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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원 Jan 01. 2021

다시는 오지 않을 하루의 소중함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고즈넉한 풍경은  흘러간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홍천의 십일월의 밤도 고요하고 아득했다.


 말 '키아프 아트 서울' 글로벌 아트페어가 열렸다. 일 간의 일정 동안, 그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분주하게 책무에 전념하는 그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걸까. 그리움은 채워지지 않는 결핍을 만들었고 서서히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너무 대단하고 존경스럽다…

나랑 놀아주고, 날 안아주는 달달한 시간이 없어, 아쉽긴 하지만,

더 크고 중요한 존재로서 헌신하는 당신을 보면… 나로 대체할 순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와, 그렇게 생각해줘서 너무 고마워.”


“매일 아침마다 가볍고 편안한 하루를 보내라는 문자 덕분에, 그나마 평화로웠나 봐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는 화랑제를 준비하는 동안과 열리는 기간에는, 아프리카나 중동 사막 어디쯤 연락하기 어려운 곳에 있는 사람처럼 소식이 뜸했다.


시월에는 노는 날이 많아, 당연히 연인인 나랑 시간을 보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웰빙의 이슈로 쉬겠다고 아예 만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그의 얼굴을 보자, 섭섭한 마음이 술술 새어 나왔다.


“통보하는 남자 안 만나고 싶어.

날 귀하게 여기는 남자를 나도 원해.

아직은 누군가를 사랑할 시기가 아닌 가봐.

오늘은 어차피 만났으니까 재미있게 놀고,

정말 날 사랑할 수 있는지, 시간을 갖고 들여다봐.

나 계속 기다리는 거 힘들어.”


내뱉은 말은 그때뿐, 말한 순간 바람이 되어 날아가 버렸다. 데이트할 수 있는 날을 통보하는 그를 나는 기다리며 만났고 또 만나고 기다렸다.


기획전과 여러 심포지엄 일정을 완벽하게 소화한 그는 특별한 여행을 마련했다. 하지만 본인을 위한 충전의 시간이었을 뿐, 나는 게스트로 초대된 것,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우리를 위한 이벤트일 거라 생각한 기대는, 자기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내고 싶었다는 그의 말을 듣고 착각임을 알았다. 그런 들 어떠랴. 나를 위해 준비한 여행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그가 예약한 곳은 깔끔한 디자인의 복층 독채였다. 이층 침실 뒤편 베란다에 나의 취향을 고려한 듯한 월풀이 있었다. 프라이빗하고 아늑한 노천 탕이 그것도 이층에 자리하다니, 퍽이나 마음에 들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빨리도 찾아왔다. 그날 홍천 밤하늘엔 어렴풋한 은하수가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광활한 우주에 오직 우리 둘만 존재하듯 고요하고 아득한 밤. 뜨거운 탕 속에서 영화처럼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십일월의 밤공기는 쌀쌀했다. 숨 가쁜 호흡은 뜨거운 김에 뒤섞였다. 물안개처럼 자욱한 몽환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차디찬 공기, 열탕 같은 물, 적막한 밤, 거친 숨소리, 물아일체란 이런 것이었을까? 영원할 듯한 충만함이 다음 날에 또 다음 날에도 지속되었다. 하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마지막 여행인 것을 그때는 몰랐다.


“나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거지??? 당신 진짜 건강 조심해야 돼요, 알겠지?”


“응, 나도 너무 즐거웠어. 계속 행복해도 되고, 건강 조심할게, 너도.

그래서 다시는 오지 않을 하루의 소중함과 경험할 즐거움, 행복감을 놓치지 않을 수 있도록 “


더할 나위 없이 로맨틱한 여행을 다녀와서 더욱더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를 볼 수 없는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들었다. 나날이 의기소침해져 가는 나에게 실망할까, 나름 잘 견딘다고 괜찮은 척하였다. 그는 아는 듯 모르는 듯, 나를 달래는 문자를 보내왔다.


“나도 보고 싶어. 조금만 참자. 그리고 다시 만날 때 더 깊이 서로를 느끼자.”


“아, 어쩜 이렇게도 힘든 건지.

날 어루만지는 손길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눈빛.

참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지… 생각하면서 견디고 있어요”


서로 사랑할 수 있고 그리워할 수 있고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음에 감사하자.”


“완전 공감해요!

사랑하고, 보고 싶고, 그리고 감사해요!

오늘도 당신이 내 옆에 있는 존재 자체로 이미 난 파워풀해요!

참을 수 있을 거 같아, 고마워요!”


“그래그래. 오늘도 힘 있고 따뜻하게 보내”


온종일 우울했던 열두 시간이 단 이, 삼분의 소통만으로, 회색의 칙칙한 무거운 톤에서 화사한 무지개 빛으로 가볍게 전환되다니! 너무나 놀라웠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연락만으로 모든 기분과 정서가 영향받는다는 것은 여전히 불안한 일이었다. 다행히 삶의 돌파구를 위한 강연회에 초대받았다. 그곳에 참가해서 힘을 얻으리라, 다짐하였다.


‘100년 후의 세상을 위한 대화’ 비범한 강연이었다. 과거의 영향으로 현재를 산다고 생각한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당장 낼모레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지금, 10년 후가 아닌, 100년 후를 상상하라고? 나는 죽어 없을 세상을 그려보라니!


한참을 중얼대자 사뭇 진지함이 밀려왔다. 그래, 내가 존재하지 않는 지구별이지만 내 아이들의 아이들, 그들의 아이들이 뛰어 놀 세상이야. 어떤 위대한 유산을 남겨야 할까? 자연환경은 어떻게 보존되어야 하며, 교육은 어떻고, 가치관은? 문화는? 미래를 위한 생각에 깊이 빠져들수록 마음에 공간이 생겼다. 가족에서 지역사회, 우리나라, 세계로 한층 넓혀갔다. 행복과 충만함이 공간에 스며들었다.  따스함이 함께 채워졌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존재로 있어야 할지 명확해졌다. 상황과 남자 친구를 탓하며 징징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란 생각이 퍼뜩 들었다. 우리는 후세와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이 명백하다. 아니, 미래가 지금의 나에게 강력하게 존재하도록 불렀다.


“사랑받고 싶어서 사랑하고,

괜찮다 라는 말을 들으려 사과하고,

인정받고 싶어서 행동하고

아닐까 봐 두려워서 차라리 믿으려 했어.


이제는 사랑하고, 사과하고, 기쁘게 하고, 신뢰할 거야.

왜냐면 난 관대하고 강한 여자니까!


진짜 진짜 왜냐면 우리가 떠나고 없을 100년 후의 아름다운 삶에도,

여전히 당신의 진정한 여자로 남고 싶으니까.

먼저 그냥 할 거예요!


따져 물어서 미안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대하게 대해줘서 고마워요!

당신이 말한, 말하지 않아도 그 모든 것을 신뢰해


“모든 관심이 무엇이든 함께 경험하고 싶다는 걸, 알아.

그래서 고맙고, 나도 너무 좋아. 사랑해!

나도 무엇이든 신뢰하고, 힘들 때도 기쁘게 하고, 어떻든 사과하고 그리고 그냥 사랑할게.”


서로 힘이 되는 연락을 주고받으며, 이런 게 사랑이려니 하였다. 깊어가는 가을과 함께 나의 마음도 깊어 지길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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