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방.’
가현은 귓가로 들리는 물소리에 고개를 숙였다.
“뭔 놈의 바닥에 물이 이렇게 많아. 편히 서 있질 못하겠네.”
가현은 투덜대며 물이 묻지도 않은 바지의 자락을 연신 앞뒤로 뒤흔들었다. 그리고 이내 앉는 것을 포기한 듯 최대한 물이 없는 자리로 가, 팔짱을 끼고서 혼잣말을 시작했다.
“학벌이 아쉽네. 그래도 뭐, 일단은 미뤄놓기로 하고. 지금은 여지를 만드는 게 급선무니까…”
열차 칸에서 도망쳐 나온 가현이 골머리를 앓고 있는 찰나, 기성이 들었던 기관사의 음성이 화장실 안의 스피커를 통해서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안내 음성이 끝날 때까지 그저 그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가현은 그 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한층 다급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도 안 따라 주네. 오늘은 참, 뭔가 잘 안 풀린다.”
가현은 곧바로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꺼내든 휴대전화를 가현은 빠르게 눌러댔고, 곧 휴대전화의 신호음이 좁은 화장실 안을 가득 메웠다.
“예, 아가씨. 도착하셨어요?”
통화 연결음이 세 번은 채 울렸을까, 전화 너머로 나이 든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아직 가는 중이야. 그보다 내 얘기 좀 들어봐.”
“말씀하세요.”
“열차에서 만난 사람인데, 이 사람 느낌이 좋아.”
“열차요? 이번엔 터무니도 없는 곳에서 찾으셨네요. 그 사람은 운도 좋군요.”
“아직 못 물어봤어.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계산이 서질 않네.”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에요?”
“어렵냐고? 처음 본 사람인데 당연히 어렵지!”
“그냥 평소처럼 나가 보시지 그러셨어요. 그래서, 직업이 뭐라던 가요?”
“몰라.”
“…아직 거기까지도 못 가셨어요? 근데 아가씨, 혹시 지금 어디 안에 계세요? 아까부터 아가씨의 목소리가 무척 울리는데.”
노인의 말에 가현은 물 묻은 신발을 변기에 탁탁 부딪히며 대답했다.
“화장실 안이야. 열차에서 몰래 전화를 할 만한 곳이 여기밖에 더 있어?”
“일단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넌지시 한 번 던져 보세요. 자신은 이러이러한 사람이고, 이런저런 이유로 지금 마땅한 사람을 찾고 있다…”
“갑자기 그러면 나를 미친년 취급하지 않을까? 그래도 그게 제일 나아 보이긴 하다. 큰일 났네, 이제 곧 도착인데.”
“그리고 누차 말씀드리지만, 아가씨가 갑인 입장이에요. 행여 낮추시거나 하실 필요가 전혀 없는 거예요. 아셨죠?”
“그래, 끊어야겠어.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전화를 끊은 가현은 꺼낸 휴대전화를 집어넣으려 가방을 연 그 순간, 입에서 외마디 탄성을 내보냈다.
“아.”
소리를 낸 가현은 가방 입구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화장지 곽을 손가락으로 건져 들며 말을 이었다.
“이를 어쩐다.”
가현은 당장에 셋의 선택지가 떠올랐다. 입구를 뜯어서 사용한 흔적을 만드는 것과 화장실에 화장지가 있더라는 말과 함께 있는 그대로를 돌려주는 것. 그리고 마지막. 아예 다 써 버렸다고 말해 버리는 것. 가현은 마지막 생각에서 말을 뱉어냈다.
“괜찮겠는데? 괜히 미안하단 명목으로 들러붙을 수도 있고 말이야. 자기로서는 도리가 없지. 내가 미안하다는데? 내가 미안해 죽겠다는데?”
말이 튀어나오면 튀어나올수록 점점 사악한 얼굴로 변해 갔다.
“확실히 해 두는 편이 좋겠지.”
말을 마친 가현은 문을 열고 나와, 화장실 입구 옆에 놓인 쓰레기통 속으로 화장지 곽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
“좋아.”
가현의 구두 소리가 조용히 가라앉은 열차 내부를 울렸다. 자리에 기대어 자고 있던 사람 개중의 몇몇은 ‘애써 이루어 놓은 적막을 시끄럽게 휘젓는 장본인이 바로 너구나.’하는 눈으로 가현을 한 번씩 흘겨보았다.
“덕분에 살았어요, 감사해요.”
자리로 온 가현은 기성을 보며 말했다. 눈이 감겨 있는 걸 보았지만, 가현은 그대로 밀고 나갔다.
