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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원 Dec 28. 2020

기대하지 않는 순간에…

퇴촌 한증막, 그림 같은 풍경을 담고 있는 냇가에는 파란 잠자리가 난다.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 내가 어떻게 될지 아직 미정이긴 하지만. “


갑자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 날이 실제로 연애가 시작한 첫날이 되었다. 내가 사는 곳과 거리가 있음에도 그가 우리 집 근처로 왔다. 그도 내가 보고 싶었던 걸까. 오늘의 데이트가 그저 단순한 대화로 끝나지 않길 간절히 바랬다.


우리가 선택한 장소는 판교에 있는 ‘루프 엑스’ 와인 바. 간판은 보이지 않고, 조명도 없는 단조로운 입구가 보였다. 제대로 찾아온 곳이 맞나 의문이 들 정도였다. 아무도 없을 것만 같은,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러자 로맨틱한 재즈 선율과 함께 완전 신비한 세상이 펼쳐졌다.


들어서자마자 인도 전통 향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무겁게 느껴지는 공기가 어두운 조명과 퍽 어우러졌다. 연극배우처럼 독특한 의상을 입고 진한 화장이 무척 어울리는 여주인이 구석 자리로 우리를 안내했다.


연인처럼 마주 앉으니 떨리는 마음을 감추기 힘들었다. 수줍지만 행 간 사이가 멀지도 급하지도 않게 대화가 오갔다. 달콤하게 농축된 시간이 우리 사이로 흘렀다. 몽환적인 분위기가 엄습해서 일까? 음악에 취하고, 향에 취하고, 와인에 취하고, 그렇게 초 가을밤 정취에 우리는 취했다.


그를 처음 본 것은 이월, 국제 화랑제 개최를 위한 심포지엄에서였다. 부드러우면서도 담대한 모습에 그만 팬심이 생겼다. 그가 싱글인지, 몇 살인지, 어디에 사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목소리와 눈빛과 몸짓, 그의 모든 에너지가 나를 끌어당겼다.


그 이후 몇 번 더 참여한 서울 옥션에서 간간히 그를 보았다. 지나가다 스치며 인사한 적은 있었다. 그는 공인으로서 청중의 시선을 받으며 응대하느라 늘 바빴다. 그 많은 무리에 한 명이 되어 이야기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뜨거운 여름이 '앙데빵당 드 서울' 전시회 열렸다. 우연히 옆에 앉은 큐레이터 한 분이 그와 잘 어울린다며 싱글끼리 함 만나보라고, 그의 연락처를 주면서 갑자기 미팅을 주선하였다.


오 마이 갓! 기대하지 않는 순간, 얻게 된다고? 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내 것으로 만들고야 말 거야!’


그는 내 첫인상이 부담스러워 데이트는 생각 조차 하지 않았다 했다. 처음 간 퇴촌 한증막에서 눈여겨보니 내가 편안하게 느껴졌다고... 다시금 만나볼 생각을 가졌단다.


우리의 만남을 연결해 준 이토록 고마운 한증막에 다시 안 갈 수 없지. 주말을 맞아, 우리는 동네 탄천에서 두 시간 정도 자전거를 탔다. 그리고는 예정된 퇴촌으로 떠났다.


뜨거운 불가마 돔에서 비 오듯 땀이 등 사이로 흘러내렸다. 분을 버티기 힘들었다. 불구덩이에서 탈출하듯 나오면, 바로 쓰러져 꼼짝도 못 할 지경이었다. 우리는 마주 보고 나란히 누워 말없이 웃었다. 다시 불가마에 들어가려면 한 시간 정도는 쉬어야만 했다.


우리는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처음 본 이월부터  지금까지 서로에게 느낀 점을 나누었다. 신기하게도 그는 국제 화랑제를 총괄 감독하면서 내가 얼마나 즐겁게 파트너십으로 참여는지, 열정적으로 일을 즐기는 지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나의 이름과 얼굴 정도만 아는 줄 알았는데. 나의 존재가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는 것에 그만 감동하고 말았다. 나의 첫 연락에  ‘두근거린다’는 이 그래서 나온 거였구나.


설레고 떨리는 마음이 심장에서 온 몸으로 퍼져갔다. 뜨거워진 우리는 그 날, 그의 차에서 첫 키스를 하였다.


서로 마음을 나눈 지,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뜻밖의 여행을 다녀왔다. 용인에서 얼마 멀지 않은 아담한 리조트였다. 바비큐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는 특별한 요리를 마련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삼나무 향 연어 찜’. 하루 전날 밤 물에 담가 둔 시더 플랭크에 노르웨이산 생 연어를 얹고, 레몬과 로즈메리를 토핑 했다. 그 위에 적당한 소금과 후추를 뿌리는 모습이 마치 숙련된 셰프와 같았다.


그는 포일로 시더 플랭크와 연어 전체를 감싼 후 그릴 가장자리에 놓고, 와인을 능숙하게 따다. 바비큐 그릴 위 포일 안에서 연어가 익어가는 동안, 우리는 스테이크와 와인을 즐겼다. 여왕이 된 이 근사한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으리.


어쩌면 이렇게도 맛있고 부드러울 수가! 기대 이상이었다. 흥건히 젖은 삼나무 도마라서 그런 걸까? 직화가 아닌 복사열로 익혀서 그런 걸까? 촉촉하게 육즙은 살아있고, 삼나무 향의 독특한 맛과 레몬과 허브의 향긋함이 입안을 더없이 풍요롭게 하였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그가 준비한 로맨스 영화를 보았다. 귀한 대접에 여왕의 기분을 느꼈다면, 달콤함에 퐁당 빠져드는 시간이 왔다. 어렴풋이 그리던 상 남자의 터프함이 이런 거였을까? 거침없이 달려드는 그에게 사로잡혀, 영화는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상상도 못 한 그의 새로운 면을 경험한 것이었다.


평소 점잖은 모습과 너무나 대조적인 대담하게 행동하는 그였다. 아, 로맨틱한 순간을 이토록 격정적으로 이끌다니. 그토록 원했던 이상형을 이제 만난 걸까?


꿈을 꾸듯 시월 첫 주를 보냈다. 그의 아파트에 처음 다녀간 이후, 주로 그의 집에서 데이트를 하였다. 영화를 좋아하지만 못 보고 미뤄놨던 영화를 시청하고, 일본 드라마도 보았다. 요리에 취미가 있는 그와 대형 마트에서 장보기도 하였다. 연인처럼 때론 부부처럼 주말에, 바쁘면 주중에도 시간 내어, 일상을 종종 함께 보냈다.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그가 길에서 느낀 감성을 문자에 담아 보내왔다.


“문득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그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느껴졌어.

밤새 비가 왔는지, 아침 공기가 상쾌하다는 것도 그때서야 느꼈고.

주위의 모습, 함께 하고 만나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느끼며 오늘도 가볍게 보내길. “


하루 일정이 빼곡한 스케줄 속에서 점심 잘 먹으라고, 또 퇴근한다는 연락을 하였다. 자주 못 만나 아쉬워하는 나를, 이렇게 다정하게 챙겨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빠도 이렇게 바쁜 걸까? 일주일에 한 번 보기가 이렇게도 힘든 걸까? 태양처럼 뜨거운 심장을 가진 나는 점점 시들시들 지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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