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받는 글쓰기 1. 좋은 문장을 쓰려면
동료 J와 유명 작가의 북토크에 갔던 날. 행사가 끝나고 책방을 나와 근처 술집에 들어갔다. 술집 안은 비릿하고 구수한 노가리 굽는 냄새와 왁자지껄한 소음으로 가득했다. 주문한 감자튀김이 나오기 전, 마카로니 뻥튀기를 앞에 두고 맥주잔부터 서둘러 부딪쳤다.
그와 난 각각 책을 두 권, 세 권 펴냈지만, 별 반응을 얻지 못한 무명작가들이다. 애써서 쓴 책이 소리 없이 묻힐 때 그 막막함과 아쉬운 감정을 우린 무려 다섯 번이나 함께 나눴다. 조금 전 무대 위의 저 유명한 작가는 어떻게 ‘그런 글’을 쓰게 되었을까, ‘그런 글’이 아니라 ‘그런 삶’이 먼저 있었던 건 아닐까, 그 삶을 살았다고 다 작가가 되는 건 아닐 텐데 왜 굳이 힘든 글쓰기를 택했을까 등등 답 없는 질문들에 나름 추리를 해가며 추측성 해답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나를 멀찍이 떨어트려 놓은 채, 남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만큼 안전하고 짜릿한 대화란 없는 법. 때론 이런 대화가 숨 쉴 구멍이 되기도 하고 말이다.
“뭐 그 사람은 그렇다 치고 말이죠, 우린 어쩌다 ‘이런 글’을 쓰게 됐을까요?”
J의 질문에 저만치 흘러갔던 정신이 지금 이 자리로 되돌아왔다.
“생각해 보면 난 중학교 때부터 소설을 많이 읽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에세이를 쓰고 있잖아요.”
오, 어쩐지. 그의 에세이는 서사가 또렷하고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도 무척 다채로웠다. 그의 주변엔 이상한 일만 벌어지고 독특한 사람들만 사는 것 같았는데, 알고 보니 사소하고 평범한 사건도 소설적인 감각으로 바라보고 써내는 감각이 그에게 배어 있었나 보다.
“그럼 왜 소설 안 쓰고 에세이를 써요?”
“음... 처음 글쓰기를 에세이부터 시작해서 그렇죠. 그땐 작가가 되려는 생각도 없었고 그냥 무작정 뭔가 쓰고 싶었거든요.”
잠시 말을 멈췄던 그가 다시 말했다.
“저도 언젠가는 소설 쓰고 싶어요. 가끔 구상도 해요. 그전에 우선은 제 안에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에세이로 써보는 중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혜진 작가님은 어떻게 글을 쓰게 됐어요? 쓰신 글 보면, 정보를 쉽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게 신기해요. 저한테는 그게 어렵거든요.”
그의 질문에 나도 5초 정도 생각을 해 보았다. 그때 떠오른 게 신문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만 해도 집에 계몽사 디즈니 명작동화와 한국동화, 위인전 등 세트로 된 책이 꽤 많았다. 부모님은 학습그림만화책도 전집으로 사주셨다. 그런데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아빠가 다니던 직장에서 나오게 되면서 순식간에 가세가 기울었다. 그때부턴 이미 다 읽은 책을 보고 또 보는 수밖에 없었다. 중학생이 되어 이 책들은 모두 친척 동생에게 물려주었고, 우리 집엔 읽을 책도, 책을 살 돈도 없었다. 도서관은 버스를 타고도 한참을 가야 했다.
다행히 날마다 집으로 신문이 왔다. 한자가 뒤섞인 어려운 내용은 제쳐두고 한글만 나오는 쉬운 기사를 골라 읽었다. 그런 글은 연예인 인터뷰나 생활정보기사가 많았다. 새로운 걸 알아가는 게 재미있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 한문 수업을 열심히 들은 덕분에 정치 사회 기사나 칼럼도 제법 읽을 수 있었다.
독서 욕구를 신문으로 해소하던 그 시절에 이미 글에 대한 감각이 잡힌 걸까? 내가 단순하고 쉬운 문장과 표현을 쓰길 좋아하는 것도, 어쩌면 한정적인 지면에 정보를 전달하려 애쓴 기사글을 많이 접한 탓일까? 사실 내게도 아름답고 때론 철학적인 통찰이 담긴 문장에 대한 욕구가 아예 없지 않다. 다만 그런 시도를 할라치면 어색하고 손끝이 오그라든달까. 내 것 아닌 걸 탐하는 느낌도 들었다.
“시적인 문장을 못 쓰는 건, 아마 신문만 읽은 탓인가 봐요.”
J 앞에선 “이게 다 신문 탓!”이라며 잔뜩 너스레를 떨었지만, 집에 오는 길엔 마음이 복잡했다. 간결한 문장이 불만인 건 아니었다. 그 시절의 무언가가 마흔을 훌쩍 넘긴 지금의 나에게 계속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게, 그런데 하필 그 시절 내가 접한 것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명작도, 세계 고전이나 대문호의 소설도 아닌, 단 하루 생존한 후 곧바로 폐지가 되고 마는 신세의 신문이었다는 것이 왠지 씁쓸했다. 두고두고 읽는 용도가 아닌 소비성 글을 지속적으로 읽고 쌓은 감각이란 어떤 것일까. 정말 나는 ‘신문 키드’라서 건조한 문장밖에 쓸 수 없는 사람인가.
술기운에 울적한 채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햇빛이 밝았다. 전날, 축축해서 축축 늘어지던 고민도 햇볕에 잘 마른 수건처럼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신문키드. 뭐 그러면 어때. 나는 새로운 정보를 좋아하고 그걸 내 삶과 뒤섞어 이야기로 풀어놓는 게 재밌다. 재밌고 좋아하는 걸 하면 되지. 그리고 ‘유명 작가’들이 다 문장을 잘 쓰는 것도 아니고, 문장을 잘 쓴다고 유명 작가가 되는 것도 아니다. 책 많이 읽었다고 다 작가가 되는 건 더더욱 아니고. 이전과 다른 문장을 쓰고 싶다면, 어색하다고 내치는 대신 오그라드는 손끝을 펴고 뭐가 됐든 써보면 될 것 아닌가. 글쓰기는 칼로 무채를 써는 것처럼 능력의 영역이라, 하면 할수록 쓰면 쓸수록 늘 수밖에 없다고, 그러지 않고 배길 재간이 없다고 내 입으로 무수히 이야기해 오지 않았나. 그래, 나도 해보자!
음. 잠시 ‘예쁜 문장’으로 이 글을 마무리해 볼까,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문장에 욕심을 내는 건 나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 사람도 글도 금방 쉽게 변하지 않고, 더군다나 글에 힘을 주면 줄수록 자연스러움과는 멀어질 뿐이다. 그래서 다시, 지금처럼 간결하고 담백하게 진실만을 전하는 글을 쓰기로, 한다. 내 특징을 더 벼리고 벼려 보지 뭐. 그게 나니까. 무명 작가라서 내 글에 관심 있는 사람도 적은데 뭐 어때. 무명 작가인 게 이럴 땐 좋다, 라고 쓰려니, 와, 킹받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