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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Sep 06. 2024

막내 하녀와 버섯 마을

저마다의 다른 이야기의 인생들이 삶의 덧없음을 느끼고 세상을 향해 손을 흔들죠. 그들의 손 아래에는 어떠한 것들이 주름이 되어 새겨져 있을까요. 기쁨, 슬픔, 분노, 좌절, 안도…, 평생에 걸쳐 세기도 어려울 만큼 수많은 감정이 그 안에 새겨져 있을 테지요. 저는 그중에서도 ‘미안함’이라는 감정에 치중하여 이 글을 쓰고자 합니다. 이것은 저의 처음이자, 마지막일 고해입니다. 제 나이 23살. 10대가 본다면 그들은 미래의 어떤 인간상을 보는 것이겠고, 20대가 본다면 본인과 가까운 사람의 인생, 30이 넘은 사람들이 본다면 멀지 않은 과거, 40이 넘은 사람들에게는 자기 자신 혹은 그들 자식의 이야기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지금껏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남이 쓴 유서를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글을 쓰기에 앞서 혼자 가만히 생각해 보았더니, 의외로 간단한 것이더군요. 우선은 한 사람이 남기는 마지막 자취인지라, 그 가치가 존엄하게 매겨질 것이고, 설사 아무리 모지리 같은 인간이 남긴 것이라 할지언정, 생판 알지도 못하는 남의 유서를 읽고 싶다고 해서 빌리는 것은 예의에 맞지 않겠죠. 어떤 내용을 써야 할까, 그리고 어떻게 써야 나라는 사람과 인연이 닿은 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덜 남길 수 있을까. 펜을 손에 쥐고서, 이 글을 쓰는 지금의 저로서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좀 더 살아 보고 결정하지, 그래.”


가까운 사람에게 죽는다는 말을 넌지시 꺼내 보았더니, 저에게 돌아온 대답입니다. 이유도 묻지 않고서 곧장 살라는 말부터 꺼내 놓는 걸 보니, 23년이란 세월은 인간에게 퍽 길지 않은 시간인 모양입니다. 이렇게 무지한 저 또한 한 가지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저라는 사람은 나약하다는 것이지요. 그 이유 때문인지, 저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보통의 사람들보다는 더 많은 양의 회의와 공포를 몸으로 느꼈던 것 같습니다. 회의라는 감정이 모호하지요. 짧게나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슬픈 감정을 느낄 때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시간은 제 마음 안에서 비교라는 행위가 실현되는 때입니다. 더 많은 양의 행복과 여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일. 자격지심. 그래서 한번은 그들의 인생을 어떻게 따라잡을 것인가, 가슴 깊이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의 부족함, 그리고 결핍됨으로 그들을 따라잡으려면 어떤 식으로의 채비와 노력이 겸비되어야 하는지를요. 그런데, 그 같은 생각은 항상 이상한 결론을 내어 왔습니다. 제가 피나는 노력을 쏟아부어 따라잡을 그들의 인생 역시 빈곤을 느끼기는 매한가지라는 것. 그들 또한 바닥에 있는 저만큼이나 위를 바라보는 불행으로 삶을 끝내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것을요. 그 사실을 깨달은 저는 혼란스러움에 한 달 가까이 몸서리쳤습니다. 저는 저의 회의라는 감정이 가난에서 파생된 어떠한 것, 그런 것이라 줄곧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가난이라는 것이, 시작도 끝도 없는 무서운 놈이라는 사실을 그때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걷는 법을 까먹고 말았습니다.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사라지니, 저절로 두 발이 움직이는 것을 마다하더군요.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에게 있어, 저란 존재는 세상에 둘도 없을 악연에 속하게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할 것입니다. 당신의 인생은 제 알 바 아니니까요.

당신의 발아래로 울고 있는 여자아이 하나가 보일 것입니다.

제 인생에 남은 마지막 인연이자, 하나뿐인 제 자식입니다.

무겁게 느껴질 짐에 불과하시겠지만,

부디 가벼운 마음으로 짊어져 주시기를…


연희는 쓰여 있는 글귀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일일이 짚어 가며 읽은 후, 마지막 글자가 지나가자, 손에 쥔 종이 뭉치를 바닥에 내려놓고서 말했다.


“가난한데 뻔뻔하기까지.”


그리고 연희는 손을 뻗어 상자에 엎어져 있는 사진을 꺼내 눈앞으로 가져갔다.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여인이 품에 배냇저고리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는 오래된 사진 한 장. 깊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사진 속 여인의 어설픔에, 아이가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깊이 볼 필요도 없어 보였다.


“잘했어.”


“그래도 엄마, 이럴 힘으로 마지막까지 어디 질척거려라도 보지 그랬어. 그렇게 내다 버리기에는 늙은 몸도 아니었는데…, 그리고 이 글을 읽은 사람은 내가 무겁게 느껴졌었나 봐. 나, 엄마가 갖다 놓은 그 대궐 같은 집에서 자라나지 못했어.”


“이런 걸 지금 말해 뭣하나 싶긴 해.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 이제까지, 아니, 당장에 금방 전만 해도 그렇게 화가 나고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는데. 감정들도 나를 따라 나이를 먹고서 힘을 잃은 모양이야.”


