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남 회장이 아주 좋아하는 유형의 인간상이야. 이건 그냥 내가 말해 주고파서 하는 말이고…”
노인이 세상 곤란하다는 듯이 오른손 전체로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그래, 내가 무엇이냐 하는 게 자네의 물음이었나? 참나. 거기에 들어갈 답변의 가짓수가 몇 가지나 될는지.”
“똑같이 답해 주지. 자네가 했던 것처럼.”
“좋아요.”
시안은 흡족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러니까…, 일단 나의 직책은 액자의 제작 및 분해야. 그리고 지위는, 굳이 따지자면 그것의 관리인 정도겠지. 그리고 중요한 게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인데, 말했다시피 외부인인 자네가 온 덕택에 액자의 제작 공방을 급히 옮긴 실정이야.”
“저기 잠시만…”
“이렇게 다 말할 줄 알았으면 그냥 여기서 제작을 했어도 됐을 텐데, 인력 낭비에 시간 낭비까지 해버린 셈이 돼 버렸어.”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처럼 노인의 말들이 지나갔고, 시안은 노인이 말을 계속할 때마다 몸을 달싹달싹 움직거렸다. 그리고 다시 노인의 입술이 꿈틀대려는 찰나, 시안은 소리쳤다.
“어르신!!!”
노인은 놀란 내색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차분했고, 흔들림도 없었다.
“왜.”
“말씀이 너무 빨라요. 그리고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듣질 못하겠어요. 설명은 해 주셔야죠. 액자가 무엇이며…”
“말이 빨라 듣지 못한 것은 얼마든지 다시 말해 줄 수 있다만, 말의 부연에 있어서는 내 알 바가 아닌데?”
“어르신!”
“일단은 들고 있게. 나는 담배를 챙겨 올 테니. 설명은 없어. 말을 다시 해 주는 것도 한 대의 담배를 다 피우고 난 그다음이야.”
노인은 의자를 뒤로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탁에 남겨진 시안은 깊게 잠긴 얼굴로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뒤쪽으로 지나간 노인에게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일었다. 시안은 조용히 분노했다. 노인의 대답이 계산과 달랐기 때문이 아니었다. 알고자 하는 의욕과 욕망이 도처에서 끓어오르는데, 거기에 걸맞게 내밀 수 있는 확실한 하나가 자신에게 없다는 현실, 거기에서 생긴 분노였다. 시안의 뒤에서 달그락거리던 소리가 멎고, 노인이 자리로 돌아왔다. 한쪽 날갯죽지엔 유리 재떨이, 입에는 막대사탕 굵기의 흰색 담배, 그리고 성냥갑.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그는 불을 붙였다. 길게 뿜어져 나오는 회색빛 연기가 음식들 위로 떨어졌다.
“액자란 건, 말 그대로 액자야. 사람을 담을 수 있는 거대한 액자.”
시안은 끝부분에서 몸을 흠칫거렸다.
“…아아, 알겠어요. 장인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래, 옳지. 그 말 대로야. 지금 내가 한 말은 담아 놓지 말게. 한 귀로 흘려 버려.”
“…왜 저 같은 사람에게 이러한 비밀을 알려 주시는 건가요?”
“담배 피우나?”
노인이 시안의 앞으로 담뱃갑을 내밀며 말했다.
“아니요, 아직.”
시안은 담뱃갑 위에 손을 한 번 올렸다가 내리며 대답했다.
“그럼 나만 한 개비를 더 피우겠네. 대답은 물론 그다음이야.”
성냥이 일순 타올랐고, 노인은 눈을 감고 담배를 빨아들였다. 시안은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노인을 보며 시안은 생각했다. 이것은 인연일까, 아니면 악연일까. 노인은 기다란 담배를 두 모금으로 끝냈다. 입술 근처까지 다가온 담배는 다시 재떨이 위로 떨어졌다.
“너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저요? 저는 어리고, 경험도 적고, 말단에, 하는 일도 서툴기만 한…”
“그것들을 하나로 뭉치면 무슨 단어가 되지?”
