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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Aug 30. 2024

집사, 연희

‘똑똑똑.’


이제 막 떠오른 아침 해가 창가로 보일 무렵,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고요히 내려앉은 집 안 구석구석을 훑으며 지나갔다. 그 소리를 들은 가현은 몸을 일으키려 하였지만, 어젯밤 연거푸 부어댄 술의 취기가 그녀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아가씨, 들어갑니다.”


새하얗게 물든 머리, 이제는 주도권을 잃어버린 검은색의 머리카락들. 적잖은 세월을 지새워 온 것이 한눈에 봐도 보이는 노년의 부인 한 명이 가현의 침실로 들어왔다. 그녀의 이름은 연희.


“나 얼음물 한 잔만…”


가현은 말을 끝마치지 못한 채, 베개 위로 고꾸라졌다.


“정말이지 회장님이 계시지 않은 걸 불행 중 다행으로 아세요. 가져다드릴 테니, 그때까진 일어나 계셔야 합니다.”


말을 마친 연희는 다시 몸을 돌려 1층을 향해 내려갔다. 잔을 집어 들고서 뒤돌던 연희가 이내 멈칫하더니 손에 들린 잔을 싱크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놓인 잔을 보던 연희는 입 밖으로 냉랭한 말을 쏟아 냈다.


“이걸 아직도 안 치웠네. 새로 들인 작자…, 어째 어울리지 않는 윤기로 얼굴을 덮고 있다 했지.”


말을 끝마친 연희의 손이 놓인 잔을 향해 나아갔다. 조각이 난 채로 배수구로 흘러 들어가는 잔해들을 보며, 연희는 찻장에서 새로이 잔 하나를 꺼냈다. 새로이 꺼내든 잔은 입구가 좁고, 바닥이 깊은, 형태가 꼭 부리가 긴 새를 위해 만들어진 듯했다. 잔에 물과 얼음을 가득 담은 연희는 다시 2층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연희는 한 계단, 한 계단을 의식하여 힘주어 내디뎠고, 그녀의 그러한 발소리는 가현이 머무는 방까지 닿기에 충분했다. 여태 베갯잇에 머리를 박은 채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던 가현은 연희의 발소리에 몸을 뒤척이기 시작했다. 평소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사람이 감정을 내비친다는 것, 대개는 그 사람의 인내심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연희가 잔을 들고 돌아온 지금, 그녀의 눈앞으로 가현이 꼿꼿한 자세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일 것이다. 물을 손에 든 연희가 방 안으로 들어섰고, 순식간에 연희는 영문도 알지 못한 채 양 귀를 물어뜯겼다.


“연희! 일단 진정하고! 아무 말 말고 일단 들어! 내가 잘못한 게 맞아. 그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것도 맞고! 그렇지만 그중에 정말로 분명히 해야 할 게 있는데, 어젠 정말 반듯한 모습으로 들어왔어. 그게 중요한 거잖아, 안 그래?”


싸우자는 건지 화해를 하자는 건지, 연희의 낯빛은 붉은색과 흰색, 그 사이를 계속해서 오갔다. 가현은 쫑알대던 말소리를 그치고서 슬며시 연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이 뭐, 그렇다는 거야. 미안하다는 말이기도 하고.”


여전히 연희의 얼굴은 검붉었다. 그러나 지금의 말에 마음이 조금은 풀린 듯 연희는 손에 쥐고 있던 잔을 가현을 향해 말없이 내밀었다. 연희가 내민 잔을 가현은 한 손으로 받으며 말했다.


“고마워. 근데 어째 나보다 더 물을 마셔야 할 얼굴이야.”


“대체 어제 몇 시에 들어오신 거예요? 제가 어제 2시 넘게까지 깨어 있었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조금도 들리지 않던데요.”


“어제는 오랜만에 본 친구 하나가 껴 있어서 그랬어. 이해해. 그리고 그거 애정 과잉이야. 내가 애도 아니고.”


“어떻게 단 한 번을 일찍 들어오신 적이 없으니, 제가 이러는 거 아니겠습니까. 눈감아 드리는 것도 이젠 한계예요. 앞으로도 계속 이러시면 회장님께 다 일러바쳐 버릴 겁니다.”


그리고 연희는 흠칫거리며 말을 멈추더니, 이내 울분 가득한 얼굴로 돌변해 포문을 열었다.


“…그리고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말씀 좀 보태겠습니다.”


그리고 연희의 입 밖으로 삐져나오기 시작한 말들, 그녀가 말을 하면 할수록 드러나는 억울함. 대꾸를 집어넣을 빈틈 하나 보이지 않으며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연희의 입술을 보며 가현은 생각했다.


‘앵무새가 담긴 새장 앞에서 입을 잘못 놀려도 저렇게까지 지저귀지는 않을 거야.’


맘먹고 나선 연희의 입놀림은 실로 대단했다. 공적으로도 꼭 필요한 순간들을 제하면 입을 쉽게 열어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끔가다 볼 수 있는 연희의 이중성은 가현에겐 언제나 놀람의 소재가 되어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말을 토해내던 연희의 입이 풀린 찰나의 순간. 그 찰나의 간극을 호시탐탐 벼르고 있던 가현은 그를 놓칠세라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 참참! 내가 계속 물어본다는 게.”


가현의 갑작스러운 말에 연희는 미처 손쓸 새도 없이 자연스레 발언권을 빼앗겨 버렸다.


“뭐죠?”


“어, 누가 그러더라고. 꼰대 식구들 모아 놓은 비행기가 날릴 예정이라고. 서로 헐뜯던 작자들이 하루아침에 동행이라니 믿을 수가 있어야지.”