그렇게 연희가 사진을 보며 묵힌 이야기들을 홀로 떠드는 사이, 스멀스멀 떠오른 아침 해가 어느새 창문을 넘어와 그녀의 옆자리를 비추기 시작했다. 연희는 그 사실을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아챘다.


“벌써 해가…”


연희는 손에 붙은 종이와 사진을 털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추스른 뒤, 후다닥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시안.”


연희가 2층 계단 중앙에 서 있는 하녀를 향해 말했다.


“네!!!”


그녀의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저택의 분주한 사람들을 헤집고도 모자라 1층 거실을 가득 울렸다. 우렁차게 대답을 마친 시안은 마치 누가 그랬냐는 듯이 이내 새초롬한 표정으로 연희와 눈을 맞췄다. 연희가 눈짓을 보내고, 곧이어 시안이 손을 탁탁 털며 앞치마를 벗어젖히자, 남은 사람들은 너나 할 거 없이 질투심 가득한 눈빛으로 시안의 얼굴을 흘겨보았다. 시안 역시 자신을 향한 눈동자의 수가 많은 것을 느끼고 있다는 듯, 일부러 한껏 과장된 발놀림을 이용해 계단을 올랐다.


‘탁탁, 탁, 탁탁, 탁.’


“여기.”


시안이 2층으로 올라오자, 연희는 그녀에게로 손짓을 보냈다. 그리고 연희는 문을 열어둔 채로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회장님 일로 부르신 건가요?”


“그래, 그렇단다. 근데, 대답을 꼭 그렇게 해야 속이 후련하니?”


“매번 조용히 사라지면 오히려 그걸 더 수상쩍게 여길 거예요.”


그 말과 함께 잠시 뜸을 들이던 시안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일부러 들으라는 것도 있지만요.”


“이제 차고에 들어갔으니, 슬슬 따라 들어가면 될 거야.”


“네, 알겠습니다.”


“알아서 잘하겠지만, 남들이 하는 말에 너무 괘념치 말렴.”


“네, 노력할게요.”


‘탁.’


시안이 문을 닫고 나가며 일으킨 작은 바람과 함께, 연희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 또한 허공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이 짓을 한 지도 오래지, 이제는 뭘 좀 건져야 할 텐데…”


연희의 방에서 나온 시안은 홀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시안은 또다시 내려가는 발걸음을 크게 가져갔다.


‘쿵, 쿵, 쿵, 쿵.’


“야, 이년아, 시끄럽다!”


“역겨운 년.”


“어우- 말하지 마. 말해 봐야 뭐해, 듣는 시늉도 안 한다니까.”


시안은 뒤통수로 날아드는 말들을 하나씩 속으로 곱씹으며 현관문 쪽으로 차근차근 걸음을 내밟았다. 시안이 현관문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말소리는 그에 비례하여 차츰차츰 줄어들어 갔고, 그 같은 분위기가 거의 끝이 나는가 싶은 그때였다.


“천애 고아라 좋겠네, 어딜 가나 이렇게 사랑받고.”


이미 식기 시작한 분위기 속에서 그 하녀의 말소리는 유독 길었고, 또 두꺼웠다. 그녀의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시안은 가던 걸음을 세우고 자리에 우뚝 섰다. 그 모습에 하녀들은 동시에 움찔거리며 마치 ‘저건 심했어.’라는 눈초리로 그 말을 뱉어낸 장본인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같이 욕을 뱉어내고도 핀잔을 주는 입장이 된 이들과 단 한 번의 입방정으로 눈총을 받게 되어 버린 사람. 그렇게 그들이 서로 책임을 떠밀어 가며 같잖은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찰나, 현관에서 시작된 시안의 고함이 그러한 어수선함을 단박에 옭아냈다.


“야, 이 미천한 상것들아!! 그 나이들을 처먹고도 깨달은 게 그렇게 없어? 능력이 없으면 입이라도 다물어. 낡아빠진 쪼다들.”


단 한 번의 들숨도 없이 한 번에 저 긴말을 입 밖으로 쏟아 낸 시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대궐과도 같은 문을 밀치고 나갔다. 그리고 2층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1층으로 내려왔다.


“나는 쟤가 욕을 하면 그것만큼 듣기 좋은 게 없더라.”


연희다.


“그래서 어떻게, 거기 서 있는 사람들은 할 일 다 끝내고 모여 있는 거예요? 그게 아니면 곤란한데.”


연희가 말했다. 연희의 말이 울려 퍼지자, 시안을 쫓는답시고 날뛰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상기된 얼굴로써 욕지거리를 게워 낼 얼굴이었던 사람들, 그 모두가 마치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일언반구의 대꾸도 없이 자신의 일터로 발길을 되돌렸다. 밖으로 빠져나온 시안은 넓게 트인 정원의 중심부를 지나,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황급히 뛰어 내려갔다. 빠른 걸음을 이끈 시안이 차고 입구에 다다르자, 안쪽에서부터 불어온 먼지바람이 그녀의 머리를 강하게 쓸고 지나갔다. 눈 속까지 파고드는 바람에 시안은 두 눈을 감고서 고개를 내렸지만, 마음속에 드는 안도감까지는 표정에서 숨기지 못하였다. 그녀가 그런 안심에 빠져 있는 사이, 어둠 속에 머물고 있던 배기음이 입구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며 소리를 순식간에 크게 부풀어 올렸다. 잠시 긴장이 풀린 틈을 타, 자신도 모르게 헝클린 머리를 매만지고 있던 시안은 화들짝 놀라며 기둥 뒤편으로 빠르게 몸을 숨겼다. 그리고 보라색의 지프 하나가 빛의 경계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색깔은 봄에 핀 벚꽃, 꼭 그것과 닮아 있었다. 매혹적인 색이었지만, 은은히 덮여 있었기에 눈이 이끌린 사람들의 마음에도 흑심이 맺히지 않을 정도. 딱 그만큼. 보라색 차에 올라 있는 이는 별다른 행동 없이 곧장 차고를 빠져나갔다. 그를 본 시안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실룩댔다.