“미숙이 아닐까요? 미숙한 사람.”
노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천재가 아닌 이상, 사람이라면 누구나 미숙함을 거쳐 성장하게 되어 있어. 게다가 너는 미숙하지도 않잖아? 오히려 무르익은 사람 쪽에 속하지.”
“제가요? 듣기 싫은 소릴 들으면 고함부터 내지르는 사람이고, 수틀렸다 싶으면 내빼는 게 십상인 사람인데. 저는 아니에요, 어르신. 어르신께서 저를 좋게, 아니, 잘못 보고 계신 거예요.”
멋쩍음으로 시작한 시안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작아졌다.
“자네가 말한 것들을 하나로 뭉치면 만들어지는 단어는 시작일세. 시작 단계라고 말하는 편이 낫겠군. 자네는 이제 막 시작 선상에 발을 내디딘 숙녀일 뿐이지. 미숙한 사람이 아니야.”
말을 마친 노인은 담배 하나를 새로이 베어 물었다.
“사실은 별것도 아니고, 그냥 꾸며 낸 얘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 봤어요. 근데 아니에요. 제게 말씀하신 건 전부 사실이에요. 그렇다면 다른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왜 제게…”
“도박이야.”
울분을 토하듯 말을 뱉는 시안을 향해 노인은 짤막이 답하였다. 그리고 손으로 총구를 만들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네가 나와 식탁에 앉아 러시안룰렛을 돌린 것처럼, 나도 도박 하나를 한 것이지. 그리고, 느꼈다며?”
“도박을 하셨다고요? 뭐에 관한 건데요? 저와 관련 있는 건가요?”
“글쎄. 그거야 차차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일단 나는 통한다는 쪽에 지금 내 모든 걸 건 참이야.”
노인이 한숨 쉬며 말했다. 말을 마친 노인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는 식탁 중앙 자리에 놓여 있던 호박찜에 조심조심 흠집을 내기 시작했다. 호박은 부드럽게 두 조각으로 나뉘어 갈라졌다. 샛노란 빛깔 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먹어. 여기서 직접 기른 호박이야. 아주 달다고.”
그리고 노인은 자신의 앞접시에도 같은 모양의 호박 한 덩이를 내려놓았다. 시안은 군소리 없이 포크를 집어 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다 못해 펄펄 솟아오르는 호박, 시안은 그것을 한입에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패기는 좋다만, 입천장이 남아나지 않을 텐데.”
시안은 입안 가득 담긴 호박을 씹고, 또 씹었다. 가득히 번지는 고통을 느끼고, 또 느끼며, 시안은 호박이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넘어갈 때까지 입을 벌리지 않았다.
“그렇게나 화가 났나?”
노인의 말에 시안은 그제야 입을 벌려 차가운 바람으로 입을 식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좌우로 손을 파닥이며 천천히 말을 뱉어냈다.
“저 화 안 났어요.”
“안 나긴. 내 말의 어느 한 부분에서 화가 돋은 거잖나. 도박이란 단어에서 화가 났나? 나한테도 설명을 들려줘야지. 자네가 말한 것처럼.”
“아니,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에요. 이건 제가 말했던 패기 정도로 봐주세요.”
“거참, 속 한번 이상한 처자로구먼.”
노인은 자기 앞에 덜어 놓은 호박을 포크로 잘게 썰어 입 안에 넣었다. 그리고 입을 우물거리며 시안에게 물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그다음은 어떻게 할 예정인가? 실패했단 보고를 전달하러 궁으로 돌아갈 참이었나?”
“아, 그게…, 저도 사실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지금이 몇 시죠?”
시안은 식기를 내려놓고 시계를 찾아 고개를 움직였다. 서재, 부엌, 통로, 거실, 문이 있는 곳, 천장, 시계는 없었다. 그래, 노인의 집엔 시계가 없었다.
“자네한테 시계가 없다면, 시간을 알 수 없을 걸세. 우리 집에는 시계가 없으니.”
“시계가 없다고요? 왜? 그럼, 시간은 어떻게 확인해요?”
