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약속 장소는 여기예요?”
차에서 내린 기성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가현에게 물었다.
“네. 경관이 좋은 곳이죠? 속이 뻥 뚫릴 만큼.”
가현이 기지개를 켜며 기성의 물음에 답했다. 그리고선 길게 숨을 들이쉬고, 또 내쉬기를 반복했다. 꼭 속에 차 있는 공기를 갈아치우기라도 하고픈 사람처럼.
“가이드 은평 씨의 집은 제가 어떻게 따라갔다 쳐도, 여기는 괜찮은 게 맞아요? …암만 봐도, 보통 사람이 사는 곳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럼요. 오히려 그 반대예요. 그 사람이 있는 곳은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찾아간 곳이고, 여기는 주인이 누군지를 알고 찾아온 곳이니까.”
기성은 겉으로는 표시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누가 거주하는 곳이에요?”
“그냥, 복덕방 하시는 분 집이에요.”
그리고 가현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멀뚱히 서 있는 기성이 계속 말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손목시계가 뻔히 있는 팔목의 소매를 걷어 올리며 가현이 물었다.
“몇 시죠, 지금이? 아직 1시 안 됐죠?”
“지금이…, 43분이에요. 12시.”
기성이 주섬주섬 전화를 꺼내 시간을 보고는 가현에게 말했다.
“아직 시간이 남네요. 여기 사는 사람은 정시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 시간에 맞게 정확히 들어가야지만 우리를 반갑게 맞아줄 거예요.”
“일찍 오는 것도 안 돼요?”
기성의 말에 가현이 혀를 입 밖으로 살짝 내밀며 말했다.
“아니요. 안 된다기보다는…, 뭐, 그렇다는 거예요.”
“세상 참 좁고도 넓다지만, 별난 사람 다 있네요. 당장에 오늘만 해도 몇 명을 보는 건지, 참.”
그 말을 들은 가현은 소리 없이 캑캑거렸다. 그리고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아, 열차까지 오는 길에 여럿 만났나 보죠? 그 뒤로는 저랑 계속 붙어 다녔으니까. 해 봐야, 은평 씨 정도겠고.”
그 말에 기성은 호탕한 웃음과 함께 손짓을 곁들여 가현을 향해 말했다.
“푸하하하, 아니, 거기 그쪽은 왜 빼는 건데요. 그럼, 반대로 그런 말을 하는 너는 정상이냐? 아니죠. 나도 미쳤어.”
가현과 기성은 그렇게 1시 정각이 될 때까지 서로 웃고 떠들었다. 그 집에 들어선 이후부터 딱딱한 땅은 없었다. 미대를 나온 정원사가 다듬은 듯한 각양각색의 나무들이 정원에 가득했다. 어미를 쪼르르 뒤따르는 작은 새끼 새도 있었고, 어딘가를 향해 오르고 있는 듯 보이는 달팽이 한 마리도 있었다. 거기 있는 존재의 대부분이 그랬다. 자유분방하지만, 다들 무언가 한 가지씩은 하는 중이었고, 기운 없어 보이는 무지한 것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59분이네요. 들어갑시다.”
정원 구경에 푹 빠진 기성을 향해 가현이 말했다. 기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성의 한숨에 가현이 피식 웃으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집의 대문은 총 열 짝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두 짝에 하나씩 문의 잠금 고리가 채워져 있었으며, 그곳이 집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출입구인 듯했다. 어딘가 그들을 아우르는 총괄 출입구 하나가 있을 법도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딩동.’
가현이 벨을 눌렀다. 생기 있는 정원만큼이나 청음하고 듣기 좋은 소리였다. 그리고 발소리는 금방에 안쪽서부터 새어 나왔다.
“어르신, 저예요. 가현이에요.”
발소리를 들은 가현이 문에 입을 가까이 가져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사이에 있는 문이 열렸다.
“안녕. 가현이 왔구나. 이게 얼마 만이니.”
“못 본 새 어째 더 말랐구나. 끼니는 거르고 술병만 손에 드니 그런 거야. 밥을 사랑해야지.”
나이는 70, 아니면 조금 더. 단아한 한복차림에 은색 비녀로 땋아 놓은 머리는 그녀의 여물어 있는 인간상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그녀의 인상이었다. 강인함 속에 서려 있는 굉장히 선한 인상.