“아뇨. 별말씀을요.”
말을 들은 기성이 별것 아니란 표정으로 대답했다. 기성의 말을 들은 가현은 준비했던 것을 시작했다. 무슨 할 말이 있는 것처럼, 혹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가현은 애매한 표정을 순식간에 만들어 내걸었다. 가현은 자리에 들어가 앉지 않고, 기성의 옆을 서성거렸다. 그를 본 기성은 멸시하는 듯한 눈으로 가현을 쳐다봤다. 가현은 느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전화 너머의 조언 따윈 이미 잊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눈은 아래쪽에서 교차했다. 난처하단 듯 꼼지락거리는 가현의 손, 그 근방이었다.
“죄송한데, 의중을 모르겠어요.”
그곳에 눈이 닿은 기성은 가현을 향해 말했다.
“그게 저, 그, 제가 화장지를…”
가현은 처음 모습 때의 표독스러움은 모조리 뺀 채로 어눌함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그리고 기성의 소리가 이어졌다. 전형적인 반사적 대꾸였다. 가현의 손은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가현은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것은 힘들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됐어요. 역에 도착하면, 나가시는 길에 같이 나가요. 하나 새로 사 드릴게요.”
가현의 말을 들은 기성의 어깨가 크게 움찔거렸다. 가현의 위축된 모습과는 달리, 분명한 말소리가 뿜어져 나옴에 오싹함을 느낀 듯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기성이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정말로요.”
“아뇨! 사 드릴게요. 제가 남한테 빚지곤 못 사는 성격이라 그래요. 그쪽 때문이 아니라, 제가 편하려고.”
가현의 단호함에 기성은 또 한 번 당황한 얼굴을 보였지만, 처음 표정과는 조금 달랐다. 가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어차피 나가는 길은 같잖아요, 안 그래요?”
“그러고 보니, 아까 자리를 비운 사이에 곧 도착한다고…”
“저도 들었어요. 화장실 안에도 스피커가 있어서. 그럼, 저희도 슬슬 내릴 준비 할까요?”
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깨에 덮여 있던 무스탕에 팔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기성은 눈을 감았다. 가현은 그 모습을 보았지만, 그저 생각을 정리하는 거겠거니, 하는 얼굴이었다. 가현은 기성이 눈을 뜰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기성이 몇 초 지나지 않아 눈을 떴다. 가현은 눈이 마주친 기성을 향해 ‘나가라, 앞장서라.’라는 말이 담긴 눈빛을 손짓과 함께 쏘았고, 그를 본 기성 또한 가현을 향해 작게 입을 벙긋거리고서는 출입문 쪽으로 걸음을 내밟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고, 조금 전 가현의 전화가 울렸던 화장실이 있는 곳, 열차의 칸과 칸을 구분 짓는 그 경계의 공간이 둘의 앞으로 나타났다. 3평 남짓한 공간은 비좁음과 동시에 매캐한 공기로 가득 차 있는 곳이었지만, 승객의 편의를 위한 장치들이 놓여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도 했다. 가격이 비싸지만, 여행에 필요한 품목들이 많았다. 자판기, 앉을 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접이식 좌석 두어 개, 충전 포트, 분리수거가 가능한 쓰레기통 등등. 보통 때 같으면, 양쪽에서 뛰쳐나온 사람들로 디딜 틈 하나 없는 혼돈의 장소였을 테지만, 열차가 새벽 열차였기에 그렇지 않았다. 기성과 가현 둘은 벽 하나씩을 차지하고서 몸을 기댔다. 그리고 꿀 같은 정적도 잠시, 귀를 도려낼 것 같은 날 선 파열음이 열차 내부로 강하게 파고들어 왔다. 그 거북한 소리는 열차가 완전히 멈추어 설 때까지 계속되었다.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출입문이 열리고, 바로 앞에 서 있던 기성이 먼저 발판을 밟으며 열차를 빠져나왔다. 열차에서 내린 기성은 또다시 눈을 감았다. 기성의 손가락이 바삐 움직였다. 엄지, 검지, 중지, 약지. 딱 네 손가락이었다. 입 모양을 자세히 보면 보였다.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기성은 꽤 길게 눈을 감고 있었다. 가현은 그를 보지 못했다.
“문 너머가 밝은 게, 장사하는 데가 있나 본데요?”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린 가현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음, 문 열 준비를 하는 곳들이 아닐까 싶은데…”
기성의 말에 가현이 소매를 걷고서 숨어 있던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가현의 작은 모습도 눈여겨보고 있던 기성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렇게나 알이 자그마한데, 바늘이 눈에 보이나?’
