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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Sep 13. 2024

따뜻한 손길

남현이 떠나고, 버섯에 홀로 남아 있는 시안. 새벽 서리가 녹아 가며 태양의 얼굴이 가지들 사이로 쏟아져 내렸다. 아직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시안. 그 가까이에는 그녀의 터질 듯한 심장 소리가 파도쳤다. 햇빛이 조금씩 그녀의 다리를 비추기 시작했다. 그녀의 굳은 다리가 서서히 녹아 갔다. 시안은 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평소처럼 가벼운 다리는 아니었지만, 시안은 다리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무겁게 변한 다리가 두렵고, 또 무서웠지만, 시안은 황홀감을 느꼈다. 그 감정에 둘러싸인 시안의 첫 마디는 이러했다.


“이런 빌어먹을 노인네. 어른이라는 사람이 혼자 살겠다고 자기 혼자 꽁무니를 빼?”


시안은 곧장 그 길로 노인의 집 앞으로 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


“문 열어! 이 개만도 못한 영감!!”


“당신 도박이 이런 건 줄 알았으면, 난 끼지도 않았어!! 알아?!”


시안은 수십 번 문을 두드렸지만, 집 안에 숨어 버린 노인은 자그마한 기척조차 그녀에게 내어 주지 않았다.


‘쾅!’


시안은 마지막으로 대문을 힘껏 발로 내차고는 걸음을 돌렸다. 시동이 걸려 있는 차와 트렁크 문짝에 꽁꽁 묶여 있는 스쿠터. 그를 본 시안은 그대로 그를 지나쳐, 운전석에 몸을 실으며 말했다.


“자기 물건은 자기가 잘 챙겨야지, 난 몰라. 엿이나 처먹으라고, 망할 노인.”


시안마저 버섯을 떠나고, 버섯에 남아 있는 사람은 이제 노인 한 사람뿐. 작은 새와 벌레들이 험담하듯 소리 내어 노인을 불렀지만, 여전히 노인 집의 대문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다시 궁으로 오르는 굽디 굽은 도로 위. 새벽안개는 물러가고, 홀로이 차를 몰고 있는 시안의 독백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휴, 끔찍한 시간이었어. 이제야 돌아가는구나. 연 집사님에게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아니, 그 전에 내가 떨지 않고 말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일어나서, 씻고,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종을 울리고, 잡년들이 고아라고 놀리는 것을 들어주고…, 다른 날들과 여간 다를 것 없는 아침이었는데, 어디부터인가 꼬이고 말았어. 그래, 맞아. 소리.”


차는 이제 버섯의 알록달록한 길가를 벗어나, 궁의 음습함이 배어 있는 숲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소리에 대해선 물어보지 못했구나. 그것도 중요한 질문 중의 하나였는데. 버섯에서 생긴 소리라는 사실은 이제 부정할 수 없고, 여기는 노인이 했던 말 그대로 숲에 난 외길이니까.”


“킥, 모르겠다.”


시안은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뱉은 뒤, 입을 닫았다. 아무런 생각도 떠올리지 않은 무념의 자세로 핸들을 꺾고, 꺾고, 또 꺾기를 반복. 굵은 가지의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는 도로의 어둠도 지나가고, 궁의 입구가 시안의 눈가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궁의 창살이 열렸다. 그리고 궁 안으로 차를 몰고 들어선 순간, 시안의 평정은 부서졌다. 시안의 심장은 남현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열렸던 궁의 창살이 닫혔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헐벗은 여인이 물을 뿜어 올리고 있는 정원 중심부의 분수대. 분수대를 기준으로 양옆에는 조각상들이 줄지어 궁의 계단까지 이어져 있었다. 동양적인 형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 대부분은 무슨 신화에나 나올 법한 뻔한 자태를 띠고 있었다. 그래도 그중엔 사람들이 애틋하다고 여길 만한 작품 하나 정도는 존재했다. 남녀 한 쌍의 조각상. 명이 다한 듯 팔을 바닥에 힘없이 떨궈 있는 여자를 남자가 자신의 한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양손으로 그녀의 머리와 다리를 떠받치고 있는 형태.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하늘로 쳐들어 눈을 감고 있는 남자의 모습 또한 극한이었다. 아무런 날 구경키엔 슬픈 조각상이었다. 시안은 슬픈 조각상에 할애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주차장으로 내려가야 했다. 시안은 원래 차가 있던 자리, 그 자리 그대로 차를 주차했다. 차량 문을 연 시안은 깊게 심호흡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손을 뻗어, 2층을 눌렀다. 얼룩 하나 없이 맑은 거울이 엘리베이터 세 면을 감싸고 있었다. 시안은 거울로 눈을 가져갔다.


