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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Aug 31. 2024

어때요, 그런 인생은.

‘지잉…, 지잉…, 지잉….


연거푸 울려대는 진동 소리. 가현이 입을 벌려 옅은 한탄을 뱉어내고는 핸드백 속 깊숙이 손을 밀어 넣으며 말을 쏟아 냈다.


“와, 오늘 무슨 날이야? 평소 집착의 거의 두 배인데?”


화면 위에 떠올라 있는 두 글자.


‘집사.’


저 글자가 떠올라 있을 거란 것은 전화를 꺼내기 이전서부터 가현은 알고 있었다. 때문에, 지금 그녀가 전화를 꺼내든 행위는 확인의 느낌보다 후퇴와 같은 모종의 전략적 느낌이었다.


“응, 나야.”


전화를 받은 가현은 잔뜩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대답은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다른 일을 보다, 들리지 않는 연결음에 잠시 손을 떼어 낸 듯한 짤막한 정적. 그 같은 시간이 얼마간 흐르고, 곧이어 반가움이 잔뜩 칠해져 있는 한 여인의 목소리가 스피커 밖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연희였다.


“어머, 아가씨? 지금 제 전화를 받아주신 거예요? 세상에. 이거 뜻밖의 일이라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왠지 모를 찝찝함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명랑한 목소리로 뱉어내는 개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 왜일까.”


“호호.”


“그래서 용건은?”


“아, 다름이 아니라, 혹시 지난번에 얘기 나눴던 가족여행 이야기를 기억하고 계실까요?”


“어.”


덤덤함과 초조함, 그 중간쯤에 있는 목소리로 가현은 대답했다.


“그 얘기를 할 예정이라면 부디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번만큼은 어려울 것 같아요.”


“그래? 쥐구멍은 어쨌냔 소리를 대차게 꺼내 들 참이었는데.”


말을 마친 가현은 발뒤축을 모래 위로 힘 있게 떨어뜨렸다. 타격을 입고도 크게 티 내지 못하는 꽁꽁 언 모래알들이 작금 가현이 느끼고 있는 심정, 그와 같았다.


“들을 건 들어야겠지. 내가 알아야 할 소식이 뭔데?”


“요점만 추려 말을 해 드리자면, 조만간 아가씨에게로 여행 전담 가이드 하나가 붙여질 거예요.”


“가이드? 그건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닌데? 어차피 집안사람 중 한 명일 거 아냐.”


“원래라면 그랬을 테지만…”


가현은 연희의 말을 끊었다.


“뭐야, 외부 사람이 온단 뜻이야?”


“네. 일이 이렇게 빠르게 진행될 정도면 누군가의 입김이 닿았다고 보는 게 맞겠죠. 아무튼 좋지 못한 상황이에요.”


그를 들은 가현은 말을 이었다.


“어느 쪽이든 나를 위한 일일 리는 없을 거야. 이젠 하루빨리 그 사람의 정보를 구해야 해. 정보 우위가 중요한 시점이야.”


“음, 저들이 드러나길 자처하지 않는 이상, 저희가 그걸 찾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기본이라도 안다면 모를까, 그 사람이 어디에서 오는지, 출처조차 알지 못하잖아요?”


‘…’


둘의 대화가 잠시 붕 떠오른 그 순간, 발소리를 짊어진 모래 소리가 낮게 깔려와 가현의 머리카락을 들썩 들어 올렸다.


“늦어요.”


바람이 부는 곳으로 몸을 돌린 가현은 어둠 속 거뭇한 그림자를 향해 말했다.


“아, 홀더를 뒤늦게 챙기느라…, 뜨거우니 조심히 받아요.”


바람과 함께 나타난 기성이 말했다. 하나, 둘, 총 두 개의 굴뚝서 피어나던 온기는 서로가 멀게 느껴질 만큼 따로 나누어 멀어졌고, 개인이 된 그들은 이제 각자의 길이 난 곳으로 온기를 피워 올렸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커피를 건네받은 가현은 기성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모래 속에 빠진 전화가 얼굴 위로 테이핑이 된 사람처럼 윙윙거리며 그녀의 발목에 진동을 쏘아댔지만, 가현은 침착히 그를 외면한 채 대화에 집중했다. 그리고 텅 빈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던 기성이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가현을 향해 말했다.


“아까 제게 말했던 그대로네요. 겨울 바다는 조용하고 쓸쓸하다 못해, 생각 없이 보고 있다간 저리로 딸려 내려갈 것만 같아요.”


“말로 느끼는 것과 직접 경험해 보는 건 또 다르죠. 그래도 어때요, 파도 소리만큼은 여전히 황홀케 들리지 않나요?”


“글쎄요. 바람이 요란한 존재라는 건 알 것도 같은데…”


잔뜩 찌푸린 얼굴로 대답을 건네오는 기성에 가현은 그의 얼굴을 똑같이 흉내 내며 말했다.


“김빠지네, 정말.”


“이것만 마시고 그만 일어납시다. 겨울 바다는 금방 질리네요.”


이후로 두 사람은 서로 말을 건네기보다 손에 들린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고, 넓은 모래사장은 어느새 둘만의 공간이 되어, 주변 냉기를 헤쳐 놓았다.


“저는 답답한 일이 있어도 이렇게 자유롭게 풀지 못해요.”


따뜻함에 절은 가현의 입이 기나긴 입김과 함께 말소리를 뿜어냈다.


“그런가요. 그쪽 인생은 제가 살아 보질 못해서, 어떤 종류의 답답함 속에 사는지 알 순 없지만, 답답하단 감정은 동류일 테니까.”


기성의 말에 가현은 그의 어깨를 가벼이 밀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제 저는 어디로 끌려가게 되는 건가요?”


“아, 정말! 억지로 안 끌고 간다니까 그러네.”


가현이 눈을 부릅뜨고서 소리쳤다.


“단지…”


“제가 그쪽 가는 길에 동행 한번 해 주었으니, 그쪽도 저 가는 곳에 한 번쯤 같이 가 주는 게 예의이지 않나 하는 거지.”


“이거 봐. 맞잖아.”


“간다는 거죠? 좋아요. 약속은 오후 1시에나 있어요. 보자, 지금이…”


가현이 시계로 눈을 가져가자, 기성은 전화의 화면을 밝혔다.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새벽 열차를 고집해 타고 내려왔다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겠군요?”


“눈치가 좋네요.”


“그거 하나로 벌어먹어 온 인생이라.”


“어때요, 그런 인생은?”


가현의 말을 들은 기성이 입안 가득 뾰족한 돌멩이를 머금은 듯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짧게 답했다.


“지옥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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