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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Aug 26. 2024

가출 청소년

‘또각, 또각, 탁.’


가까운 곳에서 피어난 구두 소리. 정확히 세 번으로 나뉘어 울린 소리는 처음과 끝이 또렷했다. 기성은 눈을 떴다.


“옆에 좀 치워 주실래요?”


말을 건넨 사람은 기성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곧은 상체와 다물린 입술, 누구 앞에서도 흐트러진 경우가 없을 것 같은 아주 단단해 보이는 외관.


“아, 죄송합니다. 금방 치워 드릴게요.”


짧은 시간에 기성은 많은 대답을 떠올렸지만, 결국 입 밖을 제일 먼저 차고 나온 것은 사과의 말이었다.


“자리 찾는 걸 헤매셨나 봐요.”


“잠드셨나 보네요.”


“아?”


허공에 놓여 있던 여자의 시선이 기성을 향해 움직였다.


“다 치웠으면 빨리 비키기나 할 것이지.”


“뭐라고요?”


기성의 표정이 일순간 돌변하자, 여자는 놀란 듯 걸음을 한 걸음 뒤로 물렸다. 기성은 그 찰나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기세에 힘입어 다음 말로써 그녀를 위압했다.


“이봐요.”


그를 끊는 건 여자의 한숨이었다.


“하…”


그리고 한숨을 내뱉은 여자는 자신의 한숨이 채 날아가기도 전에 뒷말을 이어 붙였다.


“미안해요. 제가 오늘 너무 지쳐 있어서. 진심이 아니었어요. 무척 힘든 날이었거든요.”


기성은 질색하며 말했다.


“그러지 마요. 사람 무섭게.”


여자는 들고 있던 짐을 머리에 올렸다.


“도와줄게요.”


“괜찮아요. 별로 안 무거워요.”


그리고 둘은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출장 가세요?”


자리에 앉은 여자가 기성에게 말을 건넸다.


“그 말, 오늘 두 번 듣네요. 그냥 놀러 가는 길이에요.”


“어디 가시는데요?”


“해운대요. 아는 바다가 거기뿐이라.”


기성의 말을 들은 여자는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오, 겨울 바다. 매혹적인 단어죠.”


“경험이 있으신가 봐요?”


“후기 들려 드릴까요?”


“아니요, 됐어요.”


“저는 가현이에요.”


여자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에 기성은 생각했다. 웬 통성명.


“아, 저는 기성이라고 합니다.”


가현의 인사에 기성은 주머니에 넣어 있던 손을 바지에 닦은 다음, 그녀를 향해 내밀었다.


“버릇이에요. 처음 보는 사람 이름 따는 거.”


“그렇군요.”


그리고 둘 사이의 정적은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등에 박힌 태엽이 힘을 다한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들 주변부로 달궈지던 공기는 금세 차갑게 식어 갔다. 그렇게 기성과 여자의 서로를 향한 흥미는 다시 자신들을 향해 조용히 걷혀 갔다. 열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차가 조금씩 움직이자, 내부의 부산스럽던 분위기가 한층 내려앉았고, 승객들은 각자의 시간으로 녹아 들어갔다. 기성과 여자의 앞좌석에는 노년의 부부 한 쌍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에게선 좀처럼 보기 드문 행동 하나를 엿볼 수가 있었다. 노부부는 공통적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었다. 들리는 대화가 그랬다. 자기 자신이 아닌 상대의 죽음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 즉, 죽음보다는 혼자 남겨진 여생에 대한 걱정이 더 큰 사람들. 그들 부부는 그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열차 내로 정적이 찾아오는 것과 동시에 백발의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남편은 옆에 있는 아내의 얼굴 가까이 얼굴을 밀착시켰고, 부인이 내쉬는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노부인은 눈을 감고 있었다. 확인. 그것이 그들이 정한 수칙이었다. 부인의 생사 확인을 마친 남편이 옆으로 기울인 몸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렸다. 이어선 부인이 그와 똑같이 행동했다. 늙음이다. 그리고 이어서, 열차 칸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역무원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적당한 몸집을 가진 남자 직원이었다. 정갈하게 차려입은 옷도 옷이지만, 그의 차림새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빳빳한 챙이 달린 모자였다. 남자의 날렵한 눈매와 모자챙이 손을 잡고 드리우는 그림자의 모습은 그야말로 근엄한 역무원의 표상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열렸던 문이 닫히자, 직원은 승객들에게 가벼운 묵례로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마친 직원은 허리춤에서 손바닥만 한 단말 장치를 뽑아 들고서, 성큼성큼 통로 사이를 걷기 시작했다. 그의 딱딱한 구두 굽과 통로의 바닥이 부딪혀 묵직한 마찰음을 일으켰다.