“아, 그런 걸 수도 있겠네요. 벌써 6시가 다 됐네.”
“보면 알겠죠. 일단 나가 봐요.”
기성은 앞장서며 말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린 그들이 광장으로 빠져나가는 길은 한눈에 봐도 넓게 트여 있었다. 가까이서 보면 광장은 문 너머의 넓은 지역과 역할 분담을 확실시 구분 지어 놓은 장소처럼 보였지만, 멀리서 보면 이곳 역시 광장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완전히 떨어져 본다고 그러면 이렇다 할 설비 없이 방치해 놓은 이유가 궁금해지는, 그런 장소였다. 길을 따라, 두 사람은 그 같은 광장으로 통하는 문에 다다랐다. 앞장서 있던 가현이 커다란 출입문을 밀어젖히며 나지막이 투정의 목소리를 뱉어냈다.
“손 하나 걸쳐 줘도 괜찮은데.”
가현의 칭얼거림을 들은 기성은 오히려 가현의 등 뒤로부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썩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참나.”
그를 본 가현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문을 활짝 열어젖혔고, 뒤에 서서 미소를 머금고 있던 기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총총 문을 통과했다. 문을 지나, 광장에 첫발을 내디딘 기성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가현을 향해 들으라는 듯이 목소리를 냈다.
“음, 여길 다 돌아보는 건 좀 그렇고…”
기성의 말에 가현이 조금 전에 지어 보였던 표정을 다시금 꺼내 들며 딱 잘라 대답했다.
“다 돌자고 한 적 없거든요.”
“나가는 길에도 양옆으로 가게들이 많이 있으니, 일단은 나가는 길로 따라 나가 보죠.”
그리고 기성은 끝난 말에 한마디를 덧댔다.
“가는 길에도 없으면, 그때는 정말 바로 가셔야 해요.”
“알겠어요, 알겠어. 어지간히도 성가신 모양이에요?”
“네? 뭐라고요?”
“저 말이에요, 저. 빨리 바다나 보러 가고 싶은데, 맞죠?”
“아뇨. 그렇다기보다는 제가 괜히 사람 발목 붙들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전혀! 전혀요. 하나 있는 일정도 오후가 지나서야 있고, 무엇보다 지금 바쁜 사람 발목 잡은 건 저잖아요?”
기성은 토씨 하나 붙이지 않았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수긍의 표시를 보였다. 그 모습에 가현은 더욱 약이 오른 듯했다.
“그나저나 역이 조용해서 사람이 별로 없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네요.”
가현이 1층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겨 가며, 광장 의자에 빼곡히 앉아 있는 사람들을 넌지시 언급했다.
“그러게요. 제가 열차에 올랐던 서울도 딱 저랬어요. 놓인 의자마다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자리에 앉아 있더라고요.”
“딱히 갈 곳도 없을 것이고, 이 추위에, 밖에 있다간 얼어 죽을 테니, 저 사람들에게 있어선 저게 최선일 거예요.”
기성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밖으론 다르게 말했다.
“하긴. 저기 있는 대부분은 죽은 듯이 앉아 있는 게 전부인 사람들이라, 육안으로 보이는 거 말곤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는 일은 없으니까요.”
“어? 저희 나가는 길로 바로 내려온 모양이에요.”
가현이 말했다.
“그래요? 어쩔 수 없죠. 여기서 헤어지는 수밖에.”
“뭐죠? 이 눈 뜨고 코 베인 것 같은 기분은?”
“기분 탓이에요.”
가현의 분한 얼굴. 기성의 홀가분한 얼굴. 둘의 대비되는 얼굴이 느리게 역의 출구를 쓸며 지나갔다. 밖은 여전히 어둠으로 덮여 있었고, 차디찬 겨울바람이 주변을 마음껏 향유하는 중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날씨에 대적할 겨울의 태양은 아직 떠오르기까지에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해 보였다.
“공사가 한창이네요? 전에 왔을 때는 분수도 있고, 여기에서 저 건너까지도 다 보였었는데.”
바깥 풍경을 훑어보던 기성이 말했다.
“그래요? 저는 성인 된 이후로 처음 와 보는 거라.”
대답한 가현은 제자리에 우뚝 걸음을 멈추어 섰다. 그런 가현을 보지 못한 기성은 계속해 앞으로 나아갔고, 뒤편에 홀로 남겨진 가현은 생각을 정리하듯 고개를 숙였다. 기성이 뱉은 작별의 말이 시작인 듯했다. 가현의 얼굴로 이내 뒤틀림이 찾아왔다. 천연덕스러움을 유지하던 그녀의 미간으로 잔주름들이 한가득 솟구쳐 올라왔고, 갈 곳을 잃은 가현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이리 헤매고 저리 헤맸다. 그리고 그사이, 기성은 이미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어!?”