“옷깃, 머리, 눈빛, 좋아. 원래의 모습이야.”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여전히 아래에서는 무엇인지도 모를 소리들이 2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아침만큼 벅적하진 않았다. 시안은 곧장 연희가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 연희의 집무실 앞, 걸음을 멈춘 시안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그냥 떠오르는 대로. 떨지만 말자. 그럴싸하게 꾸며 봐야 오히려 티만 더 날 거야.’


고민은 길어지지 않았다. 시안은 곧바로 문을 두드렸다. 나무 문의 둔탁한 소리가 간결하게 두 번 울렸다. 문을 두드린 시안은 말했다.


“집사님, 시안입니다.”


시안은 한 번 더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아무 소리가 나지 않자, 시안은 작게 중얼거렸다.


“1층에 계시나?”


시안은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쪽으로 터벅터벅 맥없는 걸음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계단. 새벽에 마주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둘 나타났다. 고개는 앞으로, 시선은 아래로. 한 계단, 두 계단…, 시안은 천천히 계단을 내밟았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서 시안이 예상했던 한 사람, 딱 한 사람을 기준으로 욕설들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저년은 꼭 일이 좀 끝났다 싶으면 모습을 비춰. 가증스럽게.”


“점심은 먹었니? 아, 좋은 데서 먹고 왔을 테지, 괜히 물었네.”


“계단 하나 내려오는 데 종일이 걸리겠다. 고얀 년아.”


그리고 그들의 말이 잠잠해질 시간이 된 듯 보이는 때, 시안은 시선을 옆으로 돌려 그곳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혹시 연 집사님 어디 나가셨나요?”


시안의 물음이 그들에게로 건네어지고, 또다시 그들 중 한 명의 입이 열리려는 찰나였다. 군중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냉기의 분위기로 바뀐 순간이기도 했다. 시안은 뒤에 연희가 와 있음을 알아챘다.


“미안하구나.”


하얀 가운을 걸친 연희가 계단 위에 있는 시안의 뒷머리를 어루만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집사님.”


시안은 뒤돌아 연희의 품에 안기며 말했다.


“고생했어. 일단 일 얘기는 접어두자꾸나. 회장님으로부터 차려입고 나오라는 연락이 왔어. 아마 여행 때문이 아닐지 싶다.”


“가족여행이요?”


“그래. 다녀올 동안만 참고 있으렴. 저 벌레들은 내가 나중에 톡톡히 혼쭐내줄게. 약속해.”


미소와 함께 말을 마친 연희는 시안의 머리 위에 얹고 있던 손을 거둬들이며 자신의 집무실로 걸음을 돌렸다. 연희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시안은 가슴이 저려옴을 느꼈다. 그리고 느껴지는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시안은 날아드는 거친 말소리를 품어야 했다.


“냉큼 내려와!!”


연희가 나타나기 전, 그녀에게 말을 내던진 그 한 명이었다. 시안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시안은 그 사람 앞으로 가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뭘 하면 될까요?”


“뭘 하면 될까요? 그걸 말이라고 하니? 우리는 정해진 일을 하는 거지만, 너는 아니잖아. 눈치껏 찾아야지.”


