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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영 Sep 04. 2016

나에게

니체의 시간

왜 자꾸만 눈이 흐려지는가.

책을 읽는 것도 언젠가는 부질없어질 것인가.

침침하다.

돋보기도 감당할 수 없다면 방법은 무엇인가.

천천히 읽는 수밖에.


늙는다는 것, 늙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구글에 ‘늙다’로 검색을 하니 네이버 국어사전이 먼저 나온다.

1. 사람이나 동물, 식물 따위가 나이를 많이 먹다. 사람의 경우에는 흔히 중년을 지난 상태가 됨을 이른다.


나이를 많이 먹은 건 아니라 늙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지 않은 나이인 건 맞다.

나는 지금 갱년긴가 뭔가를 지나고 있는 변덕쟁이 아줌마다.

내친김에 ‘갱년기’를 검색하는데, 이건 뭐 환자다.

읽다가 늙는 것 같아서 그만 닫아버렸다.


***


"내 작품들은 나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내 모든 저서는 소급되어 날짜가 기입되어야 한다. 내 저서들은 (지금의 내가 아닌) 이전의 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날짜는 왜 소급되는가?

한 삶의 리듬과 조성에 푹 빠져 있을 때 니체는 그것을 기록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열렬히 사랑한다.

그러나 사랑이 떠났을 때, 다시 말해 그가 새로운 삶의 리듬과 조성을 갖게 되었을 때, 그는 이전 삶이 이루어진 시간을 기록한다.


***


나는 인생에도 답이 있다고 믿는다.

‘답이 없다’는 답일지라도 말이다.

나에게 왜 결혼이 ‘노답’이었는지, 왜 결혼이 숙제였고, 어떻게 결혼을 선택했는지 물었다.

그리고 ‘결혼’과 헤어지면서 ‘내 결혼의 시간’을 기록하고 싶었다.


뭐를 해도 10년쯤 하면 전문가가 된다는데, 20년을 해도 답이 없으면 없는 거였다.

‘결혼’이란 옷을 입은 유부녀인 나는, 거울을 볼 때마다 멀미가 났다.

누가 억지로 입힌 것도 아닌데, 안 입으면 불편해서 꾸역꾸역 입고 있다 보니 거울 속의 모습에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내가 원했다기보다는 아는 삶이 그거밖에 없었다.

‘결혼’은 내게 맞지 않는 옷이었다.

‘결혼’이라는 옷도, ‘엄마’라는 옷도, 20년쯤 입었으면 이제 됐다.

벗자. 벗고 살아보자. 아니, 벗고 놀아보자.


사랑했더니 아이가 찾아와 결혼했고, 아이를 다 키우고 나니 결혼은 끝나 있었다.

내가 아는 ‘여자의 일생’은 여기까지다.

내가 알고 있던 ‘삶’이라는 그림을 다 살아버렸다.


***


니체는 묻는다.

“너는 너 자신을 멸망시킬 태풍을 네 안에 가지고 있는가?”

니체는 자기 안에서 본성처럼 자리하고 있던 지배적 정서를 공격하도록, 억눌려있던 다른 정서들을 부추겼다.

‘나’ 아닌 또 다른 ‘나’들을 나서게 만드는 분열증!

‘나’와 ‘나’의 전쟁!

그는 자기의 건강을 믿지 못하면 도저히 감행할 수 없는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


그래! 죽어야 산다면, 이제쯤 죽어도 좋다.


지금부터는 ‘내가 모르던 나’로 살 차례다.

나는 지금 ‘그 아이’를 임신 중이다.

입덧 하면서 기다리고 있다.


그 아이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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