뒤늦게 그를 발견한 가현이 괴성을 내지르며 기성을 향해 달려왔다. 그런 가현을 본 기성은 재미있다는 듯, 입가로 오묘한 웃음을 지으며, 뒤에 있는 가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참, 이상하단 말이에요.”
“네?”
“제가 볼 때, 그쪽은 저를 계속 따라왔을 것 같거든요. 제 말은, 이유를 불문하고 말이에요.”
나긋나긋한 말투로 말을 하는 것과는 달리, 달아오른 꼬챙이처럼 활활 타오르는 두 눈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기성에 가현은 두려움을 느낀 듯 차마 입을 쉽게 떼지 못했다. 계단 위에 서 있는 둘에게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묘한 적막을 흩쳐 내며 제일 먼저 안으로 들어온 것은 한숨 섞인 기성의 목소리였다.
“흠. 저 나름으로는 체면 깎일 각오 하에 해 본 말이었는데, 반응을 보아하니 제가 아예 틀린 말을 한 건 아닌가 보군요.”
“날이 차요. 우선은 어디라도 들어가지 않을래요? 제가 억지로 어딜 끌고 가거나 하는 일은 없을 테니 그런 걱정은 마시고.”
가현은 지갑을 꺼내어 속에 있던 명함 하나를 기성에게 내밀었다. 기성은 가현의 명함엔 관심도 없다는 것처럼 눈길을 조금도 주지 않았다. 기성은 가현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이런 분위기를 만들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가현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일단은 밝은 곳으로 나가죠. 여기는 어두워서 그쪽이 짓고 있는 표정이 잘 보이지 않거든요.”
공사 현장을 빙 둘러서 외각에 임시로 만들어 놓은 길은 비좁게 뚫려 있었다. 한 명이 지나기에는 충분한 너비로 보일 수도 있었으나, 두 명의 사람이 나란히 길을 지나가기엔 그곳은 퍽 비좁았다.
“더럽게 음침하네. 가로등 하나 심는 게 그리도 어렵나?”
주변을 보던 가현이 씩씩대며 불만의 말을 뱉어냈다.
“그러게요. 많이 어둡네요. 잘못하면 넘어질 수도 있겠는걸요.”
통로의 길바닥은 떨어진 낙엽과 담배꽁초들로 즐비했다. 폐쇄에 가까운 길인만큼, 이곳을 거니는 흡연자들에겐 일말의 가책 없이 담배를 내던질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인 셈이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많아지는 낙엽, 그리고 그들 사이로 보이는 수많은 담배꽁초. 발에 부닥치는 그들을 강하게 짓밟으며 불쾌감 가득한 얼굴로 걸음을 내밟던 가현이 옆에 있는 기성을 보며 물었다.
“그쪽도 담배 피워요?”
“아뇨. 한 번도 안 피워 봤어요.”
“딱 생기신 대로 살고 계시네요.”
“그 말 그대로 돌려 드릴게요.”
“아, 무슨 소리. 연기 근처에도 안 가는 사람이에요.”
“그래요? 사람이 꼭 생긴 대로 사는 건 아닌 모양인데요.”
말라비틀어진 담배꽁초를 보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가현이 고개를 쳐들고서 따지듯이 기성을 향해 언성을 높였다.
“왜?! 술도 퍼마실 것 같이 생겼다는 말도 하지 그래요?”
“대신 말을 해 주시니 수고를 더네요.”
“아! 진짜!!”
가현이 입술을 실룩이며 이어서 말했다.
“근데 그건 맞아요. 저 술은 좋아해요. 술 좋아해요?”
“집에 가는 길에 편의점 맥주 한 캔 정도.”
“소주도 아니고, 남성미가 너무 없는 거 아니에요?”
“말마따나 생긴 대로 사는 건데요, 뭐.”
기성과 가현이 그렇게 서로 말을 나눠 갖는 사이, 갖가지 조명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하나의 광채가 길목의 나가는 길을 밝게 비추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통로를 먼저 빠져나온 기성은 뒤돌며 이제 나오려는 가현을 향해 말을 건넸다.
“어떻게, 이젠 무서움이 좀 가셨어요?”
“무섭다고 한 적 없어요. 음침하다고 했지.”
“아, 저기 편의점 하나 보이네요.”
기성이 손끝으로 길 건너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행이다. 시간 낭비한 게 아니라, 그렇죠?”
