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밤, 작은 조명들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밤. 조용히 가라앉은 저택의 최상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한 손에는 양장을 한 노트,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굵다란 손전등. 남현이었다. 방에서 빠져나온 그는 조금의 소리도 일지 않게,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써 방문의 손잡이를 돌려 문을 닫았다.
“후.”
짧고 결연한 한숨 소리였다. 한숨을 그친 그는 곧바로 한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겨 나가기 시작했다. 복도 양쪽 위에 매달린 조명에 비친 그의 표정은 무에 가까웠지만, 어딘가 슬퍼 보였다. 그리고 그의 걸음은 얼마 못 가, 이내 자리에 멈추었다.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3층 저택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엘리베이터 한 대. 지금의 엘리베이터가 가리키고 있는 위치는 1층이었다. 남현은 손을 앞으로 내밀어 버튼을 눌렀다. 아래로 내려가는 버튼. 엘리베이터 입구 위 작은 스크린에 1층에서부터 2층, 그리고 3층을 향해 오르고 있다는 걸 보여 주는 붉은색의 작은 LED가 떠올랐다. 3층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시간, 남현은 손에 들고 있던 노트를 펼쳤다. 화려한 외형과는 달리, 안쪽은 일반 노트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일반적인 필기 양식이 새겨져 있었다. 날짜, 규칙적인 줄, 그리고 요령껏 활용하는 것이 가능한, 넓지 않은 여백의 공간. 그가 펼친 쪽에는 아무런 글자도 쓰여 있지 않았다.
‘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남현은 비어 있는 장에 떨궈 놓았던 눈길을 거둬들이고서 엘리베이터 안쪽으로 발을 내렸다. 문이 닫히고, 지금까지 아무 말이 없던 남현이 처음으로 입을 열어 보였다.
“새 이야기를 들을 시간은 항상 이렇게 발맞추어 찾아오지.”
그리고 남현은 노트 사이에 꽂혀 있던 펜을 빼내 들었다. 옻칠이 되어 있는 만년필 한 자루. 금가루를 뿌려 놓은 듯 겉면이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남현은 만년필의 뚜껑을 열었고, 그에서 나온 펜촉을 층수를 누르는 버튼 아래로 가져갔다. ‘ㅅ’자 모양의 열쇠 구멍으로 잠기어 있는 네모난 입구. 남현은 펜촉을 그 안으로 힘차게 밀어 넣었다.
‘찰칵.’
끈 달린 스탠드의 줄을 아래로 당겼다가 놓았을 때 들리는 소리의 감촉과 그 느낌이 비슷했다. 입구가 열리고, 남현은 펜촉을 구멍에서 빼내었다. 원래였더라면 전선 다발들이 들어 있어야 할 곳. 전선은 들어 있지 않았다.
‘B0’
Basement floor 0.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 보인 것은 저택의 숨은 층수로 내려갈 수 있는 버튼이었다.
“오랜만에 보는군.”
말을 하는 남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남현은 펜의 뚜껑을 닫고 다시 노트에 꽂았다. 그리고 전등을 쥔 반대쪽 손으로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바깥에 나 있는 붉은색 LED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3, 2, 1, B1…, 남현이 탄 엘리베이터는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갔다. 숫자는 ‘B1’ 주차장에서 멈췄다. 그리고 지하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LED에 띄어져 있던 문구 ‘B1’은 모습을 감추었다. 말 그대로 사라졌다.
‘띵.’
지하 0층의 문이 열렸다. 첫 느낌은 눈이 부시다, 밝다, 저와 같은 말들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했다. 조금도 음침하거나, 눅눅하거나, 어둡지 않았다. 천장엔 실내 환기용 프로펠러가 계속해서 돌고 있었다. 1층, 2층에 비해 환경이 좋지 않다고 말하는 건 불가했다. 오히려 공기나 분위기 따위가 더 나은 편에 속한다고 말하는 편이 맞았다.
