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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Sep 17. 2024

남 회장과의 짧은 통화

“회장님 큰일 났습니다. 아가씨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은평이 떨리는 손으로 움켜쥔 전화로 다급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뭐?”


“가현 아가씨가 오셨다 가셨습니다. 무언갈 아는 듯한 눈치였는데, 정확히 알지는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회장님…, 저는 아가씨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화가 남현의 한숨 소리로 지직거렸다. 그를 들은 은평은 더욱 조아리며 말을 계속했다.


“독특하고도 현명한 제안이었습니다. 서로 못 본 사이로 치부한 채, 본인들이 해야 할 일을 각자 성실히 해 나가자는…”


“하루빨리 집에 있는 쓰레기를 불러다 자루에 집어처넣어야겠군.”


남현이 은평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런데, 네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아냈을까. 딸에게 있는 사람이라고는 자루에 처박힐 사람밖에 없는데 말이야.”


“노인이 아닐는지요.”


“그렇게 생각한 근거는?”


“다음 차례가 자신이라고 오해를 했다는 것이 제 가정입니다.”


은평의 말을 끝으로 잠시간의 침묵이 찾아왔다. 은평은 남현의 말을 기다렸다.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말을 숨도 안 쉬고 뱉어내는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야.”


웃음기 없는 남현의 말에 은평은 재빨리 뒷말을 이어 붙였다.


“회장님, 저는 태연히 아가씨를 반겼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제 신분을 대함에 있어선 확신이 있는 듯 보였습니다. 노인이 아니고서야…”


다음으로 은평이 하려던 말은 ‘어찌 저에 대한 사실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였다. 은평은 저 말을 하지 못했다. 남현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들려 왔기 때문이다.


“어이, 은평이.”


모두를 꿰뚫어 내었다는 목소리. 하려 했던 말을 끝마치지 못한 은평은 입을 다물었다. 자기 자신이 성급했음을 알았기에 만들 수 있는 정적이었다.


“…예.”


은평은 기어가는 목소리로 남현의 말에 대답했다.


“원래 이렇게 성미가 급한 친구였나?”


“…죄송합니다.”


남현은 이빨이 들어간 은평의 목을 더욱 거세게 물어뜯었다.


“왜 그렇게 들뜬 게야. 죽을 때 다된 노인네 뒤로 놓인 순번 하나를 기다리는 것에도 그리 초조함을 느끼면 장차 큰일을 어떻게 하겠어, 안 그래?”


남현에게 목을 물린 은평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뿐이었다. 목덜미를 깨문 남현이 이빨을 빼내어 줄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 1분 남짓 되는 시간이 흘러, 전화 너머에서 불어온 한숨 소리가 다시금 은평을 덮쳤다. 은평은 그제야 숨구멍을 통해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다음으로 남현의 말이 이어졌다.


“노인은 아니야. 아마 다른 곳에서 새어 나간 것 같군. 그건 내가 따로 알아보는 것으로 하지. 어이, 은평이. 듣고 있나?”


“예, 회장님.”


“화가 날 테지. 그런데, 하나 알아 뒀으면 좋겠군. 자네만큼이나 나도 자네에게 섭섭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걸.”


남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평은 전화를 두 손으로 받들어 잡으며 황급히 말했다.


“회장님!”


남현은 은평의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를 묵살하고서 계속해 말을 이어나갔다.


“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며?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해. 그런데, 출발이 늦은 지금의 자네에게 이런 여유가 어울리는지는 잘 모르겠군. 서두르는 게 좋아. 내 딸이 보기보다 성미가 급하거든.”


그대로 전화는 끊어졌다. 가현과 기성이 앉았던 현관 옆의 소파, 그곳 위로 덮개가 덮이지 않은 전화가 나뒹굴었다.


“씨발!! 도대체 날 더러 뭘 어쩌란 거야!!!”


악을 토해낸 뒤의 공허함, 그리고 동시에 찾아온 암담함. 한바탕 큰소리를 내지르고서 바닥에 주저앉은 은평은 천장을 쳐다봤다.


‘삑, 삑.’


소리를 들은 은평의 눈이 사납게 변했다.


“보스! 지금 막 떠났습니다. 아가씨와 그 사내!”


5층에 있던 키다리 중년의 목소리였다. 벨소리가 그치고도 은평이 소릴 내질 않자, 그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보스! 보스!!”


은평이 잠금을 풀자, 문이 급하게 뒤로 넘어갔다. 열린 문 한 짝을 꽉 채운 키다리. 은평은 위를 응시하며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들었습니다. 들었으니까 그만 좀 지랄하세요.”


그에 키다리가 몸을 굽혀 말했다.


“보스, 무슨 일 있으셨군요.”


“그래요, 무슨 일이 있죠. 그것도 아주 존나게 배배 꼬여 버린.”


은평의 대답을 들은 키다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잘하면 노인까지 단번에 쳐낼 수도 있을 거라고, 다시 없을 절호의 기회라고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죠. 그런데 내가 방금 그를 완벽히 그르치고 말았어요.”


미간이 찌푸려진 키다리가 한쪽 팔을 위로 걸쳐 올리며 은평의 말을 이어받았다.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아가씨와 마주쳤습니까?”


“예. 문밖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리기에 문을 열었더니 아가씨와 웬 사내 하나가 문 앞을 서성거리고 있더군요.”


“액자는요? 보았습니까, 그들이?”


“보았습니다.”


키다리의 대답에 은평은 그의 몸을 강하게 밀쳐 내며 소리쳤다.


“이런 빌어먹을!! 액자까지 보여 주면 어쩌자는!!!”


“염려 마십시오, 보스. 액자를 봤다 한들 그들은 절대 그 용도를 알아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여길 알고 찾아왔습니다. 그들 뒤에 있는 누군지도 모를 사람이 액자에 대해 듣게 될 거라고요.”


“아.”


얼빠진 얼굴로 소리를 내는 키다리에게 은평은 계속해 말했다.


“노인이 아닌 삼자입니다. 그것도 내부의 사정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삼자에다 남 회장까지…, 이거 정말이지, 지금 당장이라도 미쳐 나자빠질 것만 같군요.”


키다리는 은평에게 조언해 줄 정도의 인물이 되지 못하였다. 그는 지금에도 큰 키 하나로써 문틈만을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반면에 은평은 조바심이 몰려왔다. 잘못된 판에, 잘못된 전략을 끼얹었다는 자괴감과 세 사람분의 눈살을 보살피며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부담감이 그 이유였다. 그래도, 은평은 키다리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머리를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납치는 어떨까요?”


“예?”


“가이드 말입니다. 아까 아가씨와 같이 온 사내.”


키다리가 은평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액자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그런 이유도 있습니다만, 최악을 대비한다면 그 사람이 우리의 동아줄이 돼 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꽤 가까워 보였거든요. 그 두 사람.”


“빨리 액자를 건네고 오겠습니다.”


키다리가 말했다.


“아니요. 액자는 제가 노인에게 직접 전달하러 가겠습니다. 둘을 잠시라도 좋으니 어떻게든 떼어 놓기만 해 놓으세요. 다음은 제가,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은평이 손을 까딱거리며 말하자, 키다리가 반항 없이 고갤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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