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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Sep 16. 2024

등대

바짓단이 펑퍼짐한 노란색의 파자마를 입은 공덕이 연희를 향해 손짓했다. 그를 본 연희의 감정은 반반이었다. 어리둥절함과 혐오. 헬기 착륙장 앞에 깃발처럼 휘날리는 공덕. 연희는 인사를 건넸다.


“대체 어디를 가길래 복장이 그 모양이야? 공덕, 춥지 않아?”


공덕이 연희의 짐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며 말했다.


“뭐, 저야 회장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는 게 일이잖습니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죠. 자, 오르시지요.”


“혹시 전화 좀 하고 와도 될까? 급한 게 아니라면.”


“집사님을 바로 모시고 오라는 게 회장님의 명령이라서요. 죄송합니다만, 그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연희는 욕심을 내려놓기로 했다. 여기서 더한 재촉을 한다는 것은 분명 이유 있는 행동으로 보일 것이고, 강제로 시간을 얻어 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삐걱대는 후일을 불러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공덕이 연희의 곁으로 다가왔다. 연희는 지레 겁먹거나 하진 않았지만, 가현이 걱정되었다. 프로펠러의 강한 바람이 불어왔고, 연희는 빈 웃음을 지으며 오른발을 헬기에 올릴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공덕이 오르고, 헬기의 문이 닫혔다.


“그래, 어디를 가는데?”


공덕이 눈을 감은 모습 그대로 그에 답하였다.


“바다입니다. 절벽이 있고, 노을이 있는.”


“어이가 없네. 절벽과 노을이 없는 바다가 이 세상에 어딨다고. 그럼 하나만 더 물을게. 회장님께서는 벌써 공항에 가 계신 거니?”


‘퍽.’


연희의 물음과 동시에 헬기에 퍼져 나간 소리였다. 공덕의 허리 버클이 떨어져 나가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공덕은 거친 숨소리를 내뿜으며 뻗은 연희를 다시 똑바로 자리에 앉힌 다음, 그녀의 안전벨트를 세게 옥죄었다. 그러던 중, 눈이 풀린 연희와 눈이 마주친 공덕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저를 너무 원망하지 마십시오. 회장님께서 거처 얘기가 나오거든 조용히 끌고 가라고 제게 당부를 하셔서요.”


그리고 공덕은 연희의 눈꺼풀을 내려 주고서 그녀의 목을 목받이에 뉘어 주었다. 일을 마친 공덕이 한숨 돌리려는 그때, 그의 뒤편 너머에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딱하네요.”


조종석에 있는 사람이었다. 턱선이 갸름했고, 쥐처럼 생긴 사내였다. 그런 생김새와는 별개로 온정을 지닌 사람인 듯 그의 말투엔 진심 어린 연민이 깃들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공덕이 축 늘어진 머리를 벽에 기대며 말했다.


“휴- 나 역시 이번만큼은 영 내키지 않아. 이 노파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자기 일생을 바친 사람을 이렇게 내치는 건 아니라고 보는 주의야.”


그를 들은 사내가 쥐처럼 찍찍대며 말을 이었다.


“흐흐. 실장님 입에서 회장님 뒷담이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일 뿐이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택은 온전히 회장님 관할이니까.”


“회장님도 참 이럴 때 보면 무섭습니다. 이 모두를 위해 저택에 거짓 찌라시를 흘린 것이잖습니까. 그것을 가현 아가씨의 귀에…”


그에 공덕이 벽을 치며 말했다. 손이 아닌 머리로 낸 소리였다.


“그만.”


공덕의 말이 있고 난 후, 조종석의 생쥐는 입을 다물었다. 옳지만은 않다고 생각하는 일에 뛰어든 두 사람. 당연히 여기 이 둘에게도 서열은 있었고, 위에 있는 사람은 공덕이었다. 그러나 생쥐는 알 수 있었다. 방금의 공덕은 겁박이 아닌 자신을 억누르기 위한 수단으로써 벌인 행동임을. 생쥐는 뒤편에 앉은 공덕을 향해 말하고 싶었다.


‘저희는 결국 값싼 동정밖에 하지 못하는 가련한 사람들이군요.’


그럼, 저 같은 말을 들은 공덕이 자신에게 이렇게 답하지 않을까 하고 생쥐는 또 생각했다.


‘…그래, 동감이야.’


비행을 시작한 지 이제 곧 1시간이 다 되어 갈 무렵, 밖은 이제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겨울의 짧은 태양이 슬슬 오늘의 마지막 빛을 비추며 노을 진 바다를 그리고 있는 시간. 헬기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흑색의 섬 하나가 석양을 배경 삼아 화려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조종석의 생쥐가 벽을 가벼이 두드리며 공덕을 불렀다.


“실장님, 곧 착륙할 것 같습니다.”


연희를 기절시킨 뒤 줄곧 눈을 감아 있던 공덕은 그제야 눈을 떴다. 눈을 뜬 공덕은 눈앞의 연희를 먼저 살폈다. 연희의 의식은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공덕은 조용히 밖으로 고갤 돌렸다.


“여전히 좋은 경치로군. 예전 그대로야.”


창밖 경관을 바라본 공덕이 말했다.


“그렇죠?! 저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역시 대자연이란! 이곳의 노을은 정말이지, 일품 중의 일품입니다. 이런 노을? 큰 나라를 가도 보는 게 쉽지 않을걸요? 그렇지 않습니까?”


생쥐의 조종 실력은 실로 수려했다. 넓은 땅 중, 고른 땅을 기어코 골라내어 곧장 그 위로 사뿐히 내려놓는 그. 헬기의 착륙을 마친 생쥐가 공덕에게 말했다.