“일단 들어가자꾸나. 날이 추우니.”
노파가 가현의 목을 팔로 감싸며 안으로 그녀를 데리고 들어갔다. 남겨진 기성은 또다시 조심스레 가현을 따라 발걸음을 안으로 내려놓았다.
“문고리 단단히 걸어 잠그고 들어와요, 총각.”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노파가 기성에게 말했다.
“실례하겠습니다.”
기성은 노파의 등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그리곤 문을 잠갔다.
“…저 뒤에 함께 온 남자는 누구야? 척 봐도 너보단 어려 보이는데? 연하를 낚아챈 게냐?”
가현의 목을 감싸고 있던 노파가 말했다. 그 소리가 한마디씩 가현의 귓가를 파고들 때마다, 그녀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어때 보여요? 열차에서 발견한 사람인데.”
가현이 노파를 따라 나지막이 속삭였다. 노파가 빙글 뒤돌아, 기성의 위아래를 게슴츠레 훑어봤다.
“얼굴이 뽀얀 것이 꼭 백설기같이 생겼어. 오늘 할 얘기보다도 저 사람과의 진척 상황이 더 궁금해지는데, 이거 어쩌지?”
“진척은 무슨, 아무것도 없어요. 목이나 좀 놓아주세요.”
“흥.”
목에 팔을 두른 채로 어느덧 그 두 사람은 집의 중앙까지 다다라 있었다. 그들 뒤로 다섯 걸음 정도 떨어져서는, 고양이 같은 걸음으로 발을 옮기고 있는 사람 하나를 포함하면 셋.
“밥은 먹고 왔니?”
노파가 팔을 풀며 가현에게 물었다.
“네, 그 사람 집에서요. 스스로를 미식가라 칭하는 것치고는 저렴한 음식들이었지만.”
“그럼 마실 걸 내어 오마.”
“저는 따뜻한 홍차 한 잔 주세요.”
가현의 선택을 들은 노파의 시선은 이제 기성을 향해 갔다.
“…아! 그럼, 저도 같은 걸로 부탁드리겠습니다.”
기성답지 않게, 아니, 그 다운, 태도와 목소리였다. 긴장과 불안. 그 둘이 한데로 응축된 목소리. 머리로는 부드러운 문장들이 쉽사리 둥지를 틀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내리는 것은 딱딱하게 굳어 응어리진 말들. 그 모습을 본 노파는 별꼴이란 듯 헛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들으라는 듯이 말을 뱉어냈다.
“누가 혼이라도 낸다나. 제 혼자 경직되어서는, 쯧쯧.”
그리고 노파는 앞에 있는 가현을 향해 양팔을 휘저으며 뒤를 덧붙였다.
“쫀득한 백설기인 줄 알았더니만, 허여멀건 얼간이 같은데?”
노파의 말에 가현은 부정하지 않았다. 가현은 수긍한다는 듯 씁쓸히 입맛을 다셨고, 작게 고개도 끄덕거렸다.
“차를 우리는 데 시간이 걸릴 터이니, 가져온 짐도 좀 풀고, 난로 앞에서 몸도 녹이면서 편히들 쉬고 있으라고.”
노파는 가현의 머리를 한 번 부드러이 쓰다듬고는 그녀에게 가 보라는 손짓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휴-”
노파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들린 소리였다.
“연장자 앞이라서 그러는 거예요? 낯가림 중이라서 그러는 거예요?”
“둘 다죠, 뭐. 무슨 장인처럼 딱, 품위 있게 차려입고 맞아 주는 사람이 눈앞에 놓이면, 어느 누가 편하게 자리할 수 있겠어요?”
기성의 말에 가현이 골똘히 생각하는 것처럼 눈을 올렸다가, 다시금 눈을 아래로 내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눈치 보는 사람들의 심리가 도무지 이해가 안 돼요. 그냥 똑같이 사람 대하는 행위일 뿐인데.”
“그건 그쪽이 위에서 나고, 또 자랐기 때문이에요. 반대인 사람 입장도 생각해 줘야죠.”
“정 없게도 말한다.”
“사실이니까.”