노인은 잠자코 다시 입안으로 호박을 집어넣었다. 본래에 있어야 할 시계 속의 초침처럼 노인은 턱을 묵묵히 움직여 나갔다. 그리고 대답했다.
“나는 뒤쪽에 처져 있는 사람이야. 뒤처진 인생을 보내고 있는 사람에게 시계는 사치에 불과한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더군. 그래서 없애 버렸어.”
노인의 말을 들은 시안은 공감도 하지 않았고, 부정도 하지 않았다. 시안은 딱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저 벙긋거려 보였다. 노인은 특유의 웃음소리를 곁들여 말했다.
“끌끌, 절대로 공감은 해 주지 못하겠다는 얼굴이로군.”
시안은 다시금 시계가 걸려 있을 만한 장소로 시선을 옮겨 가며 말했다.
“네. 맞아요. 사실이 그래요. 그런 자기혐오에까지 빠져 가며 치워야 할 만큼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나 싶은 생각도 들고요.”
“시계가 그리운가 보군. 차 안에는 시계가 있을 거 아닌가, 우선은 먹지. 먹으면서 거기 달린 잔머리를 열심히 굴려 보라고.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나도 함께 생각해 줄 터이니.”
노인의 말을 들은 시안은 내려놓았던 식기를 말없이 집어 들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친 뒤.
“생각해 봤는데, 궁으로 돌아가지 말고 그냥 여기에 눌러 살까 봐요. 조용하고, 깨끗하고, 분위기까지 청초하니. 완전 저랑 안성맞춤인 것 같아요.”
문을 열고 나온 시안은 양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이 나이 먹고 미성년자 납치범으로 쇠고랑 차고 싶지는 않아. 어서 차에 시동이나 걸어. 가는 김에 내 애마도 좀 내려 주고.”
노인이 문을 닫으며 뭉그적뭉그적 집에서 발걸음을 끄집고 나와서는 시안을 향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식사 후에 노곤함이라도 찾아온 듯, 그의 똑똑하던 발음이 온데간데없이 뭉개져 있었다. 차의 시동을 걸고 시안은 차에서 나와, 노인이 사정사정하던 애마, 낡디낡은 스쿠터에 감아 놓은 줄을 풀기 시작했다. 날이 추웠다. 줄이 새벽 서리와 엉기어 단단히 얼어붙어 있었다. 시안의 입에서 나오는 입김의 양도 슬슬 줄어들고, 양손도 뻣뻣이 얼어갈 때쯤, 그녀의 뒤에서 분명하고도 쩌렁쩌렁한 목소리 하나가 울려 나갔다.
“오셨습니까!!!”
시안은 굳은 얼굴로 노인의 말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몸이 움직여지지 않음을 느꼈다. 얼어 버린 시안의 머릿속으로 무수히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시안의 양손과 양다리가 심한 떨림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밝은 조명을 비추며 숲으로 들어오는 차 한 대. 시안이 쫓고 있던 벚꽃, 벚꽃색의 차, 노인은 버섯 안으로 들어온 차를 향해 양손을 크게 움직이며 길을 인도했다. 노인의 팔이 내려가고, 벚꽃은 버섯에 진입해 자리를 잡고 멈춰 섰다. 그리고 운전석의 문이 열렸다. 순수 동양인의 모습이라곤 보기 힘든, 유난히도 어두운 피부색과 두꺼운 통의 몸집을 가지고 있는 사내였다. 사내는 그대로 뒤쪽으로 걸음을 옮겨 뒷문을 열었다. 얌전히 서 있던 노인은 단박에 그곳으로 소리를 내지르며 뜀박질했다.
“회장님!!!”
“물건은?”
뒷좌석에서 발을 내밂과 동시에 노인을 향해 말을 던진 남자는 앞서 운전석에서 나온 사내와 풍채가 비슷했다. 그를 표현하자면, 한마디로 해 놓을 수 있는 건 다 해 놓은 차림새였다. 양복, 구두, 코트, 가방, 그리고 조금 과한 듯 보이는 장우산에 이르기까지. 구색 갖추기에 열렬한 사람의 전형적인 외관이었다.