‘뚜벅뚜벅.’


‘…’


‘뚜벅뚜벅.’


‘…’


직원은 특유의 리드미컬한 발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그가 발소리를 낸다는 것은 확인 작업을 마친 그가 다음 사람을 향해 이동 중이란 의미였고, 그의 발소리가 멈췄다는 것은 자리에 앉은 사람에 관한 확인 작업이 진행 중이란 의미였다. 직원의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외각 자리에 앉아 있는 가현의 고개가 그를 향해 돌아가는 일이 빈번해졌다. 기성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아는 사람이에요?”


“아뇨.”


“역무원을 쳐다보는 것 같아서 여쭤봤어요.”


“그게 아니라, 저…”


가현이 하려던 말을 끝맺음 짓지 못한 그때, 어느 틈에 직원은 가현의 옆에 바짝 다가와 서 있었다.


“손님. 죄송합니다만, 열차표 확인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직원이 모자를 벗고, 가현에게 몸을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직원은 온화한 미소로 가현을 대하였지만, 목구멍을 타고 오르는 소리까지는 아직 완벽히 감추는 법을 터득지 못한 듯했다. 환한 미소와는 달리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목소리는 누가 봐도 화가 난, 떨떠름함을 머금은, 그런 말투였다.


“무, 무임승차는 아니에요. 자리만 좀 옮겼어요.”


가현이 직원에게 표를 내밀며 다급한 말투로 말했다.


“자리를 옮겨 앉으신 이유가 있으실까요?”


직원이 건네받은 열차표를 확인하고는 가현에게 물었다.


“네. 옆자리에 술 냄새 고약한 아저씨 한 분이 계시더라고요. 그리고 때마침 여기에 사람이 없는 것 같아서…”

그를 들은 직원이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연신 끄덕이더니, 지나온 자리를 뒤돌아보며 말하였다.


“알겠습니다. 도착지까지 비어 있는 자리니 계속 앉아 계셔도 됩니다.”


그리고 직원은 가현을 지나, 기성을 바라봤다.


“아! 감사합니다.”


가현이 말했다.


“그럼, 즐거운 여행 되시길.”


직원은 가현을 향해 가볍게 묵례를 한 후, 다음 사람을 향해 나아갔다. 그가 떠나고, 가현은 옆에서부터 불어오는 서늘한 공기를 받들어야 했다. 가현은 그 서늘함이 어디의 누군가로부터 불어오는 것인지를 안다는 눈치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가현의 목젖이 크게 꿀렁였다. 기성은 가현이 역무원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을 때부터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장면이 나타난 지금, 기성은 오직 가현을 향해 한 방의 조롱을 먹이는 것, 오직 그것 하나만을 생각하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가현은 기성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런 의중을 알아챈 듯 미소부터 슬며시 입가로 걸어 보였다.


“아, 일단 정말 미안해요.”


“그리고 오해 없으시라고 말씀드리는 건데, 저는 절대 일부러 시비 걸 생각으로 당신의 옆자리에 온 게 아니에요. 아까 들으셨겠지만, 정말로 옆 좌석에 취한 아저씨 한 분이 뻗어 계셨어요.”


“그렇군요.”


“네.”


“원래 자리가 어디예요?”


“설마하니, 쫓아낼 요량은 아니시겠죠?”


“맞는데요? 따라가서 그 아저씨도 흔들어 깨울 거예요.”


가현이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대화 내내 정색을 고수하던 기성도 가현이 웃어 보이자, 더는 굳은 얼굴을 하고 있을 이유가 없단 생각에 얼굴의 힘을 서서히 빼내었다.


“근데 아까의 말투는 뭐였던 거예요, 진짜로?”


“저도 모르겠다니까요, 정말로.”


“혹시 인격이 두 개이고 그런 거 아니에요? 지킬과 하이드처럼.”


“즉흥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에 기성은 어련하겠냐는 눈빛으로 가현을 노려보았다.


“근데 그쪽도 은근히 양면성 있는 성격인 거 알아요?”


“제가요? 살면서 그런 말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데요.”