“시작하자.”


한겨울의 바싹 마른 나무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굽은 길. 저택에서 나와 큰길을 향해 빠져나가는 길은 자라 등껍질을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돌려 나가는 것과 그 꼴이 유사했다. 아직은 밝음이 모자란 거리, 운전대에 손을 올린 시안의 아랫입술 인근 자리들이 그녀 스스로 만들어 낸 잇자국으로 가득했다.


“우, 이 구부정한 길도 역해서 멀미가 날 지경인데, 오늘은 어째 날씨까지 이런다니.”


자욱한 안개와 어두운 도로. 시안의 말 그대로였다. 도로를 밝히는 것이라곤 빽빽한 가지들 사이로 떨어져 내리는 가는 빛줄기가 고작이었고, 그마저도 양이 많지 않았다. 도로에 덮여 있는 고요와 평온. 그것들은 하나같이 거짓이었고, 그들이 탄로 나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쨍그랑!!!’


그것은 마치 한데 몰아넣은 작은 유리잔들을 한꺼번에 깨부수는 것 같은 굉음이었다. 소리는 흉포했고, 몸집이 굵었다. 뒤이어 도로를 달리던 시안의 차가 소리를 내며 자리에 멈춰 섰다. 텅 빈 도로였던 터라 사고라 이를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턱을 강하게 엇물린 시안은 한동안 고통에 말을 꺼내지 못했다. 시안의 숨소리가 차 안을 메웠다. 시안은 의식해서 숨을 내쉬어 가며 빠르게 눈을 돌려 바깥을 살펴보았다. 벌렁거리는 심장이 눈의 초점을 자꾸만 흩뜨려 놓았지만, 그럴수록 시안은 더욱 집중했다.


“일단 특별한 건 없어 보이는데…”


“아이 씨, 나가서 확인해 봐야 하나?”


시안은 떨리는 손으로 문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덜컥.’


잠금이 풀리는 소리, 하지만 시안이 차량 문을 열어젖히고서 땅 위로 발을 내리는 것은 또 얼마 가량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뭐야? 뭐? 어?!”


“이런 개새끼들아! 뭐냐고!!”


시안의 목소리가 도로의 고요에 힘입어 길게 메아리쳤다.


“뭔데, 뭐냐고…”


도로는 잠잠했고, 반응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숲의 무응답에 차 주위를 초조한 발걸음으로 맴돌기를 하나, 둘, 셋, 그리고 넷…, 그때였다. 네 번째 바퀴를 시작하려는 그녀에게 새로운 소리가 불쑥 나타난 것은. 시안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금방에 주저앉아 내려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이는 스쿠터와 그곳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검은 연기. 거기까진 그저 궁핍한 사람의 외형에 불과했지만, 그 위에 앉아 있는 노인의 차림새는 실로 그렇지 않았다. 수려한 옷가지와 뽀얀 낯빛, 이질적이었다. 시안은 흐트러진 머릿속으로 애써 생각을 이어나갔다. 낯선 이의 심정 따윈 알 것 없다는 듯, 유유히 시안의 옆을 지나가는 노인. 그것이 의도됐든, 그렇지 않았든, 느닷없는 노인의 등장은 시안의 마음속으로 불안의 불씨를 넓게 퍼뜨렸다. 결국, 먼저 조급해진 것은 시안 쪽이었다.


“저기! 잠시만요!!”


“…”


노인은 뭐라 말을 하였지만, 소리의 크기가 너무 작은 나머지 시안은 그를 미처 알아듣지 못했다. 시안은 한 

번 더 노인의 앞으로 말을 던졌다.


“저기요!!!”


시안의 목소리와 함께 스쿠터가 중심을 잃는 듯 휘청이더니, 이내 가던 자리에서 머리만 돌려서는 시안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나무를 꿰뚫고 내리는 가느다란 빛줄기에, 그늘져 있던 노인의 얼굴이 빛 밖으로 끌려 나왔다.


“그래, 이 새벽바람에 길을 잃으셨다고?”


꺼뜨린 스쿠터에서 몸을 내린 노인이 시안 쪽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노인의 목소리는 가늘고 힘이 없었지만, 단어 하나하나의 발음이 또렷해 그것을 상쇄시키는 특성이 있었다.


“아! 가시는데 죄송해요. 저, 실은…”


“아니, 괜찮아. 미안해 말게. 나는 바쁨이 몸에 밴 족속이 못 되니까.”