“상쾌하군.”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온 남현이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했다. 그리고 서서히 걸음을 옮겨 놓으며 이곳저곳을 살폈다.
“연희가 참 잘해 줬어, 시작부터 지금까지. 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공기가 필요한 시점이야. 나의 그녀가 내게 말해 줬듯이…”
말을 마친 남현은 계속해서 안을 향해 걸어갔다. 적당한 온도의 공기가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고, 큼직한 그의 발이 더욱이 안쪽으로 들어가, 그 움직임을 멈추었을 때, 분홍색의 막 하나가 나타났다. 완벽한 불투명에, 뒤의 풍경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두툼한 장막이 아니었다. 실루엣이 보일 정도의 커튼. 얇았고, 하늘하늘했다. 남현의 차량 색과 완벽히 일치했다.
‘스읍…, 후…, 스읍…, 후…’
사람의 숨소리였다. 그리고 틈틈이 섞여 나오는 기계음. 병원의 병실에서 들릴 법한 소리였다. 그러한 소리 속에, 남현의 왼손이 커튼 위로 슬금슬금 올라갔다. 벚꽃색의 커튼이 그의 왼손과 함께 단번에 옆으로 걷히었다. 남현은 걷어 낸 커튼에 올린 손을 떼며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보는 이 하나 없었지만, 그는 끓어오르는 울먹임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리며 입을 벌렸다. 벌려진 그의 입안에서 영 균일지 못한 말들이 떨어져 내렸다. 평소 그답지 않은 말투였다.
“…그래, 어떻게 오늘따라 얼굴이 더 나아 보이는군. 내 오늘도 당신 이야기를 들으러, …당신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이렇게 내려왔소.”
깊은 잠에 빠진 듯 침대 위에서 눈을 감고 있는 한 명의 여인. 그녀는 천장을 향하여 반듯한 자세로 뉘어져 있었다. 얼굴을 덮고 있는 인공호흡기와 혈압과 맥박을 나타내는 모니터, 팔에 깊숙이 꽂혀 있는 TPN. 그들과 함께 여인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는 듯 보였다. 남현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60대의 여인. 그런데, 환자 신분에 너무 많은 꾸밈이 덧씌워져 있었다. 깡마른 양 손가락에 칠해져 있는 분홍색의 매니큐어, 양 귓불과 목에 매달려 있는 십자가 문양의 액세서리, 마지막으로 코 위에 얹혀 있는 안경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심플한 테에 가벼운 플라스틱 렌즈였지만, 그를 감안하더라도 테의 다리가 너무나 강한 강도로 여인의 귓등에 박히어 있었다. 적어도 환자 본인이 원하여서 자리하고 있는 물건들은 아닌 듯 보였다. 강제성이 짙은 그림이었다.
“그럼, 오늘도 어디 잘 부탁함세.”
남현이 앉은뱅이 의자를 발로 끌고 와, 엉덩이를 앉히며 말했다. 다음으로 그는 가져온 손전등을 바닥에 내려놓고 노트를 펼쳤다. 그가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전, 펼쳐 보였던 그 페이지였다. 그리고 그는 노트에 꽂혀 있던 만년필의 뚜껑을 입에 물며 말했다.
“…저번에, 저번에는 당신이 요리사의 솜씨가 형편없다고 해서, 그날로 그 사람을 내보냈소. 그리고 그다음에는 차량의 칙칙한 검은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그날로 밝은색으로 칠하였지.”
펜을 손에 쥔 채로 흥분 섞인 목소리와 함께 말을 토해 내던 남현은 잠시 뜸을 들인 뒤, 입에 물고 있는 뚜껑을 퉤 하고 뱉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연희, 그 건도 진행 중이오. 일 잘하는 사람에 악감정은 없지만, 당신이 새로운 사람을 바란다고 하니…, 그렇게 해야지.”