“오늘 제가 본 것만 해도 여러 차례예요.”


“원래 능구렁이가 수명이 길어요.”


그에 가현이 말을 끊고 대뜸 기성을 향해 질문했다.


“오래 살고 싶어요?”


“아뇨. 저는 그다지. 짧고, 눅진하게 살다 가고 싶어요.”


가현이 그 말에 홀로 손뼉 치며 공감했다.


“눅진하단 표현 좋네요. 굵다고 하는 건 뭔가 투박스럽던데.”


“저는 항상 생각해 왔어요. 세상 딱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저 오래 산 사람이라고.”


“장수가 불행이란 뜻인가요?”


기성은 옅게 미소를 띠며 그에 대답했다.


“양날의 검 같은 거죠. 극과 극이 명확하잖아요.”


“이룬 사람과 못 이룬 사람의 시간은 천지 차이니까요.”


“이뤘다는 건 어떤 걸 말하는데요?”


“당연히 돈이죠. 사람, 명예 이런 것들은 돈만 있으면 자연히 따라붙는 부수적인 것들이니까.”


가현이 되물었다.


“그거의 반대는 어떻게 생각해요? 그 두 가지를 먼저 쟁취한 사람들이 돈을 얻는다?”


기성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서 대답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위태롭잖아요? 저는 유지를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생각하는 소유란 건, 좀 더 확실하고 명확한 것. 눈에 보이는 돈 같은 걸 말하는 거죠.”


가현은 잠시 멍한 눈으로 기성을 바라봤다.


“아까부터 정말 말하고픈 게 있는데, 해도 되나요?”


가현이 말했다.


“뭔데요?”


“조금 무례한 말일 수도 있는데 괜찮아요?”


“네.”


“바다에 가면 뛰어들 거 아니죠?”


“…”


“궁금했어요. 이 새벽에 간다니까, 눈도 몽롱해 보이시고.”


“너무한다.”


“아니, 자꾸 돈, 돈 하시니까. 그리고 보통 여행을 떠나도, 이사를 해도, 오전이랑 오후 시간에 가지. 밤에, 특히 이 새벽에 가진 않잖아요?”


“새벽 운치 즐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거 모독이에요.”


“그래요, 농담이었어요.”


“바닷바람이나 좀 쐬려고 가는 거니, 걱정하지 말아요.”


“부럽네요. 요즘 보기 드문 사람 같아요, 그쪽.”


그리고 가현은 한 템포 끊은 다음, 말을 마저 이었다.


“아까부터 무슨 취조하는 거 같아서 좀 그렇긴 한데, 혹시 나이가 어떻게 돼요?”


“스물다섯이요. 그쪽은요?”


“어머, 난 진짜 고등학생이 가출한 줄 알았어요. 되게 동안이네.”


“바다에 뛰어들 목적을 가진 몽롱한 얼굴의 가출 청소년으로 보셨군요.”


“저는 스물아홉이에요. 다음 달이면 서른.”


“그쪽은 출장 가시는 길이세요?”


“저요? 네. 아, 근데 꼭 그렇다고 하기는 좀 그러네요.”


“반반인 거군요.”


“거래처 사람을 만나려고 열차에 오른 건 맞는데, 그게 이미 마무리된 거나 마찬가지여서 저는 얼굴도장만 찍으면 되거든요.”


“어떤 일 하세요?”


“무역회사에 근무해요. 학교 졸업하고, 취직 안 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는데, 어느 날 아빠가 제게 출근하라 그러더군요.”


“부러운 소리네요.”


“뜬금없는 소린데, 혹시 화장지 있어요?”


“화장지요?”


가현이 슬쩍 바깥 통로로 다리를 비틀었다. 기성은 통로로 나가 캐리어를 내리고 주섬주섬 짐을 풀었다. 그를 보던 가현이 기성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미안해요. 오늘 제가 여러모로 폐를 많이 끼치네요.”


들쑤시던 기성은 대꾸 없이 캐리어에서 꺼낸 화장지를 가현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대답과 동시에 기성의 손에 들린 화장지를 낚아챈 가현은 순식간에 열차 칸을 잰걸음으로 빠져나갔다.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기성은 가현이 문 너머로 사라지자, 다시 자리에 몸을 뉘었다. 기성이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내부의 스피커에서 기관사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아. 우리 열차, 잠시 후 종착역에 도착하겠습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 열차를 찾아주신 여러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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