말을 마친 노인의 눈이 시안의 몸을 염탐하듯 위에서 아래로 움직였다. 시안은 당장이라도 게걸스러움이 느껴지는 그의 눈을 손톱으로 눌러 터뜨려 버리고 싶었지만, 숨을 깊게 들이쉬며 상황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시안은 길지 않은 시간에 머릿속으로 결론을 내렸고, 동시에 노인을 향해 물음을 건넸다.


“어르신, 혹시 무슨 소리 듣지 못하셨어요? 도로에까지 미칠 정도면 보통 소린 아닌 것 같은데…”


오로지 시안의 몸에만 관심을 보이던 노인의 눈이 그녀의 말에 순간 요동을 보였다. 처음부터 그곳을 보고 있던 사람이라면 알아차리는 게 어렵지 않았겠지만, 시안은 아니었다.


“소리? 무슨 소리?”


시안의 물음에 노인이 무성의한 어조로 반문했다.


“글쎄요. 굳이 말하자면 뭔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인데, 저도 처음 들어 본 소리라 설명이 안 되네요.”


“믿기 어렵군. 숲으로 둘러싸인 도로에 그런 소리가 날 턱이 없는데.”


“그러니까요. 저도 깜짝 놀라, 가던 길을 멈추고 차에서 내렸다니까요.”


상황에 대한 서넛 마디 정도가 둘을 오갔지만, 두 사람 모두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근데, 저 혹시 어르신은 버섯에 사시는 분인가요?”


“오? 자네, 우리 마을에 대해 알고 있나?”


시안은 조심히 말을 이어나갔다.


“짧은 기억이지만, 마을이 예뻤던 걸로 기억해요.”


“암, 예쁘고말고. 그나저나 자네는 우리 마을을 버섯이라고 부르는군.”


“회장님의 저택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어요. 저는 그때부터 그걸 그냥 따라 부르는 것뿐이고요.”


“그래, 마을 주민들이 이걸 들으면 아주 좋아하겠어. 그들은 항상 마을에 이름이 없는 걸 속상해하곤 했거든.”


“별칭 같은 것도 없었어요?”


“그런 거라면 많이 있지만, 그것들은 하나같이 말에 무게가 없지 않은가. 이름을 누가 정해 주는 것과 자기들끼리 떠드는 건 차이가 있지.”


그리고 노인은 말했다.


“아하. 그러고 보니 소각 날이 오늘이었던가. 그걸 길 잃은 자네가 우연히 들어 버린 것이고.”


“소각이요?”


“뭐, 비슷해. 그리고 지금은 그게 아니지. 지금 중요한 건 자네가 궁에서 내려온 사람이라는 거야!!”


“궁이요?”


시안이 꺼벙한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노인에 되물었다.


“그거 혹시 회장님…”


“그를 뵌 지도 벌써 오래됐군. 이젠 그 괴팍한 취미를 버릴 때도 된 것 같은데, 그게 아직도 그리 재밌으신가 봐, 응? 끌끌.”


흥분 가도에 오른 노인은 오랜 친우를 앞에 둔 것처럼 입을 달싹거렸다. 노인의 말들이 눈앞을 휙휙 지나갔지만, 정작 시안은 알아들은 것이 없어, 계속되는 그의 말에 부침이 느껴졌다.


“그런데, 어르신은 궁이라고 부르시네요?”


“뭐? 크하하, 큭큭큭큭.”


노인이 손으로 얼굴을 덮고서는 비웃음을 터뜨렸다.


“젊은 아가씨. 거기서 일한 지가 얼마나 되었나?”


“네? 아뇨, 저는…”


“가만, 어디 내가 한번 맞춰 보지.”


노인의 시선이 다시 슬금슬금 아래로 떨어졌다.


“1년!! 1년이요! 이제 1년 조금 넘었어요.”


시안의 우렁찬 목소리에 노인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흠흠, 역시. 어째 얼굴이 무척 앳되더군. 그래, 그 호기심은 나의 책임이니 내 가르쳐 주지. 그곳은 처음 지어질 때부터 궁이었다네. 그건 내가, 혹은 살아 있는 다른 누군가가 정한 것이 아니야. 말 그대로 숙명처럼 붙여진 것이라고나 할까.”


난해하고도, 추상적인 얘기였다. 말을 하는 노인의 표정 역시 의뭉스러웠기 그지없었는데, 시안은 왠지 모르게 그의 이야기에 반감이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홀려 가는 기분이 들었다.


“어때, 흥미 있는 이야기지?”


“특이한 이야기네요. 무슨 신앙 같아요.”


“근데 저는 저택에서 그렇게 부르는 사람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거 같은데…”


“당연히 그럴 수밖에! 이건 정말 고급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정보니까. 운 좋은 줄 알라고. 아! 그렇지. 그 여자는 알 거야. 이름이 뭐였더라, 아무튼 그 집 집사로 있는 여자, 그녀는 알고 있어. 그 여자는 시작을 함께 한 사람 중 한 명이거든.”


노인의 말을 들은 시안은 생각했다.


‘연 집사님을 뜻하는 건가? 그리고, 이 노인은 뭔데 남의 집안 얘기를 속속들이 안다는 듯이 얘기할 수 있는 거지? 시작을 함께 한 사람이라는 건 또 무슨 뜻일까?’