여인은 아무 대꾸가 없었다. 그저 호흡기 안에서 그녀의 입김이 나타나고, 사라질 뿐이었다. 펜을 든 남현은 말을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사실은 말이지. 오늘은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게 아님세. 오늘은 의견을 물으러 왔어. 이제 막 20대로 접어드는 꼬맹이가 하나 있는데, 아직은 어린 철부지에 불과하긴 하지만, 당신의 새로운 간병인으로 딱 적합할 것 같아서 말이야. 퍽 강단이 있는 소녀야. 어찌 생각하시오?”
말을 마친 남현은 손에 든 노트 위에서 펜을 돌리며 여인의 호흡기를 바라보았다. 남현이 여인을 바라보는 시간은 몹시도 평온했다. 의료기의 기계 소리와 여인의 숨소리, 가습기의 물이 가열되는 소리, 모든 게 평화로웠고, 또 부드러웠다. 그 공간에 있는 모든 존재가 그러하였다. 마찰이 없는 공간. 다툼이 없는 공간. 그저 의자에 앉아 있는 남편, 침대에 누워 있는 아내, 한 쌍의 부부가 함께 있는 광경일 뿐. 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다. 남현은 여인의 입김에서 서서히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노트 위에서 돌아가던 그의 만년필도 뒤따라 움직임을 그치었다. 여전히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노트의 어느 한 페이지.
“그래. 좋다고 말해 주니 나도 좋구려.”
한 시간이 지난 후에 나온 남현의 첫 마디였다. 말을 뱉은 남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만년필을 노트에 끼우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있는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늘 이렇듯 생각을 나누니 마음이 든든하오. 다음은 그 아이와 함께 오리다.”
그리고 남현은 의자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다음으로 그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손전등과 만년필의 뚜껑을 쥐어 들었다. 그리고 손전등을 쥔 손으로 커튼을 붙잡았다. 또다시 벚꽃이 침대에 누운 여인을 가렸다. 남현은 가려진 커튼 뒤로 희미하게 보이는 여인의 그림자를 흘겨보았다. 작별을 고한다는 느낌보다는 미련에 휩싸인 인간의 질척거림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5분이 흘렀다. 양발이 바닥에 붙기라도 한 듯, 남현은 좀체 자리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10분. 10분이 조금 지난 시간, 남현은 몸을 돌렸다. 처음의 호탕한 걸음 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맥없는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가는 그. 커튼이 원위치로 되돌아간 지금, 지하의 공간에는 변한 게 없었다. 달라진 것은 여인을 보기 전과 후의 남현의 마음 앞뒤뿐. 지하 0층에 서 있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남현은 안으로 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는 숫자 3이 아닌, 1로 손을 가져갔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 불빛이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다녔다. 남현은 입구 곳곳마다 손전등을 비추어, 불이 놓인 그 자리를 살폈다. 날카로운 감시자의 느낌에 가까웠다. 전등 뒤, 몸을 숨긴 남현의 눈이 틈 없이 착착 돌아가고 있는 그때였다.
‘땡그랑.’
부엌 가까운 곳에서 피어난 금속음이었다. 남현은 켜 놓았던 손전등의 불빛을 꺼뜨렸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소리가 난 곳으로 발걸음을 내려놓았다. 걸음을 옮겨 나가는 그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은수저 하나를 손안에서 빙빙 돌리고 있는 사람. 시안이었다. 남현은 꺼뜨렸던 손전등을 들어 올려 불빛을 쏘며 말했다.
“앞으로 자네더러 숨죽여 있으라는 말은 삼가야겠군.”
“궁으로 들어온 지가 1년은 넘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남현이 시안의 얼굴 옆으로 불빛을 겨누며 시안을 향해 물었다.
“…네. 넘었습니다. 하지만 저택에 저 같은 말단이 다닐 수 있는 곳은 한정돼 있어서요. 주방도 저한테는 그런…, 아, 죄송합니다.”
“그래? 집 안 구석구석에 병 든 노인네들이 아주 틈틈이도 박혀 있나 보군. 이딴 곳에서 부릴 텃세 따위가 뭐가 있다고, 내 참.”