그리고 기성은 가현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는 평균보다 훨씬 아래에서 나고, 또 자란 사람이라, 눈치를 많이 보며 살아야 했어요. 그래서 그쪽 사람 특유의 눈빛을 알죠. 근데 그쪽한텐 그런 눈빛이 없어요. 그쪽은 상대방과 대화를 나눌 때 ‘같은 선상에 서 있구나.’라는 느낌을 느끼게끔 해 주거든요.”
“나를 굉장히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군요.”
“선한 사람 같아요.”
가현은 기성의 손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그리고 기성의 입에 자신의 입을 포갰다.
“손만 잡으면 키스하네요. 아주 버릇 들겠어요.”
기성은 먼저 입술을 떼어 내며 말했다.
“손잡으면 도망 못 치잖아요.”
가현이 말했다.
“도망을 치다뇨. 이렇게 행복한데. 근데 도망치는 상황이 올 수는 있겠네요.”
“왜요?”
“그쪽 집안이 저를 받아들일 리 없으니까.”
기성의 말에 가현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뭐 어때요? 그때도 같이 손잡고 도망치면 될 뿐인데.”
그리고 노파의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들고 있었지만, 결코 그 크기가 쉬운 편은 아니었다. 큼지막한 잔 세 개와 다과 하나가 올려져 있는 자그마한 종지 세 개. 하나의 쟁반에 노파는 그 모두를 욱여넣고 둘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지랄한다, 지랄해.”
가현이 노파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가현은 노파를 향해 쪼르르 달려가, 그녀 손에 들린 쟁반을 맞들었다.
“솔직히 말해, 내가 오길 바라고 일부러 이런 거지?”
가현이 쟁반 옆, 노파의 얼굴을 깨물 듯 입을 내밀며 말했다.
“내가 넌 줄 아니. 손님맞이가 오랜만이라 그런 것뿐이야.”
“거짓말.”
식탁이 가까워지자, 가현은 슬쩍 노파의 손을 떼어 내며 홀로 쟁반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가현은 기성의 가슴 앞으로 쟁반을 내려놓았다. 원탁 위로 내려진 쟁반의 소리가 그 위에 담긴 것들의 무게를 자리에 앉아 있는 기성을 향해 알려 주었다.
“이 눈치라곤 일도 없는 사람 같으니라고.”
가현이 내려놓은 쟁반에서 손을 떼며 기성에게 말했다.
“애먼 데 화풀이하지 말고 그만 앉으렴. 이곳이 처음인 사람이잖니.”
“그래서, 우리 찹쌀떡 총각은 누구이신가? 아니 그전에, 총각님은 옆에 있는 이 처자에 대해 좀 알아요?”
노파가 쟁반에 얹힌 잔 하나를 기성의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네.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믿지 못했었는데, 얼마간 시간을 같이 지내고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더라고요. 높은 집안의 자제라는 이야기가 거짓으로 꾸며 낸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기성은 가현을 바라보며 하던 말을 끝맺었다.
“신기함에 취해 있는 중입니다.”
“취해요? 호호, 그거 아주 재밌는 표현이군요.”
기성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아! 저는 여행객입니다. 이 사람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열차에 올라탄, 그리고 평범한 집안의 평범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평범한 집안의 평범한 사람이라…, 그것참 부럽네요.”
“설마요. 저는 이런 저택에서 하룻밤만이라도 지내는 것이 백일몽일 정도로 낮은 위치에서 사는 사람인걸요.”
그에 귀 기울여 가만히 듣고 있던 노파는 기성이 말을 끝내자, 딱 한 마디의 말을 식탁 위로 내려놓았다.
“나는 자식을 팔았어요.”
가현이 차를 마시는 소리가 마른 침묵 위로 단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녀의 차 마시는 소리 빼고는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실. 상냥한 노파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더한 말로 상대를 억눌러 승리를 쟁취해 냈다는 기쁨과 흥분, 그러한 것에서 온 감정이 아니었다. 자잘한 상처 따위가 건들려 전해져 오는 통증 같은 것이 아니었다. 감히 손댈 엄두조차 나지 않는 흉터 자국. 노파의 얼굴에 올라와 있는 열은 그러한 것이었다.
“자기가 말해 놓고 자기가 심각하네.”