시안의 마음속에 긍정의 호기심이 서서히 자기 영역을 넓혀 나갔다. 그리고 시안은 짧은 시간에 머릿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시안이 내린 결론은 명료했다.


노인을 따라가자.


마을이 가까워 짐에 따라, 빛을 가로막고 서 있던 굵은 가지의 나무들이 하나둘 자리를 비워 나갔고, 그에 기대 길 위를 드리우고 있던 음영 역시 빠르게 자취를 감춰 나갔다. 앞서와 별반 다를 것 없는 풍경이었지만, 변화는 있었는데, 줄곧 무채색만을 이용해 합을 이루고 있던 길가로 알록달록한 색감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 음습함이 전부였던 숲의 길은 그렇게 끝을 알렸고, 새로이 나타난 길은 그 공백을 특유의 색들로 오밀조밀 물들여 가며 시안의 앞에 시작을 선사했다.


“색들이 하나같이 너무 예쁘네요. 제 기억에 있던 것보다 훨씬 좋은데요?”


시안은 말했다.


“근데 좀 아쉽다. 어째 집들을 저런 후미진 자리에 지었대요, 사람들 눈에 띄는 자리에다 올렸으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비난이 느껴지는 말투에 노인이 웃음을 곁들여 답변했다.


“끌끌, 역시 젊은 게 좋아.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많구먼. 우리는 병풍을 자처한 사람들일세. 필요치 않다 싶은 일은 구태여 하려 들지도, 또 시도조차 하지 않지. 근데 말이야, 아까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운전 좀 살살 해 주면 안 되겠나. 저게 저래 봬도 내 애마일세.”


노인이 차 트렁크에 묶여 있는 자신의 스쿠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염려 마세요. 꽉 붙들어 매 놓았으니. 그리고 저기서 떨어진다고 해도 박살 나거나 하진 않을 거예요.”


시안의 말을 들은 노인의 얼굴이 코를 중심으로 말려 들어갔다. 긴장을 내려놓는 그만의 방식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아가씨는 어딜 가던 차가 아니었나? 새벽부터 떠날 정도면 꽤 멀리 갈 요량이었던 것 같은데. 뭐, 내가 신경 쓸 건 아니지만.”


“아, 그거요? 그거라면 진즉에 일이 끝났어요. 농땡이 피우던 말단 직원 하나 잘못 만나서 불똥 튀는 일이 걱정이라면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끌끌, 역시 젊은이의 귀라 말하기가 좋군.”


그리고 노인은 손을 들어 앞쪽의 어느 지점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기에 세우면 되네. 고생했어. 차에 묶여 있는 내 애마는 갈 때 풀어 주고 가도록 해. 그런데 어떻게, 외진 곳이지만 모습이 그리 나쁜 편만은 아니지?”


“네, 좋아요.”


“그래. 그럼, 들어갈까.”


노인이 앞장서 발을 내밀었고, 시안은 천천히 그 뒤를 뒤따랐다. 마을 입구의 양편에는 긴 직사각형 모양의 텃밭들이 즐비했다. 농원의 모습이었지만, 황량한 시골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정교히 측량돼 있는 간격이라든가, 여타 시각적 요소들에서는 감탄을 자아낼 만한 기품의 아우라가 풍겨 나오고 있을 지경이었으니까. 외딴 사람들이 모여 밥을 해 먹고 잠을 자는 주거의 공간이라고 보이기보다는, 영화에서의 인간도 짐승도 아닌 낯선 생명이 숨어 지내는 공간을 하나의 세트로써 묘사시켜 놓은 듯한 경관에 가까웠다. 집들은 하나같이 위는 둥글고 아래는 길쭉한 형상으로 땅 위로 솟아올라 있었는데, 높이에만 근소한 차이가 있을 뿐 생긴 꼴들은 서로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집과 집, 그 사이사이 뒤섞여 있는 굵다란 나무 기둥들, 시안은 그것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와, 정말 집들이 버섯처럼 나무들 아래에 쏙쏙 들어차 있네요. 꼭 나무에서 뻗어 나온 자연적인 공간 같아요.”


“음! 맞아! 저들을 빚어낸 목수도 꼭 그 같이 말을 했었어. 언젠가 이러한 주제로 집을 지어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마침 이곳에 해소의 기회가 생겨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며 말이야.”


“어르신. 그러면 여기 버섯도 말씀하셨던 시작과 어떤 관련이 있는 장소인 건가요? 제가 만약 이곳을 지은 목수였더라면 저는 여기를 못 떠났을 거 같아서요. 그분은 어떻게 됐어요? 여기에 있나요?”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이제 여기 없어.”


노인이 대답했다.


“우선에 그 사람은 원체 말주변이 없었어. 같이 밥을 먹어도, 휴식을 취해도, 늘 혼자 입을 다물고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런 그가 마음에 들었지. 좋은 사람이라는 게 내 눈엔 보였거든. 그래서 계집아이 짝사랑하듯 따라다녀도 보았는데, 결국엔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였어.”


“어디에든 그런 사람은 꼭 있나 봐요.”


“으음. 그래도 한동안 이곳에서 지내다가 떠난 걸 보면, 결과에서만큼은 후회를 느끼지 않은 게 아닌가 싶어. 물론 어디까지나 내 추측에 불과한 이야기지만.”


