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영강 Sep 02. 2024

오래된 사진

“하아, 하아….”


신음과 함께 잠에서 깬 연희는 흠뻑 젖은 몸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른손등으로 이마에 흥건히 맺힌 땀을 닦아 낸 연희는 스탠드 아래에 놓인 탁상시계를 바라봤다. 시간은 이제 막 새벽 3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연희는 그 길로 이불을 밀쳐 내고서 바닥으로 다리를 내렸다. 연희는 욕실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선 연희는 곧장 샤워기를 집어 들고서 온수 밸브에 손을 뻗었다. 그렇게 뻗친 손으로 밸브를 돌리려는 찰나, 연희의 머릿속으로 기분 나쁜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오늘 내도록 그녀가 떠올린 것이기도 했다.


“샤워는 하지 말자.”


연희는 손으로 붙잡고 있던 밸브를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연희는 세면대 위의 수납장 문을 열고서 마른 수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연희는 몸에서 축축한 느낌이 들지 않을 때까지 수건으로 몸을 문질렀다. 회색이던 수건이 금세 그녀 몸에 있는 땀을 머금고 군데군데 검게 변하였다. 연희는 몸을 닦아 낸 수건을 돌돌 말아 손잡이에 걸어 놓은 뒤, 욕실을 빠져나왔다. 다시 침대로 돌아온 연희는 이불 위에 어지러이 펴져 있는 잠옷들을 몸에 걸쳤다.


‘또, 그 생각. 또, 그 꿈이야. 이제는 무의식에서까지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어.’


눈을 뜬 채로 잠시 생각하던 연희는 이내 고개를 가로젓고서 이불 깊숙한 곳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스탠드 위에 놓여 있는 낡은 탁상시계 하나. 긴 세월에 부품의 칠이 벗겨져, 바늘이 움직일 때마다 거슬리는 소리를 뿜어냈다. 시계는 느리고도 음흉스럽게 침대에 들어가 있는 연희의 마음을 잠식해 가기 시작했다. 시작은 평소와 같이 일상에 묻힐 만큼의 크기로써, 그다음은 꽁꽁 묶인 기다란 막대 하나에 톱니가 걸리어 돌아가는 소리로써, 또, 그다음은 말라비틀어진 땅 위를 질질 끌려다니는 노인의 비명으로써. 탁상시계는 소리의 패턴을 바꾸고, 영악하게 그 세기까지 조율해 가며 연희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침대에 눈을 감고 있던 연희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까진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이제 막 선잠에 다다른 참이던 연희는 감은 눈꺼풀 아래에 자리한 자신의 또렷한 눈망울의 존재를 알아차렸고, 그와 동시에 이불을 강하게 걷어차며 고함을 내질렀다.


“이런, 썅!!”


‘삐-’


침실의 불이 켜짐과 동시에 찾아 든 소리였다. 고주파에 가까운 이명 소리를 감지한 연희는 재빨리 양손을 한 데 겹쳐 귀를 틀어막은 후, 자리에 주저앉았다. 소리가 가시기를 기다리며 연희는 목소리를 냈다.


“나를 미치게 만들 속셈이었다면, 너는 정말 제때 왔어.”


악몽으로 이미 열이 뻗칠 대로 뻗쳐 있는 연희에게, 귀로 들이닥친 이명은 그녀로 하여금 이성을 놓아도 좋다는 확실한 명분 거리가 돼 주었다. 쇄골을 지나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연희는 스탠드를 향해 움직였다. 스탠드 앞으로 온 연희는 망설임 없이 탁상시계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손에 들린 시계는 자신의 마지막을 알지 못한 채 여전히 연희의 귓등을 괴롭혔다. 연희는 시계를 있는 힘껏 벽을 향해 내던졌다.


‘쾅!’


소리와 함께 시계의 파편이 온 사방으로 흩어졌다. 연희는 곧바로 그 자리에서 발길을 돌렸다. 기다란 한숨과 함께였다.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2시간 남짓하게 남은 시간. 의도치 않게 쥐어진 지금과 같은 시간은 연희가 싫어하는 것 중에서도 최악에 속하는 것이었다. 지난 26년간 연희에게 있어 새벽이란 건, 좋든 싫든 현실에서 벗어나 꿈속에서 노닐어야 하는 시간이었기에 그렇다.


“공허, 무력, 피곤. 타의로 잠에서 깬 새벽은 언제나 이렇지.”


연희가 머리를 다듬으며 말했다. 그리고 연희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으며 자책의 말을 덧붙였다.


“하, 이젠 뭘 해야 할까. 잠드는 건 진작에 그르쳤고…”


창밖은 어두웠다. 달이 보이지 않는 밤이었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래됐구나. 그걸 거기에 처박아 둔 지도.’