가현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기성은 이제 그녀의 태도에서 대강 감이 느껴졌다. 그녀가 왜 이곳에 온 건지, 조금의 거리낌도 없어 보이는 두 사람 사이로 묘하게 잡혀 있던 어색한 기류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물론, 구체적인 짐작은 아니었다. 운 좋게 방향이 맞았을 뿐. 그리고 기성은 자기로 인해 생긴 듯한 작금의 침묵을 깨고 싶었다. 기성은 노파와 가현, 둘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방인은 저 하나였죠. 두 사람은 사이가 막역해 보이는데, 어떻게 알고 지내게 된 거예요?”
“아, 그거는 이야기가 되게 길어요. 오늘 하루로는 부족할걸.”
가현이 기성을 향해 몸을 돌리며 어렵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분위기를 이렇게 만든 내가 하는 편이 맞는 듯 보이는군요.”
노파가 말문을 열었다. 아직도 끓어오른 열을 가라앉히지 못한 그녀였지만, 그러함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둘의 목소리보다 훨씬 곱고, 또 단정했다. 상기된 호흡에 묘한 자성이 들어 있달까. 기성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몸을 편하게 늘어뜨려 있던 가현도 기성을 따라 움직였다.
“나한테는 외아들이 있었어요. 운동선수였던 제 아비를 빼닮아 덩치가 아주 좋았는데, 저는 그것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죠.”
노파가 말을 시작하자, 가현은 찻잔에 입술을 담갔고, 기성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그런데, 그 특출남이 우리 가족을 갈라놓게 만들 줄은 그때는 몰랐던 거예요. …마냥,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시장에 장을 보러 나간 날이었어요.”
쓸쓸히 말을 내뱉는 노파의 말 다음으로 가현이 말을 얹었다.
“그런데, 우리를 만나고 만 거야, 재수가 없게도.”
“우리?”
“나, 그리고 나의 아버지.”
가현이 말을 계속해 이어 가려 하자, 노파는 가현의 앞으로 손을 펼쳐 내밀었다. 마음을 굳게 먹은 듯이. 그리고 노파는 끊겼던 이야기를 다시 이어나갔다.
“네. 나와 그 사람은 우연히 눈이 마주쳤어요. 그는 창문을 내린 채 우리 둘 옆을 지나가고 있었거든요. 무척이나 내 아들을 뚫어지게 바라봤어요. 남녀가 첫눈에 사랑에 빠진 것처럼. 그도 그랬었나 봐요. 단지, 그게 사랑이 아닌 소유욕이었을 뿐.”
“그래서요?”
기성은 물었다.
“남편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남겨진 나와 우리 아들은 쓰레기 더미 같은 집에서 생을 이어 가고 있었어요. 이런 환경들은 본디 내 것이 아니었죠.”
노파는 차를 들어 입술을 적셨다.
“자식을 파셨다는 말씀은 그럼…”
“맞아요. 나는 내 아들을 그 자리에서 팔아넘겼어요. 그 대가로 이런 막대한 부를 누릴 자격을 얻게 된 것이고요.”
노파의 얼굴은 변함없이 태연했고, 옆의 가현은 여전히 차를 홀짝이고 있었지만, 기성은 한없이 초조했다. 이야기의 변두리에조차 닿아 있지 않은 자신이 이런 이야기들을 들어도 되는 건지. 그리고, 이방인인 자신을 향해 왜 이런 얘기들을 서슴없이 들려주는 건지. 곤두선 신경 사이에서 길을 잃고 두려움의 늪에 빠지려는 그때, 옆에 있던 가현이 무념한 말투로 말을 꺼냈다.
“근데 말이 팔았다, 넘겼다지, 실제로 이분 아들을 호적 위로 올린 건 아니에요. 직역하자면, 그냥 개 한 마리를 분양한 거죠.”
직설적이고, 무례한 말임이 분명했지만, 노파는 화를 내지 않았다.
“아들분은 한 번씩 찾아오나요? 그래도 어머니인데.”
“아니요, 그때가 마지막이었어요.”
“내 아버지가 조건을 달았어.”
가현의 말에 기성은 물었다.
“…조건이라면, 어떤?”
“뭐긴 뭐야, 얼굴 보기를 포기하라는 것이지. 말 그대로 내 아버지가 이분 아들을 전유물 삼았다, 그 뜻이라고.”