“아, 그거요. 그거라면 저도 얘기를 듣긴 들었어요. 근데 아가씨께서 크게 신경 쓰실 건 없겠다 싶은 것이, 거기 초대받은 인간들이 시골 한량들도 아니고 일정 조율서부터 막히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만약 저한테 가이드 명령이 내려왔다면, 전 아마 벽에 머리를 처박고 죽어 버렸을 거예요.”


“확실한 날짜만 알아낼 수 있다면, 개인플레이가 수월한데.”


가현의 그 말에 연희가 삐친 고양이처럼 빤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왜 그렇게 봐? 내가 내뺄 생각부터 해서? 거기에 가 봐야 뻔할 텐데, 그런 자리에 얌전히 따라가기를 당연하게 여기는 아빠의 태도부터가 역설 아닌가?”


“회장님께서 아가씨 혼자 빠지게끔 놔두지 않으실걸요.”


“절대 아니지. 그러니 어쭙잖은 준비로는 턱도 없을 거야.”


가현은 연희를 향해 눈을 치뜨며 말을 계속했다.


“알겠습니다. 그건 제가 알아보고 따로 연락드릴게요. 그럼, 그 일은 잠시 밀쳐 놓고서…, 아가씨. 아가씨가 집에 들어와서 이렇게 일찍 눈을 뜨신 게 얼마 만인지 모르시죠? 회장님께서 집에 새로운 요리사를 들이셨는데, 그이의 음식 솜씨가 어찌나 기가 막히는지.”


말을 하는 연희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래? 그럼 또 맛을 안 볼 수가 없지.”


“술을 드셨을 테니, 속 달랠 것으로 준비시켜 드릴까요?”


“좋아. 그럼, 정리만 좀 하고 내려갈게. 방금 나눈 얘기는 후에 다시 하자고.”


“알겠습니다. 그럼.”


연희가 나간 후, 홀로 남은 가현은 이마에 손을 얹더니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저도 얘기를 듣긴 들었어요? 변함없이 무서운 사람이라니까.”


가현은 이마에 얹은 손을 가만히 둔 채로 정리를 시작했다.


‘내가 물었을 때 ‘얘기를 들었다.’라고 답을 했지, 분명.’


‘그 말을 축으로 놓고 생각을 키워 나가면, 내 앞에서만 입을 싹 다물고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해. 연희는 나를 보내고 싶어 하는구나.’


‘이거 연희한테 미안해지는걸. 말은 저렇게 했지만, 난 이미 거기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찾아 놓았으니까.’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가만, 근데 나는 그 얘기를 누구에게 들어 알고 있는 거지?”


가현은 품속에 쥐고 있던 베개를 강하게 비틀어 젖히며 말했다. 의식의 안쪽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근본적인 의문. 그것을 떠올린 가현의 몸이 침대 옆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바닥에 벗어 놓은 구김 가득한 옷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가현의 몸 위로 빠르게 올라탔고, 뻗은 다리에 힘껏 밀쳐진 방문은 그녀가 곧장 아래로 뛰어 내려갈 수 있게끔 활짝 길을 열어 주었다. 막 해가 떠오른 저택의 분위기는 새벽녘의 고요함과는 정반대의, 요란함에 가까운 분주함을 보이는 중이었다. 자신의 어깨너비만 한 옷걸이들을 손에 들고서 바쁘게 오가는 사람, 금방 도착한 따끈따끈한 조간신문 여럿을 거실 테이블에 보기 좋게 정리하는 사람, 집이 떠들썩해진 그 틈에 눈치 있게 청소기를 돌리는 사람 등…, 그리고 한가운데에 서서 그들의 모습을 조용히 관망하고 있는 사람, 연희. 한마디의 말도 없이 팔짱을 끼고 있는 것이 고작인 그녀였지만, 움직이는 이의 모든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그녀의 허락하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연희는 그들의 중축에 서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고히 뿜어내고 있었다.


“오늘따라 집이 더 분주해 보이네?”


계단을 내려온 가현은 분주히 일하는 사람들에게로 자신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리듯이 높이 쳐든 목으로 말을 내던졌다. 그를 들은 연희가 제일 먼저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가현을 향하여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고개가 다시 위로 들리자, 그제야 나머지 사람들은 손에 들고 있는 물건들을 바닥에 내려놓고서 가현이 있는 쪽을 향해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그들의 태도를 관심 있는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던 가현은 생각했다.


‘아주 대놓고 찬밥 취급이구나. 대체 무슨 수로 사람을 구워삶아야 저런 인형 같은 형태로 모습이 굳어지는 걸까.’


가현이 거기서 생각을 한 발짝 더 내딛으려는 찰나, 절묘하게 정적이 깨지면서 연희가 몸을 앞으로 내밀고 나왔다.


“아니, 왜 이리도 급하게 내려오셨어요.”


“일이 생겨서 나가 봐야 할 것 같아. 밥은 다음에 먹을게.”


“옷이라도 갈아입고 나가시지, 여기저기 다 구겨져서는…”


“괜찮아. 이미 밖에서 자는 걸 일상이다시피 맛을 들여놓았기 때문에 여분의 옷 정도야 이미 차에 다 실려 있어.”


“호오, 그런 비밀이 있으셨군요. 제가 언제 봐서 차에 실린 옷가지들 한번 챙기러 가야겠습니다.”


“세탁해 주려고? 됐어. 행여라도 그럴 생각은 가지지도 말아.”


가현의 말에 연희가 마치 조용히 있겠다는 어린아이의 다짐처럼 앙다문 입술을 만들어 보였다.


“그럼, 오늘은 어떻게 일찍이 집으로 발을 내려놓으실까요?”


연희의 물음에 가현은 말괄량이 같은 얼굴로 그에 대답했다.


“글쎄, 오늘은 무려 업무 때문에 나가는 거라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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