긴 이야기가 또 한 번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왔지만, 시안은 단 하나의 문장도 흘려듣지 않았다. 시안은 그의 진솔한 이야기가 흥미로웠고, 그러한 얘깃거리들을 좀 더 들어 보고 싶은, 감정의 들솟음을 느꼈다. 적당히 서늘한 공기, 상쾌한 풀 냄새, 시안은 신경을 누그러뜨리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음미했다.


“구경은 천천히 하는 걸로 하지, 어차피 자네는 업무를 끝마치고 돌아가는 일만 남은 말단 아닌가.”


“네, 그렇죠.”


시안의 대답에 노인이 손짓했다. 커다란 나무들 사이에 있는 집들을 크게 다섯 구역으로 나눈다고 치면, 노인의 집은 두 번째와 세 번째, 그 사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길쭉한 집채만큼이나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 역시 크기에 모자람이 없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세로로 붙어 있는 나무젓가락이 앞으로 곤두서 있는 것과 비슷했다.


“실로 어마어마하네요.”


“놀라긴 아직 일러, 내부가 진짜니까.”


노인이 힘주어 문을 밀자, 긴 대문은 아주 부드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시안은 이만한 대문이 움직이는 데도 듣기 싫은 잡음 하나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감탄을 느끼며 노인을 따라 걸음을 내렸다.


“우와.”


그녀의 첫 감탄사를 앗아간 존재는 높이에 끝이 없는 기다란 나무책장이었다.


“저 책들이 다 어르신 소유예요? 설마 저들을 다 읽어 본 건 아니시겠죠? 세상에! 세상에!!”


“그럴 리가. 설사 저들을 다 읽었다고 하더라도, 어디 교수 나부랭이밖에 더 됐겠나? 따분하지. 난 지금이 좋아.”


“결국엔 읽은 건 몇 개 없다는 그 소리네요.”


“잔소리 그만하고, 보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얼마든지 꺼내 보게. 단, 사다리를 대동키는 귀찮으니 대충 키 닿는 곳에서만이야. 잡다해 보이지만 소설, 시, 희곡, 인문학…, 아! 최근엔 여행 잡지들도 매달 한 부씩 받아서 꽂아 넣고 있지. 비록 사진이긴 하지만, 보고 있으면 마음이 어찌나 설레는지 모른다고.”


예상보다 흥미를 느껴주는 시안에 노인은 흥이 돋은 채로 말을 이어나갔다. 시안은 외투를 주변 자리에 대충 던져 놓고, 책장 앞으로 가, 한동안 그곳에서 서성이며 노인과 가벼운 담소를 주고받았다. 이젠 버섯이라는 이름이 붙어 버린 집. 집의 내부구조는 외형만큼이나 특색이 가득했다. 실내의 공간들은 전체가 둥글둥글하여 하늘에 떠 있는 달에 비유하면 설명이 편했다. 우선 내부 전체, 어느 곳 하나 각지지 않고 둥글게 생긴 벽면이 특징인 집 전체는 꽉 차 있었다. 보름달이었다. 다음으로 시안이 감탄한 드높은 책장이 붙박여 있는 서재, 서재는 사각형이 아니었다. 양 끝이 얇고 가느다랗게 올라가 있었다. 초승달이었다. 마지막으로 부엌과 거실, 두 공간은 생김이 비슷했는데 서로가 합쳐질 순 없지만 닮아 있었다. 각각 상현달과 하현달이었다. 침실도 달에 빗댈 수 있었다. 이불과 베개가 다방면으로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보아, 노인의 침실은 신출귀몰한 월식이었다.


“이리 와 먹지. 육류는 없지만, 입에 넣을 건 많다고.”


노인이 서재에 있는 시안을 불렀다. 식탁 주위, 아니, 집안 전체가 온기로 가득했다. 거실 중앙에 커다란 난로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을 끄지 않고 종일토록 틀어 놓는 노인의 생활 방식이 이유인 듯했다.


“어때, 맛있겠지?”


노인이 식탁 앞에 앉은 시안에게 미소 띤 얼굴로 말을 건넸다. 이유가 없어 보이진 않았다. 원판 형태의 식탁 위에 덮여 있는 식탁보의 색깔이 무척이나 파릇파릇하였는데, 그것만큼이나 식탁 위의 음식들이 그러했다.


“영양식들뿐이네요. 건강 걱정은 없으시겠어요.”


“아무렴. 나를 봐! 주름들이 하나같이 얕잖아. 이 나이 먹고 이런 얼굴을 가진 노인? 그 어디서도 보지 못했을걸?”


그 말을 들은 시안은 노인의 얼굴을 다시 유심히 살펴봤다. 허세가 아니었다. 시안은 태평히 어깨를 으쓱이며 화답으로 분위기를 이어나갔다.


“인정이요. 제가 있는 궁만 해도 나이 좀 있어 보인다, 싶은 사람들? 대부분 다 수심 가득한 얼굴로 일만 할 뿐이거든요. 그런 족속들에 비하면, 어르신은 굉장히 좋은 편이신 거죠.”