“예, 저기 있습니다.”
노인이 바이크 앞에 서 있는 시안을 양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시안은 아직도 그 자리에서 몸을 떨고 있었다. 시안의 떨림은 멀리 떨어져 있는 세 사람의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시안은 스스로 뒷걸음질 치고 있다 생각했지만, 그녀의 다리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저 아이인가? 일단 한번 보지,”
그리고 남자는 노인의 등을 두 번 툭툭 두드렸다.
“저 아이에겐 회장님의 등장이 사형대처럼 느껴질 테니까요. 말을 조금 섞어 보시면, 보다 확실한 느낌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것 하나만큼은 제가 장담하겠습니다.”
회장. 그래, 남현이었다. 노인은 남현과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아래를 보며 말을 내뱉는 노인 역시 시안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남현은 말없이 턱을 앞으로 들어 올렸다. 노인은 땅에서 땅으로 고개를 숙이며 걸음을 앞으로 내렸다. 장정 하나에 중년 하나, 그리고 노인.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세 사람에 시안은 손에 쥐고 있던 끈을 땅 위로 팽개치듯 떨어뜨렸다. 그리고 시안은 그 자리 그곳에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 아닌, 본능이었다.
“예의가 바르군.”
시안을 본 남현이 말했다. 그리고 남현이 무릎 꿇은 시안의 얼굴 근처로 입술을 바짝 갖다 대며 말했다.
“…내 한 번만 말할 테니, 귀 기울여 잘 들어요. 젊은 아가씨.”
남현의 목소리는 거칠게 세공시켜 놓은 강철 같았다. 귓가에 들리는 남현의 목소리에 시안은 이미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시안은 살고 싶었다. 한 번이라는 남현의 말이 자신의 목숨줄처럼 느껴졌다.
“나를 뒤쫓으라고 지시를 내린 사람이 누구예요?”
남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안은 연희가 떠올랐다. 연희의 얼굴을 떠올린 시안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돌조각을 본능적으로 피한 것처럼, 시안은 연희의 이름을 숨겼다.
“저는 그저 심부름 중일 뿐이었습니다.”
시안의 말을 들은 남현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뒤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뒤에 단단한 바윗덩어리처럼 자리를 지키고 서 있던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공덕아.”
“예, 회장님.”
공덕은 서 있는 자리에서 앞으로 한 발짝 내밟으며 대답했다. 공덕의 목소리는 그의 덩치만큼이나 우람했고, 또 묵직했다. 특히, 공덕이 남현을 상대로 문을 활짝 열어 놓은 듯 내미는 말투는 그가 어떤 마음가짐으로써 남현의 아래에서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었다.
“저택 소유의 차가 아니라고?”
“예, 그리하여 일단은 믿음직한 곳에…”
“믿을 수 있는 곳은 다 좋은데 항상 굼뜨단 말이야. 네가 직접 나서는 편이 더 빨랐겠어.”
남현이 공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진척 상황을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둘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듣고 있던 시안의 얼굴로 점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 갔다. 드리운 그늘 속에서 시안은 생각했다.
‘차량 번호 얘기겠지? 명의, 명의가 연 집사님 앞으로 되어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지금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 거지?’
시안은 머리를 계속 굴리며 얼굴 전체가 어두워지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 보려 애를 써 봤지만, 지금의 그녀에게 그것은 역부족이었다. 떠올린 모두가 낙담에 가까운 꾀였고, 목숨을 구제할 쥐구멍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침착하자. 연 집사님께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나를 내보내진 않으셨을 거야. 침착하자, 침착하자.’