“전유물이요?”
그에 가현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절대로 안 될 얘기지. 우리 아빠, 더럽기로 소문 난 완벽주의자거든. 자기 물건은 자신만이 탐닉하기를 원해. 고로 남의 손이 닿는 건 용납을 못 하셔.”
“전화쯤은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아무리 팔려 갔다고 해도! 정말이지, 너무한! …너무한 처사잖아요.”
기성은 마치 자기의 일인 양, 몸을 원탁 중앙으로 끌고 나와서는 울컥한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내가 한 계약이에요. 내가 저지른 잘못이고. 그 당시의 나는 행복감을 느끼기까지 했으니, 내겐 그럴 권리가 없죠. 그저 자기 자식을 팔아넘긴 어미라는 사실만을 깨치고 있으면 돼요, 나는.”
“그럼, 그쪽은 괜찮은 거예요? 이곳을 이렇게 왕래하는 거.”
기성은 가현을 보며 말했다.
“나? 나야 상관없죠. 엄밀히 말하면, 내가 계약한 것도 아니고. 난 그저 구매자의 자식일 뿐인걸요. 그래도 공식적으로 일정을 잡지는 않죠. 그냥 어쩌다 이렇게 한 번씩 방문하곤 하는 거지.”
“오지 않아도 되는 곳에 들러 준다는 자체만으로도 나는 항상 감사함을 느낀답니다.”
노파는 기성을 보며 말을 한 뒤, 입술을 앙다문 채로 가현의 얼굴을 바라봤다.
“뭘 또. 그리고 오늘은 아들 소식 전하러 온 것도 아니구먼.”
“그렇지. 그럼 이 얘기는 여기서 그만하자꾸나.”
그리고 노파가 말했다.
“미안해요, 총각. 내가 이런 분위기를 만들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아니요.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괜찮아요.”
기성의 사과에 노파는 유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소나기처럼 갑작스럽게 흘러간 이야기가 끝이 나고, 세 사람은 다시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새로운 주제는 가현을 필두로 시작되었다.
“그나저나, 정말 고마워. 거기 위치는 어떻게 알아낸 거야? 연희도 아빠 편에 서 있는 건지 나한텐 코빼기도 보여 주지 않았는데.”
“내 정보망을 무시하지 말렴. 그리고 원래 안에서 숨기고 있는 일은 바깥에 있는 사람의 눈으로 찾기가 더 쉬운 법이란다.”
노파는 가현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별일은 없어 보인다만, 어떤 이더냐? 끝끝내 찾지 못한 정보 하나에 어찌나 걱정이 뒤따르던지.”
“어떤 사람이었더라…, 말이 안 떠오르네. 대신 좀 말해 줄래요?”
가현이 옆에 있는 기성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그 사람요? 어디 보자…, 일단은 그거 다 제쳐두고 건물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 외관이 상당히 지저분했어요. 새로이 짓고 있는 건물인지, 다른 건물을 짓기 위해 허물고 있는 건물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요.”
기성은 사람에 대한 것보다, 그 사람을 향해 가는 과정에 관한 묘사를 중점으로 말을 시작했다. 그리고 기성은 이어 말했다.
“6층 건물이었고, 엘리베이터가 없었어요.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밖에 없었는데, 내부 역시 먼지와 더러움으로 가득했죠. 아! 그리고 5층. 별다를 일 없이 계단을 오르던 도중, 저희는 5층에 잠시 발을 묶여야 했었습니다. 멈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키가 상당한 남자 때문이었습니다. 그 남자는 저희에게 노인의 지시로 온 거냐는 물음을 건넸어요. 그리고, 또 달리 특이한 건 액자였는데…”
그때 말을 듣고 있던 가현이 흥분된 목소리로 설명 중인 기성을 밀쳐 내고 자신의 목소리를 밀어 넣었다.
“맞아! 액자! 액자가 진짜. 5층에서 본 그 사람, 키가 대문짝만했거든? 그 사람만 했어, 액자가. 그래서 물어봤지, 어느 전시회에 걸릴 액자냐. 근데 그 사람 말이 전시에 쓰일 용도가 아니랬어.”