시안의 말을 들은 노인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착하게만 말을 해 오던 아가씨가 갑자기 나쁜 말을 꺼내 드니까. 원래 나이가 들면 작은 일에 놀라는 법이거든.”


“아!! 아아…, 궁의 사람들에겐 비밀로 해 주세요. 부탁이에요.”


시안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궁이랑 무슨 인연이 있다고. 그리고, 난 그런 짓 안 해.”


노인이 콧방귀 뀌며 말했다.


“그래도 궁과 연이 없는 건 아니지 않나요? 거긴 외길이었고, 어르신도 외길을 타고 내려오다 저와 마주치신 거잖아요.”


급했나, 라는 생각과 함께 시안은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공기가 무거워진 것은 노인의 행동 때문이었다. 노인은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노인은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입 안을 물로 헹궈 냈다. 시안은 반대로 목이 탔다.


“오늘 우린 서로에게 단어 하나씩을 가르쳐준 게 다군.”


노인의 대답은 내려놓은 투명한 물컵 속의 물이 찰랑거림을 멈추는 때와 시간이 비슷했다.


“네?”


“자네는 내게 ‘버섯’이라는 마을을.”


“나는 자네에게 ‘궁’이라는 저택을.”


“…네, 네! 맞아요!”


침을 삼키며 대답한 시안은 곧장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궁이란 이름, 근사한 것 같아요. 앞으론 저도 쓰려고요.”


“그래? 배움이 빠른 아가씨로군.”


그리고, 말을 끝낸 노인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아예 다른 이의 얼굴로 갈아낀 것처럼.


“우린 서로에게 궁금한 게 많은 것 같군, 그렇지 않나?”


“그래서 하는 제안인데, 각자 가장 궁금한 한 가지를 서로 질문해 보면 어떨까? 눈앞에 먹음직한 음식들도 차려져 있겠다, 편안한 마음가짐으로써.”


즉흥적으로 만들어 낸 말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이러길 작정코서 시간을 재고 있던 것일까, 시안은 생각했다. 노인의 제안을 들은 시안의 심박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다. 시안은 다시 한번 직감을 따르기로 했다. 시안은 긴장이 조금 풀린 모습으로 노인에게 말을 건넸다.


“어르신도 저한테 궁금한 게 있어요? 그것도, 많이?”


“당연하지. 자네보단 내가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을걸? 나이를 먹은 것만큼이나 말이야.”


“좋아요. 확실히 저는 많이 있거든요. 알고 계신 것 이상으로요.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역시 어르신을 향한 물음이겠지만.”


“그래, 서로 하나를 정하자고. 나는 이미 정했다네. 자넨?”


질문할 것을 정했냐며 묻는 노인의 안색은 여전했다. 시안은 잠시 생각하다, 말문을 열었다.


“잠시만요. 제게 조금만, 조금의 시간만 더 주세요.”


노인이 끄덕이자, 시안은 고개를 쳐들어 생각을 계속했다.


‘노인은 분명 그 시간, 그곳에 있던 나에 관해 물어 올 거야.’


‘내가 궁금한 건 노인의 정체지만, 그걸로 상쇄가 가능할까? 지금은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순간이야.’


시안은 생각을 멈추고서 눈을 내려 노인의 손을 바라봤다. 그때, 노인이 말을 건네왔다.


“정하였나?”


“네, 정했어요.”


“좋아. 그럼, 누구부터 시작할지는 우리 아가씨께서 정하시게.”


“어르신부터. 근데 그 전에 한 가지 약속받을 것이 필요해요.”


그에 노인이 되물었다.


“약속? 내용이 무엇인가?”


“서로 간의 질의에 있어, 그것이 무엇이 됐든, 한 치의 거짓 없는 대답만을 하여야 한다는 것.”


“거짓이 나올 상황이 아니란 걸 잘 알 텐데. 우리 똑똑한 아가씨가 내 입이 걱정되었던가 보군.”


노인이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맹세하지. 자네가 내게 무엇을 물어보든지, 나는 그에 대해 진실만을 말해 주겠다고.”


“좋아요! 그럼, 이제 시작할까요?”


식기 옆에 호박 주스 한 잔이 놓여 있었다. 노인은 한 손에 잔을 들고, 공중에서 그를 빙빙 돌렸다. 투명하지 않은 잔인지라 속에 담겨 있는 호박 조각들이 시안의 앞쪽에선 보이지 않았지만, 노인의 눈에는 자신의 손길을 따라 돌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느릿한 속도로 잔을 열댓 번을 돌렸을까. 잔을 돌리던 노인이 손을 멈추고는 입을 열었다.


“멀리 떠날 요량으로 차를 몰고 나왔던 자네가, 나를 만난 이후로 일이 끝났다는 말을 뱉어낸 까닭은? 이게 내가 아가씨에게 건네는 질문일세.”


시안은 뜸 들이지 않았다. 주저 없이 대답을 시작했다.


“저는 누군가를 미행하는 중이었습니다. 말단인 제가 혼자 꾸밀 만한 일이 아니라는 건 어르신께서도 알고 계시겠죠. 미행 도중 도로에서 큰 소리가 들렸고, 그에 깜짝 놀란 저는 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디선가 등장하였는지 모를 노인 한 사람을 만난 것이고요.”