시안은 계속 되뇄다. 그리고 그때, 공덕이 자리를 옮겼다. 공덕은 버섯의 커다란 나무 아래로 들어갔다. 대치 중인 시안과 남현이 있는 곳으로부터 꽤 멀리 떨어진 장소였다. 공덕은 재킷에 손을 넣어 전화를 꺼내 들었다. 그의 두껍고 커다란 손과 맞물린 전화는 꼭 유아들을 위한 방범용만큼이나 그 크기가 작아 보였다. 시안은 공덕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공덕은 낼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전화 너머의 상대를 향해 말을 뱉어냈다. 남현은 뒷짐을 진 상태로 시안의 앞에 서 있었는데, 그 구도는 묘하게 전화를 귀에 붙이고 있는 공덕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시안, 둘 사이로 긴밀한 마주함을 조성해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거짓말처럼 전화 너머의 소리를 듣고 있던 공덕의 고개가 시안이 있는 곳으로 틀어져 움직이며 두 사람의 눈이 맞닿았다.
‘…왜. 무슨 말을 들었길래 나를 쳐다보지. 왜 나를 보는 거야.’
예고 없이 날아든 공덕의 눈에 시안은 뛰는 가슴으로 생각을 부풀렸다. 공덕의 눈은 금방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다시 전화 너머의 상대와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무슨 연유인지 공덕은 급히 말을 줄이며 통화를 끝냈다. 공덕의 통화가 끝나고, 그가 나무의 그늘에서 빠져나오자, 제일 먼저 입을 열어 보인 사람은 남현이었다.
“그래, 독촉하니 답이 나오더냐?”
물음에 대답해야 할 공덕은 조용했다. 공덕의 입술은 딸려 내려간 그의 눈꼬리처럼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공덕아.”
“공덕아.”
“…”
공덕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도를 보아하니, 무언갈 듣긴 들은 모양이구나. 대체 누구 이름이 나왔길래 네가 말을 못 하는 거냐.”
공덕의 침묵이 길어졌다. 시안의 눈엔 공덕이 자신의 혀를 짓뭉개 가며 만들고 있는 틈으로 보였다. 좀 전에 마주친 시선이 계기였다. 계획에 없던 시간을 움켜잡았다고 시안은 생각했다. 시안은 공덕이 자신에게 보냈던 ‘눈빛’과 작금의 ‘틈’이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가정서부터 생각을 시작했다.
‘말을 못 하는 게 아닌 거야. 말을 하지 않는 거야.’
‘아까 내 얼굴을 본 후로 저러고 있는 게 맞는 것 같지.’
‘…만약, 만약 내가 맞고, 정말로 그러한 것이라면, 저 사람은 지금 내게 기회를 주고 있는 게 돼. 자수의 기회. 그 마지막 기회를.’
시안은 거기서 더 생각을 뻗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마음가짐이 시안을 향해 내린 명령은 다시 없을 그 기회를 당장에 붙잡으라는 것이었다. 시안은 눈 깜짝할 새 튀어 올라 허공을 손으로 휘저었다.
“잠깐! 잠깐만요!!”
무릎을 꿇은 채 허리를 숙이고 있던 시안의 몸이 한순간에 높게 뛰어, 둘 사이를 정확히 파고 들어갔다. 그녀의 그 행동은 공덕과 남현 사이로 흐르던 묘한 공기를 갈기갈기 흩쳐 놓았고, 남현의 주의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여태껏 입을 다물고 있던 노인은 불안한 눈빛으로 그러한 시안의 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이년이 정신이 나갔나. 더러운 몸뚱어리로 어딜 들붙고 지랄이야, 지랄이.”
남현의 딱딱한 구두창과 거친 언성이 시안의 얼굴을 향해 갔다. 시안의 얼굴이 그의 발에 차이려는 순간, 공덕이 남현을 빠르게 끌어안으며 통화할 때와 같은 크기의 목소리로 말했다.
“자중하시길.”
“놓지.”
“화가 풀리시면, 그때 놓겠습니다.”
“공덕아, 내가 세상에서 이것 하나만큼은 정말 참을 수 없겠다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게 뭘까?”
“더러운 것입니다.”