“저는 이제 돌아가면 됩니까?”


공덕은 그에 답하지 않고서 헬기에서 내렸다. 선택지가 없었다. 생쥐가 고개를 푹 숙이며 공덕을 따라 내렸다. 그리고 생쥐는 공덕의 옆으로 가,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실장님.”


생쥐의 부름에 공덕이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그 집’에 가 볼 생각이야.”


“아하. 그러고 보니 아이가 많이 컸겠네요. 그럼, 저는 어떻게.”


생쥐의 뒷말은 무시코서 공덕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지? 우리가 살린 그 아이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보았나?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궁금해.”


“어떻게, 그럼, 저도.”


“우리가 둘이 왔던가?”


공덕이 헬기를 향해 고갯짓하며 말했다.


“저 힘 없습니다, 실장님.”


“원래 힘없는 사람이 일을 하는 거야.”


“연 집사를 등대에 내려놓고, 다시 회장님을 모시고 이리로 오면 되는 거죠? 그렇죠? 그런 걸로 알겠습니다?!”


생쥐의 외침에 공덕이 그에게로 손수건 날리듯이 손을 퍼덕거려 보였다. 그리고 공덕은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겨 나갔다. 길은 한 곳으로 기다랗게 이어져 있었다. 그곳으로 이어지는 길가에 놓인 수많은 갈색의 풀들, 사방으로 피어오르는 세찬 파도 소리에 기가 죽은 듯 잔뜩 움츠러든 모습을 띠고 있었다. 공덕은 길을 벗어나지 않고 계속해 발걸음을 옮겼다. 한 번쯤은 주변에 펼쳐져 있는 황홀한 경관들에 눈길을 내어줄 법도 한데, 그의 눈은 정면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사박거리는 그의 걸음 소리가 멈춘 것은 해가 떨어지기 바로 직전, 밤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을 무렵이었다. 공덕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태양이 물러난 탓에 뚜렷이 보이진 않았지만,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집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현관에는 어떠한 알림 장치도 부착되어 있지 않았다. 문에 달린 것이라곤 둥근 쇠고리 두 개. 그것이 고작이었다.


‘쿵쿵.’


공덕이 두 개의 쇠고리 중 하나를 손에 잡고서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안에서 밝은 음을 가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공덕이 말하자, 문이 열렸다.


“어?!”


안에서 나온 여자가 공덕을 발견하고는 입을 틀어막으며 소리 냈다. 여자는 체구가 작았고, 눈망울이 몹시도 여렸다. 공덕이 그녀의 손에 들린 핸드드립 커피 주전자를 대신해 들며 인사를 이었다.


“저를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세월이 벌써 많이 흘렀지요.”


그에 여자가 떨림과 흥분이 뒤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기억하다마다요! 어떻게 잊겠어요. 그 은혜로운 날을.”


“그것참 기분이 좋군요. 그것도 좋은 기억으로 남겨두셨다니 더더욱이요.”


“저…,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저는 얘기를 들은 게 없어서요.”


“아, 아. 그러시죠. 사과가 앞섰어야 했는데. 이렇게 불쑥 찾아올 요량은 아니었습니다만, 일이 그렇게 되고 말았네요.”


“용무가 있으시군요?”


“네. 얘기를 드려야겠죠. 우선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일곱 걸음과 다섯 걸음이었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그 둘의 걸음 수 차이는. 담을 쌓았다고 해야 할까. 집 안의 분위기가 그랬다. 모던함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물건들. 대부분이 구식이었고, 하나 같이 옛사람 냄새를 풍겼다. 나무로 된 바닥재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러 사람을 견디지 못할 것처럼 낡아 있었고, 소리가 났다.


“마실 것을 내올 테니 의자에 가 기다리시겠어요?”


여자가 부엌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평소의 공덕이었더라면, 거절과 동시에 그녀를 돌려세웠겠지만, 지금의 그는 그러지 못했다. 공덕은 뜨거운 숨을 작게 내뱉으며 의자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리에 앉은 그는 생각했다.


‘그때와 달라진 것이 한 가지도 없군. 집도, 사람도. 모두가 위태로운 균형을 잡고 있어. 본인들은 그를 모르는 것일까.’


그리고 공덕은 탁자에 놓인 인형을 발견했다. 가마에 구워 만든 듯 보이는 돼지 세 마리. 공덕은 개중에서 가장 작은 돼지를 손으로 집어 반대 손바닥에 올렸다. 그때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그건 조심히 다뤄 주셔야 하는데.”


그에 공덕이 황급히 돼지를 제자리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소중한 물건인가 보군요.”


“네. 하지만 괜찮아요. 그만한 관심이 닿았다는 뜻이니까. 직접 만든 것치곤 나름 그럴싸하죠? 특히 그 작은 녀석은 만들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어요. 몇 번을 깨부숴 먹었는지.”


작은 돼지 한 마리로 교감 되는 상황에 분위기가 느슨해지는 듯 보였지만, 다시 팽팽해지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남편분은 어디 가셨습니까?”


“아. 그이는 아이와 함께 등대를 보러 나갔어요. 등을 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이가 등대를 배우고 싶다고 해서요. 마홈, 아! 저희 아이 이름이에요.”


공덕은 여자가 가져온 차가 탁자에 채 들붙기도 전에 자리를 떴다. 황급히 집 밖을 나가는 공덕을 본 여자는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 덤덤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소리칠 용기도 없이, 여자의 기도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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