 샐러드와 스파게티를 먹으며 웃음꽃을 피웠다. 데이트를 단념하고 만나서였을까? 우리가 나눈 대화와 분위기는 이태원에서 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로맨틱했다.


어떻게든 다음을 기약하고 싶었나 보다. 타국 생활 경험과 여행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와 또 다른 시간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에 건강이슈로 대화를 이었다.


면 주머니를 전자레인지에 7분을 돌리면, 주머니 안에서 뜨겁게 데워진 현미가 통증을 풀어줄 거라는, 별 것 아닌 얘기를 그는 세심하고도 주의 깊게 들어주었다. 그의 경청하는 태도에 신이 났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엄마랑 나만 단 둘이 가는 퇴촌 한증막까지 얘기하고 말았다. 그는 되려 깊은 관심을 보이더니 그곳에 가고 싶다고 했다. 말이 나온 김에 날짜도 정했다.


‘어머나 웬일이야!

오늘은 목요일, 낼모레 토요일, 이렇게도 빨리 우리가 한증막에 간다니, 야호!’


그의 관심사가 나와 동일한 양, 웰빙에 집중해서 말한 보람이 있었다.


2차로 일식 바에도 갔다. 루프 탑이라서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우리 사이로 너울거렸다. 그도 홍콩에서 잠깐 살았던 얘기를 들려주면서 이렇게 말을 많이 한  드문 일이라 했다.


다음 데이트, 퇴촌 한증막이 확정된 순간 나는 긴장이 풀렸다.  모든 대화는 그의 리듬에 맞추었다. 함께 있는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았지만 무슨 말을 나눴는지 그 이후론 정말이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한여름의 밤은 깊어갔다.


그는 2호선을 타고 갔고, 나는 신분당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늦은 밤이라 마을버스가 끊겨

걸어서 집으로 가는 길, 그는 공용자전거가 보이길래 자전거로 집에 잘 도착했다며 톡을 보내왔다.


문득 자전거를 타고 가는 그가 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그려졌다. 시원한 밤공기에 머리칼을 흩날리는 그는 내 안에서 백마 탄 왕자님으로 나에게 소리쳤다.


‘사랑인가 봐!’


이틀 후 퇴촌, 허름하지만 진짜를 고집하는 장인정신이 살아 숨 쉬는 한증막. 그곳에서 한층 더 가까워진 것만 같았다. 나는 기쁜 나머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행복해하는 나를 그도 느꼈는지, 늦은 밤 집에 도착한 후 주고받은 연락에서,


“그냥 편안하고 아늑한...

 행복한 시간이었음, 나도.”


그도 행복했다니! 나와 같은 감정이었다니! 구름 위에 두둥실 떠가는 기분으로 잠이 들었다. 어느새 무더운 여름이 끝나고 구월이 시작되었다. 하루하루가 성큼성큼 가을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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