손전등의 따가운 불빛이 시안의 눈동자 속을 헤집고 들어갔다. 어둡다고 느꼈던 눈앞으로 불쑥 밝음이 찾아오자, 시안은 깜짝 놀라 하며 몸을 움찔거렸다.
“이런 상황에 내 앞에서 머리 굴리는 모습 보이는 걸 보아하니, 그런대로 본인의 여유는 스스로 챙길 줄 아는 모양이군.”
시안은 불빛에 눈을 뜨진 못했지만, 두 눈을 꼭 감은 채로 강한 손사래와 함께 대답했다. 문제는 소리의 크기였다.
“아니요!! 절대!”
시안의 얼굴 위로 어리고 있던 둥그런 불빛이 일순간에 사라지자, 주방 주변으로 드문드문 보였던 것들이 다시금 완연한 어둠 속으로 그 종적을 감추었다.
“…흡!”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는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해. 그래도 들은 것이 있어 최대한 좋게 봐주려 노력하는 중인데, 방금 같이 멍청한 짓거리를 벌이는 건 곤란하지. 안 그래?”
커다란 손바닥으로 시안의 얼굴 아래를 움켜잡은 남현이 그녀의 귓속으로 떨리는 목소리를 밀어 넣었다.
“읍!, 읍!!”
“알아들었으면, 소리 내는 걸 그치고 머리를 끄덕거려야지?”
품속에 붙잡아 놓은 시안의 몸부림이 거세지자, 남현이 시안의 턱 위로 얹어 놓은 손에 더한 힘을 기울이며 그녀를 몰아붙였다.
‘탁탁탁탁.’
정확한 횟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다급하고, 난폭한 몸부림이었다. 남현은 그 상태 그대로 몇 초가량의 시간을 더 유지했다. 승자가 정해져 있는 줄다리기였고, 시안은 그곳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뒤흔들었다.
“하아…, 하아….”
풀려난 시안은 그대로 앞으로 걸어 나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허리를 굽혀 숨을 내쉬던 시안은 뒤돌아 남현을 바라보았다.
“…거치십니다.”
그에 남현이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코와 입을 막는다고 해서 고개를 움직이지 못하는 건 아니지. 그저 고개를 끄덕거려 보이라고 하였다만. 듣지 못하였나?”
“들었습니다.”
“영특한 아이라 소개를 받았네만, 기만 드센 아이로 낙인찍히고 싶은 건 아닐 테지.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네.”
“네! 물론입니다. 시키시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뭐든지’라는 말을 너무 가볍게 내뱉는 거 같은데.”
“진심이기 때문입니다.”
‘딸깍.’
손전등의 불빛이 켜지고, 남현은 그 빛의 테두리를 자신과 시안, 둘의 정중앙으로 자리시켰다.
“그럼, 집사는 어떠한가?”
“네?”
“집사도 할 수 있겠나?”
“자넬 괴롭히던 꼰대들을 무찌르기에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을 것 같은데. 왜, 두려운가?”
“아니요, 전혀요.”
시안의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남현은 불빛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만족했다는 목소리로 말을 꺼내었다.
“좋아. 그렇게 나와 주어야지.”
“그런데, 집사 자리에 앉혀 주시더라도 제가 어떻게 일을 꾸려나가야 할지 알지를 못하는데…, 괜찮으실까요?”
“당연히 괜찮지 않지. 내가 오늘 새벽 자넬 가르칠걸세.”
“연 집사님, 아니. 연희 선생님이 하시던 일을 제가 하루아침에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진 않는데요.”
“그래, 맞는 말이야. 현실이 그렇지. 그러나 내 약속하겠네. 자네가 집사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는 순간이 온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그 이유 때문은 아닐 거라고. 무슨 얘기인지 알아듣겠나?”
“…네, 네! 절대 실망을 안겨 드리지 않겠습니다.”
남현은 말없이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을 향해 길을 트고 앞장섰다.
“위로 가는 건가요?”
“아니. 자네와 나는 과거로 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