해맑게 말하는 가현에 기성은 속으로 대답했다.
‘글쎄. 그건 못다 한 말들을 나눠 봐야 알겠지.’
신호가 초록 불로 바뀌고 둘은 잰걸음으로 길을 건넜다. 그들이 건너는 길의 가편에는 택시들이 길게 줄을 지어 서 있었는데, 차량 모두가 불을 꺼뜨린 채로 자리에 정차되어 있었다. 본인들을 찾는 손님들이 올 때까지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것을 택한 사람들. 개중에는 운전석을 침대 삼아 부족한 잠을 청하는 이들도 있었고, 서로의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위해 인근 길가로 삼삼오오 뭉쳐 있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얼굴은 서로를 향하고 있지만, 시선은 길을 건너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기성과 가현에게도 여러 시선이 있었다. 길을 건너는 둘에게서 유독 눈을 떼지 못하던 한 명의 운전사는 두 사람이 곧장 편의점으로 들어서자, 한숨을 길게 뱉어냈다.
“어서 오세요.”
앳된 얼굴의 종업원이 종소리와 함께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하세요.”
“화장지는 어느 쪽에 있어요? 혹시 여행용도 있나요?”
기성의 뒤쪽에 서 있던 가현이 종업원을 보며 물었다.
“휴대용을 찾으시는 거라면 창가 옆쪽을 한번 보시겠어요?”
종업원이 능숙한 말로 가현에게 안내의 손짓을 보였다. 종업원의 그 같은 모습을 본 기성은 그 사람이 근무한 지가 못하여도 석 달은 넘었을 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배가 고픈데…, 혹시 배 안 고파요? 저는 뭐라도 좀 먹어야겠어요. 골라요. 사는 김에 같이 살 테니.”
“아, 그럼.”
“많이 집으셔도 되는데.”
“나올 때 밥을 먹고 나와서요.”
기성이 카운터 근처에 있는 허름한 빵 하나를 집어 들자, 가현도 뒤따라 그와 같은 것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기성은 텁텁한 마음이 들어, 가현에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아, 혹시 허기가 많이 지시면, 아예 밥집을 갈까요?”
“됐어요. 부족하면 다른 걸 더 먹죠, 뭐.”
“그래요.”
대답한 기성은 가현의 손에 들린 빵조각 위로 자신의 것을 포개어 얹으며 계산대 쪽을 향해 고갯짓했다.
“그럼, 저쪽에 앉아 있어요. 아! 이것도 좀 부탁해요.”
가현이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핸드백을 기성에게 들이밀며 말했다. 기성은 얌전한 얼굴로 핸드백을 건네받은 뒤, 캐리어 손잡이를 길게 빼내어 끈을 집어넣었다. 그리곤 발길을 돌려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깨끗하네.”
기성은 캐리어를 의자 옆에 세우며 말했다. 편의점 내부에 자리한 식사 공간은 단출하게 꾸며져 있었다. 플라스틱 의자 네댓과 벽에 부착된 기다란 선반 하나. 그러나, 고개를 들어 올리면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역의 전경 하나만큼은 일품이었기에, 운치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최고의 자리였다. 계산을 마친 가현이 자리에 앉아 있는 기성의 옆자리에 몸을 앉혔다. 기성은 가현에게 말했다.
“열차역 주변이라 새벽에 문을 연 음식점도 많을 텐데, 한번 찾아나 볼 걸 그랬나 봐요.”
“괜찮아요. 조용하니 좋은데요, 뭘.”
“그러면 다행이지만…”
기성은 그제야 명함을 꺼내어 봤다. 그리고 그런 기성을 눈치챈 가현이 비아냥거렸다.
“사람 참! 왜, 명함이 있으니까 이상한 사람 같지 않아요? 아까는 아주 정신 나간 사람 대하듯이 굴더니?”
비꼼 가득한 가현의 말에 기성은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중 아니고, 저 하나예요. 한 명.”
명함에 눈이 꽂힌 기성을 향해 가현이 말했다.
“네?”
“외동딸이에요. 여기 적힌 건설회사 이름쯤은 들어 봤을 거 아니에요.”
“회장 딸이라고요?”
“됐고, 전처럼 대해 줘요. 그런 불편한 얼굴들은 이미 지겹도록 보면서 커 왔기 때문에.”
기성은 머리에 손을 얹었다. 기성은 손에 든 명함을 다시 읽으며 가현에게 말했다.
“…으음.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그러니까 그쪽이 기업가 딸이고, 그러니까 제가 지금 그 기업의 외동딸이랑 편의점에 있는 건가요?”
“네, 맞아요.”
가현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