시안은 마지막 문장을 말하며 우측 사선으로 고개를 기울여 노인을 가리켰다. 미리 정해진 대사라도 주어져 있던 것처럼 시안은 빠르게 대답을 털어 보냈고, 시간이 비자, 입이 마른 그녀는 앞에 놓인 잔으로 손을 가져가, 여유를 내비쳤다. 잔에 담긴 주스를 한 모금 삼키고서 시안은 이어 말했다.


“세상에?! 이거 호박이었어요? 저는 색이 주황빛이길래 당연히 당근이나 오렌지를 간 것인 줄 알았는데.”


대답에서 시작해, 주스와 함께 말을 끝마치는 것까지.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노인은 대놓고 감정을 내비치진 않았지만, 몹시 흥분에 차 있는 얼굴이었다. 대담과 배짱, 음절 하나 떨지 않고 내민 목소리. 노인은 놀랍다는 듯 바라봤다.


“대답은 그게 전부인가?”


노인이 물었다.


“네? 네. 까닭을 물어보셨잖아요. 일이 끝났다고 어르신에게 말을 한 까닭. 그래서 저는 지금 그 까닭을 모두 말씀드린 거예요.”


대답을 들은 노인이 영 얼굴에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자, 시안이 염려 섞인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부족하세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


“아니, 충분해.”


노인이 단호히 시안의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그에 시안은 활짝 핀 얼굴빛으로 말했다.


“그렇죠? 보자, 그러면 이제 제가 여쭤볼 차례네요.”


“나는 나이가 들어 아가씨처럼 머리가 핑핑 돌아가질 못해. 답을 하는 데 있어 시간이 걸릴 수 있어. 알아 두라고.”


“제 질문은 쉬워요.”


말과 동시에 싱긋 웃음을 보인 시안은 바로 뒷말을 이어 붙였다.


“공평함이 중요시되는 상황이니만큼 높임말은 빼놓고 말할게요. 그래도 괜찮으시죠?”


노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짝!!!’


시안이 손뼉 치는 소리와 함께 호기로이 그 시작을 알렸다.


“자! 제가 당신에게 하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르신, 당신은 무엇입니까?”


질문을 마친 시안은 다시 잔으로 손을 가져가, 한 모금의 호박 주스를 목으로 넘겼다. 그리고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식탁에서 물러나 몸을 뒤돌려 조금씩 발걸음을 옮겨 나갔다.


“뭔가? 어딜 가는 게야.”


자릴 박차고 일어나, 뒤를 향하는 시안을 보며 노인이 말했다. 그러자 시안은 퉁명스럽게 노인의 말에 답했다.


“그냥, 어르신이 대답하시는 데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보여서요. 좀 전에 못다 본 책, 그거나 구경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말을 마친 시안은 노인의 눈을 힐끗 살폈다. 그리고 의자 옆, 엉거주춤하게 돌아선 그 자세 그대로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앉을까요?”


“앉게. 책은 이후에 얼마든지 보게 해 줄 터이니. 책을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은 얼굴인데, 뭐, 의미 없겠지.”


노인은 화내지 않았다. 노인이 의자가 있는 곳으로 손짓하자, 시안은 말없이 다시 자리에 몸을 앉혔다.


“우린 서로 한 가지의 질문을 주고받기로 정했네만, 대답의 가짓수를 정하진 않았지. 지금 보니 그게 오류였던 것 같군.”


“흐흐, 비상해. 머리가 아주 비상하군.”


노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질문을 건네고 난 뒤에 자네가 나에게 쥐여 준 답변은 총 3개야. 자네의 ‘임무’, ‘지위’, ‘현 상황’. 그리고 나를 만났단 말로써 대답을 끝마쳤지.”


“질문 하나에 3개의 답변을 들고 왔구먼. 어떻게 생각하나?”


노인이 묻자, 시안이 대답했다.


“질문과 구체적으로 답한 말들. 꼭 제가 그 모두를 계산하에 일부러 그렇게 끌고 갔다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래, 난 확신해. 그런데, 거기엔 분명 도박이 실려 있었어.”


노인이 한쪽 팔을 의자 위로 걸쳐 올리며 말했다.


“그게 뭐죠?”


시안은 의자를 식탁 앞으로 당기며 물었다.


“내가 자네의 답변과 같은 개수의 대답을 내줄 것이란 사실.”


“솔직히 아직도 이해가 가질 않아. 어떻게 도박과도 같은 그 확신을 그렇게 단단히 믿을 수 있었지? 무슨 관상쟁이라도 되나?”


“확신이라…, 확신이라 말을 하긴 어렵죠. 관상쟁이는 더더욱 아니고요. 그냥 감이 그랬어요.”


그리고 시안은 노인의 얼굴을 살핀 뒤, 그의 표정이 괜찮은 듯 보이자,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직감. 제가 감이 좋거든요. 솔직히 저야 손해 볼 것도 없고 하니, 앞뒤의 정황까지 붙여 어르신께 말씀해 드린 거죠.”


그리고 시안은 웃음을 크게 터뜨리며 말했다.


“아하하!! 재밌다. 어찌 됐든 둘 중 하나인 거잖아요. 패기 아니면, 똘기. 이젠 답을 내주세요, 어르신. 저는 어느 쪽에 속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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