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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파랑 Oct 22. 2023

아빠와 축구 경기를 보다

1986년 6월 6일 금요일
오늘은 현충일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조기를 달았다. 조기를 달고 나니 텔레비전에서 불가리아와 우리나라가 축구를 하였다. 그때는 불가리아 1 – 0 한국으로 지고 있었다. 얼마 지나니 김종부 선수가 골인을 넣(었)다. 우리나라의 그 함성 소리는 참 컸다.


일기에 축구 경기를 자세히도 적어두었다. 내가 축구를 좋아했나? 그렇진 않다. 이 일기를 읽고 직감했다. 이 경기가 보통 경기가 아니었을 거란 걸.     


아빠는 스포츠 경기 보는 걸 좋아했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은 물론 당시 유행하던 권투 시합과 야구 경기를 어찌나 열심히 챙겨 보는지, 중요한 경기가 있는 날이면 밥도 일찍 먹고 식구들 모두 티비 앞으로 모였다.     


응원하는 아빠를 보면 마치 이곳이 경기 현장인 것만 같다. 큰 소리로 응원하고 안타까운 탄식도 거침없이 내뱉는다. 평소 다혈질인 아빠는 희한하게도 스포츠 경기를 볼 땐 화를 내지 않았다. 신나게, 열정적으로 응원하다가 경기가 끝나면 승패에 상관없이 금세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나도 아빠 옆에서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같이 흥분하며 경기를 즐길 수 있었다.     


일기를 쓴 저 날을 위키백과는 이렇게 기록한다.      


“불가리아와의 A조 조별리그 2차전에서 0-1로 끌려가던 후반 25분 대한민국 월드컵 통산 2번째 골을 터뜨리며 대한민국 월드컵 역사상 첫 승점을 안겨주었다.”     


아빠가 얼마나 소리치고 박수치며 신나 했을지, 안 봐도 비디오다. 아마 그런 아빠를 따라 내 기분도 최고였던 것 같다. 축구는 잘 몰라도 아빠와 나를 기쁘게 해준 선수 이름과 스코어를 일기에 적는다. 기쁘다는 생생한 감정 대신 정보를 쓴다. 감정을 자유롭게 글로 남겼더라면 더 좋았으련만. 그러기엔 아직 어렸을 수도 있고, 어쩌면 이미 감정을 직접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큰일이 벌어져 마음이 몹시 불안할 때면 일기를 쓰지 못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일기 쓰기가 습관이 들었던 내게, 일기와 일기 사이의 긴 공백은 그 시기 말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기록하지 않음으로써 기록된, 나의 혼돈과 불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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