말은 연희의 마음속에서 슬그머니 지나갔다. 소리를 들은 연희는 시선을 침대의 머리맡으로 가져갔다. 연희는 천천히 그곳으로 걸음을 내밟았다. 연희는 이불의 모퉁이를 잡고서 힘껏 걷어 올렸다. 두꺼운 이불이 걷히자, 침대의 매트리스와 바로 아래 받침목 사이로 틈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연희는 소매를 걷어붙이고서 안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팔을 집어넣은 연희의 어깻죽지가 입구 구멍에 부닥쳤다. 그만큼 안으로 파인 구멍의 깊이가 깊었다. 얼마 안 되어 연희는 허적댐을 멈추고서 속에 들여놓은 팔을 서서히 빼내기 시작했다. 갈색의 원목 상자였다. 안에서 지샌 시간이 상당했단 걸 보여 주듯, 상자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온통 먼지로 가득했고, 성한 표면이 없었다. 연희는 상자에 묻은 먼지 하나하나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리고 연희는 손으로 퍼낸 먼지들을 옷에 닦아 내며 상자를 계속해 닦아 나갔다. 상자를 향한 연희의 눈동자엔 미세한 떨림도 없었다. 연희의 손끝에서 퍼지는 스산한 사각거림만이 밝게 불 켜진 방 안을 번져 나갔다. 상자에 묻어 있던 먼지가 차츰 연희의 옷으로 옮겨 가자, 상자도 서서히 자신의 빛을 찾기 시작했다. 특이할 건 없었다. 아귀에 꽂혀 있는 자물쇠 하나가 전부였다.


“오랜만이야. 그간 어땠어?”


연희가 상자를 품에 안고서 마치 사람을 대하듯 말을 내뱉었다.


“뭐? 아주 답답했다고? 당연하지. 그러라고 고른 자리인걸.”


상자를 상대로 이어지는 연희의 혼잣말. 연희는 안고 있던 상자를 조심히 침대 위에 내려놓고서 탁상시계가 놓여 있었던 스탠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래로 나 있는 세 개의 수납공간, 연희는 바닥과 가장 가까운 수납장의 손잡이 위로 손을 뻗었다.


‘찰그랑, 찰그랑.’


은색의 키홀더에 매달린 열쇠의 가짓수가 못해도 열댓은 넘어 보였다.


“…서재, …아가씨 방, …이것도 아니고.”


보이는 열쇠마다 사용처를 자답하면서 키홀더를 뒤적거리던 연희는 문득 말소리를 멈추었다. 자물쇠에 슬어 있던 녹처럼 연희가 쥔 열쇠 또한 비슷한 모습으로 세월을 맞아 있었다. 녹이 슨 자물쇠의 구멍으로 들어간 열쇠가 거친 소리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지금껏 잠잠하게 있던 연희의 손이 세찬 떨림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연희는 자물쇠를 상자에서 빼내어 앉은자리 바로 옆에 내려놓았다. 아니, 그보단 떨림에 밀려 떨어뜨렸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왜 그래, 침착해. 흥분할 필요 없어.”


연희가 손등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말린다고 나선 반대편의 손 역시 떨고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떨림은 갈수록 심해졌다. 그리고 연희는 분노를 느꼈다. 꿈속에서의 움츠림은 자의가 아니라 치부해 버리면 그만이었지만, 현실에서의 움츠림은 실로 자신이 겁에 질렸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돼 버렸기 때문이었다. 상자를 덮고 있던 덮개가 연희의 앞으로 떨어졌다. 상자 내부는 윤이 넘쳤다. 구조는 간단했다. 2단으로 붉은색 쿠션이 들어가 있는 게 전부였다. 상자 안에는 언제 현상을 한 지 모를 사진 한 장과 흰색의 종이봉투가 들어 있었다. 싸구려 액자 하나 없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사진 한 장, 사진은 변색이 심했다. 또한 사진은 왠지 모를 무거운 분위기를 풍겨댔는데, 보는 이에게 시험을 건네는 것 같았다. 자신을 보고도 버텨 낼 의지가 있느냐고. 연희의 손에 찾아온 떨림은 사라질 줄 몰랐다. 그리고 사진에 걸쳐 놓은 연희의 눈망울엔 어느새 애달픔이 가득 맺혀 있었다.


“이딴 걸 남기지나 말지…”


연희의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그녀의 옷 위로 떨어졌다. 애상을 주무르는 시간은 체력의 배를 요구해 왔지만, 연희는 주저하지 않았다. 오히려 연희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태도로 나서서 그러한 옥죄임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대가는 이내 연희를 찾아왔다. 당장에 숨이 멎을 것 같은 극심한 두통, 머리에 쥐가 낫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앓는 소리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한 채 연희는 몸을 차가운 바닥 위로 굴렸다. 얇은 옷을 두르고 있는 그녀의 몸속으로 바닥의 냉기가 밀고 들어왔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아.”


바닥에 머리를 붙이고서 고통에 몸부림치던 연희는 몸을 일으키려 발버둥 쳤다. 연희는 머리를 꽁꽁 싸맨 모습 그대로 몸을 거의 끄집다시피 하여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의 불이 들어오고, 염려 섞인 눈으로 거울 속의 모습을 확인한 연희는 말없이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거울 속 여인은 잔뜩 산발이 된 모습으로 연희를 바라봤다. 산발인 와중에 보이는 눈물과 눈물에 섞인 몇몇 머리카락들이 여인의 얼굴에 추하게 엉키어 그녀의 슬픔을 더욱 배가시켰다. 연희는 손을 길게 뻗어 물을 틀었다.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세면대로 차가운 물이 고여 갔다. 물소리를 들으며 연희는 다시 고개를 들어 거울 속 여인과 눈을 맞추었다. 세면대에 어느 정도 물이 고여 찰랑거림을 보이자, 연희는 수도를 잠갔다. 연희의 얼굴 옆으로 공기 방울이 하나씩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다시, 또다시. 욕실 사방이 온통 물로 얼룩지고, 물이 고여 있던 세면대가 바닥을 나타낼 때까지 연희의 고갯짓은 계속되었고, 그녀는 그를 마다하지 않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