“다른 사람과 마주쳤다니 꺼림칙하구나. 그 사내가 너를 알아보는 눈치였니?”
노파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처음엔 못 알아봤어. 내가 말을 하니까 곧바로 알긴 하더라.”
기성의 한숨 소리에 가현이 눈치를 보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단번에 알아봤어요. 마치 잘 알고 있는 사람을 봤다는 듯이. 그리곤 곧바로 깍듯한 태도를 보이더군요.”
“그럼 더더욱 좋지 않은데…, 나는 6층에 있는 그 사람의 신상을 캐내려고만 했지, 다른 층들은 등한시했어. 5층의 사람이 그렇게 나왔다면, 다른 층 사람들 역시 그와 한패일 가능성이 아주 커. 후에 내가 다시 알아보도록 하마. 큰일은 아니었으면 좋겠구나.”
“6층 사람 이야기를 계속해 줄래요? 수면 위로 떠 올라 있지 않은 사람이라.”
노파의 요구에 기성은 다시 구체적인 설명에 박차를 가했다.
“가명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남자는 자신을 ‘은평’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나이는 이쪽이랑 비슷하게 삼십 초반에서 중반 정도.”
“나 아직 스물아홉이에요.”
가현의 말에 기성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설명을 계속했다.
“무너질 듯한 외관의 건물이라 말씀드렸죠, 실내 공간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곳이었어요. 문 하나 너머로 세트장 하나를 지어 놓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리고 가이드가 직업이라는 건 저도 처음엔 의심했는데, 진실인 것 같았어요. 거실 벽 한쪽에 자기가 다녔던 곳들의 사진과 상세한 노트까지 써 붙여 놓았더라고요.”
“마음만 먹으면 그 정도를 꾸미는 건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두 사람이 찾아온다는 건 그쪽 예상에 전혀 없던 일이었을 터이니…, 가이드란 사실은 진실이라 봐야겠군요.”
노파의 대답에 기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마친 노파는 무엇이 떠오른 듯, 혹은 무엇을 떠올리려는 듯, 눈을 감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 입을 닫고 있던 가현이 말했다.
“아빠는 딸인 내가 못나 보였나 봐. 이렇게까지 해서 나를 떼어 놓으려는 걸 보니. 어찌 보면 대단하다 싶기도 해. 어느 한 편으론 나 스스로도 수용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어.”
“이유가 있을 거다. 체면 차리기를 제일로 여기는 사람일지라도, 너는 자식이잖니.”
“그 가이드 자식이랑 똑같은 말을 하네.”
가현이 말했다.
“뭐?”
“6층에 있던 가이드와 똑같은 말을 한다고. 거기서도 그 말을 듣고 온 참이거든.”
“우리는 그렇게 들었어. 그렇죠?”
기성은 고개를 끄덕거려 보였다.
“이유 따윈 상관치 않고 돈만 좇는 사람이겠지, 뭐.”
“얘기를 어디까지 끌고 간 거니? 언제가 되어서야 그 집에서 나올 수 있었던 거야?”
노파가 촉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래? 별말 안 했어. 그냥 간단한 타협점만 찾고 나온 것뿐이야.”
가현도 덩달아 촉박한 목소리를 냈다. 기성의 모습은 그저 둘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듣고 있는 듯 보였지만, 그의 머릿속은 두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빠르게 달려 나가야 한다는 촉.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먼저 앞서 나간 사람이 있는 것 같은 불안감. 기성 역시도 노파와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었다.
“무슨 협의.”
노파가 말했다. 그리고 그 네 음절은 다과의 끝을 예고했다.
“서로가 해야 하는 일을 하자는 거였어. 거긴 거기대로, 여긴 여기대로. 그쪽이 방해해도 상관없어. 나는 애초에 거기 참석할 생각은 있지도 않았고, 그냥 이유만 알고 나면 끝나는 거였으니까.”
가현의 말이 끝이 나고, 기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노파도 뒤따라 자리서 몸을 일으켰다. 둘의 생각은 맞닿아 있었다.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는 것. 기성이 말을 내뱉기 이전에 노파가 먼저, 자리에 앉아 있는 가현을 향해 말을 뱉어냈다. 그녀 선에서는 제법 거친 단어 선택이었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 이 등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