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과 시계
아버지는 애연가셨다. 내 기억에 하루에 두세 갑은 족히 피우시는 것 같았다. 엄마의 금연하시던지 줄이시라는 말씀은 그저 듣기 좋은 노랫가락이었다. 그렇게나 좋으셨는 가 보다.
그 대신 약주는 입에도 못 대셨으니, 아마 담배 피우시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셨는 지도 모르겠다.
약주를 못 하셔서 그런 지 군것질, 간식거리는 아주 풍성하게 미리 장만해 놓으셨었다.
자식들한테 이 놈하고 큰 소리 한번 치신 적 없고 매를 드신 적도 없다.
못 마땅하시면 으흠 하고 큰기침소리 내시는 게 다였다.
매운걸 못 드셔서 어쩌다 매운 음식이 밥상에 올라오면 " 고춧가루 한 근 값이 10만 원은 해야..."라고 말씀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러면 엄마는 쩔쩔매며 미안해하셨다.
여담이지만, 지금 나의 남편도 매운걸 못 먹는 사람이다. 음식이 맵다고 하면 나는 일단 안 맵다고 우겨보다가 웬만하면 그냥 드슈 라고 하는 데.. 간식 좋아하는 거랑 성격이랑 아버지를 많이 닮은 사람 같기도 하다.
그래서 인가? 5명의 사위 중 내 남편을 젤 좋아하셨다.
키도 크고 미남이셨던 아버지는 황성옛터를 즐겨 부르시고 커피를 좋아하셨고, 직접 들은 적은 없지만 엄마의 말씀에 의하면 트럼펫도 잘 불었다 하셨다. 이산가족 찾기가 한창일 때는 나에게 이북에 두고 온 할머니,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들, 조카들 이름을 자세히 알려주시고 사시던 동네주소도 꼼꼼히 알려주셨었다.
나는 아버지가 원하시니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도 나갔었다. 사돈의 팔촌이라도 연락이 올까 기다리셨던 아버지. 결국엔 아무도 만나지 못하셨다.
내가 결혼 후 아기가 생기지 않아 걱정일 때 밖에서 만난 아버지는 우리 집에도 안 가신다고 하더니 잘 챙겨 먹으라며 커다란 병을 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익모초 환이었다) 바로 되돌아 버스를 타고 가시던 아버지께 용돈을 드리지 못한 것이 30년이 넘었어도 내내 맘에 걸리는 일이다. 버스에 계신 아버지께 손을 흔들며 얼마나 울었는지.
그 덕분인지 큰 아이가 생겼고, 아버지는 그 아이를 참 예뻐라 하셨다.
아버지가 그 좋아하시던 담배 때문에 폐암에 걸리셨다. 많이 고생하셨다. 그러는 중에도 붓글씨도 쓰시고, 아버지 살아오신 이야기.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글도 쓰셨다. 항암치료로 머리가 하나도 없으실 때 낯가림이 무척 심해서 날 힘들게 하던 큰 아이는 신기하게도 그런 모습의 할아버지 무릎에 가서 앉아 있곤 했었다.
둘째 아이 낳고 이름도 지어주시고, 아버지는 우리 곁을 떠나갔다.
예쁘게 생긴 맛있는 걸 보면 남편과 이야기한다. 지금 곁에 계신다면 좋은 곳 구경도 함께 가고 저런 것도 많이 사 드릴 텐데.... 아버지의 멋지게 담배 피우시던 모습이 그립다.
그저 그리움은 슬픈 미소를 짓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