그 한 명이 되지도 않는단 얼굴로 시안을 향해 말을 뱉어냈다.


“죄송합니다, 그럼, 일단은…”


시안은 빠르게 눈을 돌렸다. 그녀에겐 어디에도 일이 쌓여 있는 듯 보였고, 다른 어디에도 일에 매진 중인 사람들, 그것밖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들 중 하나를 고른 시안은 얼른 그 한 명을 보며 설명을 보탰다. 그냥 무시하고서 안으로 뛰어들 수도 있었지만, 그 한 명이 안으로 들어가는 길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에 시안에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설거지할 식기들이 많이 쌓여 있네요. 저걸 하겠습니다.”


그제야 그 한 명은 뚱한 얼굴로 몸을 왼쪽으로 비켜서며 길을 터주었다. 시안은 고개를 까딱한 뒤, 그녀를 지나 오른발부터 안으로 밀어 넣었다. 대부분이 안을 투영하게 볼 수 있는 잔과 접시류였다. 시안은 장갑을 손에 낀 뒤, 너저분히 얽혀 있는 그들 하나하나를 분류하기 시작했다. 잔은 잔대로, 접시는 접시대로, 나이프와 포크는 그들의 위로 포개거나, 안으로 넣거나. 싱크대에 어질러져 있던 설거짓거리들이 시안의 손과 함께 차곡차곡 정리되어 갔다.


“일을 요령 있게 잘하는구나.”


시안은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말이 들려 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안과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시안은 장갑을 벗어 몸을 돌린 뒤, 말을 한 사람으로 보이는 여인을 향해 작게 말했다.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시안이 쭈뼛쭈뼛한 목소리로 말하자, 여인이 말했다.


“이리 참한 처자가 잘못한 게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 다들 그리 닦달일까.”


나이는 연희와 비슷하거나 어려 보였다. 머리에 아직 검은색의 머리가 조금은 남아 있었다. 살이 좀 찐 편에 속했고, 거절을 잘할 것 같이 생긴 얼굴상이었지만, 막상 누군가의 요구를 들으면 무엇이든 해 줄 것 같은 사람, 그런 사람처럼 보였다.


“집사님에게서 말고는 처음 들어 보는 칭찬이에요.”


시안은 그 사람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시안의 눈을 피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 다음, 주변을 살핀 후에 다른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찬찬히 말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집사님은 정말 좋은 분이시지.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란다. 한때는 나도 저들과 같은 부류였으니까.”


“전혀 그렇게 안 보이시는걸요.”


“가면이랄까, 추악한 가면이었지. 이젠 벗을 때도 된 것 같지만. 저들이 머릿수가 많잖니. 좀체 틈이 안 나더구나.”


여인은 여전히 시안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저 사람들에게도 제각각의 사연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중 공통된 영역엔 제가 포함돼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영특하기도 하지. 여태 이런 아이인 줄도 모르고 나는…, 정말 미안하구나. 너무도 늦어 버린 사과야. 받아 주지 않아도 된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 여인의 사과. 그에 시안이 대답하려는 순간, 주방 바깥쪽에서 다시금 사람들이 떠들썩해지려는 기류가 그들 사이로 끼어들어 왔다. 시안은 고개를 꾸벅였고, 몸을 돌려 재빨리 장갑을 착용했다. 그리고 여인은 손에 들고 있던 상자의 매듭을 매만지며 주방을 빠져나갔다. 팽팽히 묶여 있어 풀릴 리가 없는 매듭이었지만, 그녀는 매듭을 매만졌다. 그리고 그 한 명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이게 뭐야?! 야, 이년아! 누가 그걸로 탑을 쌓으랬니? 빨리빨리 해도 모자랄 판에. 아휴, 몹쓸 년.”


시안은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시안은 미온수가 나오게끔 싱크대의 물을 틀었다. 그리고 자신이 분류해 놓은 대로, 식기들 하나씩, 하나씩에 물을 묻혀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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