남현의 물음에 공덕은 시안의 눈을 피하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래! 난 더러운 걸 정말 싫어해! 정확히는 더러운 게 내 몸에 묻는 것이고. 자, 그럼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나를 붙든 지금 너의 행동을 나는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공덕의 말을 들은 남현이 시안을 향해 맨 처음 드러냈던 목소리를 등 뒤에 서 있는 그의 귓가로 고스란히 욱여넣었다. 그러자 공덕 역시 물러날 마음이 없다는 듯 성대에 힘을 꽉 주어서는 그를 받아쳤다.
“이런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회장님 발에 더러움을 묻히지 마십시오.”
그 말을 들은 남현은 제자리에서 기가 찬다는 듯한 얼굴을 잠깐 내비치고서는 이내 긴 한숨을 내뿜음과 동시에 다리를 내려놓았다.
“참나, 누가 상전인지.”
그리고 둘을 보고 있던 시안은 다시금 목소리를 그 사이로 집어넣었다.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회장님. 전 이만 안으로 들어가 제 할 일을 하겠습니다.”
노인이 시안의 그 말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말문을 열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말을 마친 노인은 남현이 답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발길을 돌려 내달리기 시작했다. 세 사람의 눈이 동시에 노인을 향했지만, 그는 한 번을 뒤돌아보지 않았다.
“회장님.”
또다시 시안의 목소리.
“뭐? 너는 뭔데 또 갑자기 날 회장이라고 불러?”
한계 이상으로 달궈져 있던 정신이 느슨해진 탓일까. 시안은 눈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금세 어깨를 들썩거리며 눈물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자신의 발아래서 눈물을 보이기 시작한 어린 여인, 시안의 그 같은 모습에 잔뜩 인상을 구기고 있던 남현은 기가 찬다는 얼굴을 지어 보였지만, 이내 말없이 허리를 굽혔다. 그렇게 또 한 번 남현의 거친 목소리가 시안의 귓속으로 가시처럼 뻗쳐 나갔다.
“말을 해. 그게 너한테도 남는 일이야. 신체발부 수지부모라는 말도 있어. 너, 그 나이부터 병신으로 살 자신 있어? 없잖아.”
남현의 그 말 한마디에 시안은 입에 고인 침을 삼켰다.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묵직했다. 그리고 하나로 붙은 듯 보였던 시안의 입술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그러니까…, 연 집사님부터입니다.”
3초였다. 시안의 말을 들은 남현의 얼굴이 무너지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시안의 얼굴 가까이에 입을 대고 있던 남현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그녀에게서 물러나며 급히 말을 토해냈다.
“지금 네년 입에서 나온 사람의 이름이 연희는 아니겠지?”
남현의 두 눈은 이미 붉게 뒤덮여 있었다. 시안의 눈과는 다른 감정으로 인해 붉게 물든 눈. 그를 본 시안은 다시 머릿속이 아득해져 쉬이 다음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핏대를 잔뜩 부풀려 올린 남현의 고함이 버섯 전체에 퍼져 나갔다.
“연희? 그년이라고?”
소리친 남현은 공덕의 멱살을 잡았다가, 땅을 발로 걷어찼다가, 머리를 쥐어뜯었다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변명일 뿐이겠지만, 달리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빠져나간다는 생각은 당연히 하지도 못하였고요. 회장님이 지금 당장 저를 어떻게 하신다고 하여도 저에겐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남현이 혈안 된 얼굴 그대로 시안을 꼬나보며 말했다.
“네?”
“나한테 붙어 다니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됐겠군. 아니지, 봤다 표현하는 것이 맞을까? 봤다고 하는 게 맞겠지?”
“아뇨! 전혀요!! 전 아무것도 본 게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봤다 한들, 머리가 좋지 못해 무슨 상황인지 감히 가늠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 아시겠지만, 이 일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동안 회장님 뒤를 쫓아다니면서 제가 느낀 것은…”
시안은 침착히 뱉어내던 말을 멈추고서 남현과 눈을 맞췄다. 눈알이 떨리는 것은 숨길 수 없었지만, 시안은 피하지 않았다.
“연 집사에게 무슨 사연이 있길래 제게 이런 일을 사주하였나에 대한 의문, 그것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