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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Sep 20. 2024

맞잡음

“적잖이 놀란 얼굴이로군.”


남현이 시안을 보며 말했다. 멋들어지고, 권세를 내세울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하고 속으로 내심 기대하고 있던 시안은 금방 대답을 꺼내 놓지 못하였다. 그런 그녀에게 남현은 계속해서 말을 건넸다.


“충분히 이해함세. 그러나, 이제 발을 되돌릴 수 없지. 머리 좋은 아가씨니 그 정도는 벌써 이해하고 있을 것으로 믿고 있겠네.”


말을 끝낸 남현이 여인의 팔을 들어 올리려 하는 그때,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시안이 그 순간을 가로채고 말을 밀어 넣었다.


“이분은, 여기에 누워 있는 이 여인은, 가현 아가씨의 어머니 되는 분이 맞으시지요? 궁, 아니, 이 저택을 아는 모든 이들이 그럴 겁니다. 조금 전까진 저도 그러하였고요.”


목소리에 떨림이 가득했다. 당황이나, 경황이 없음에서 생겨난 떨림이 아니었다. 그녀의 떨림은 공포, 말 그대로 상황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공포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어깨 위로 남현의 손이 얹혔다. 시안에 손을 얹은 남현이 말했다.


“아내가 죽었다고? 그래,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지. 그런데 자네가 보기엔 어떠한가. 그 말이 이리도 멀쩡히 숨 쉬고 있는 사람에게 적합한 표현이라고 보나?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네. 이는 축복. 그래,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일세.”


시안은 남현이 저런 말들을 담담히 뱉어낸다는 게 두렵게 느껴졌다. 그러나 남현의 말대로 시안은 알고 있었다. 내려놓은 발을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선택이 필요한 순간임을.


“제가 뭘 하면 되는 건가요?”


시안이 남현의 손에서 벗어나, 침대에 누워 있는 여인의 앞으로 한 발자국 나아가며 말했다.


“그렇게 빨리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만. 후회하지 않겠나?”


남현이 그녀에게 기회를 주는 시늉을 보였다.


“대답이 없군. 그럼, 내 기꺼이 자네의 선택을 존중하지.”


그리고 남현은 시안을 보며 말했다.


“이곳은 궁의 주인과 궁의 집사. 이 둘만이 아는 장소일세.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나?”


“네.”


시안이 짧게 답하자, 남현이 우습다는 듯 말했다.


“대답 한번 빨라 좋군.”


남현의 저러한 말에도 시안은 전진, 전진만을 생각했다. 오로지 한 가지 생각에 초점을 맞춰 놓은 그녀의 사고는 다른 길로 그녀를 인도하지 않았다. 현재 자신이 놓여 있는 위치를 생각하고, 처해 있는 상황을 생각한다면 결론은 간단했다.


“생각을 마친 참이어서요. 게다가 무려 이 저택의 집사 자리가 걸려 있는 일이잖아요? 저는 절대 이 길을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남현이 그녀가 꺼낸 말의 뒤를 이었다.


“야망을 품고 있군. 좋은 자세야. 그럼, 복잡한 것들은 추후 다시 이야기하는 것으로 하고. 우선은 오늘 하루 동안에 자네가 해야 하는 일에 대해 말을 해 주도록 할까.”


시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현이 여인으로 눈을 옮기며 설명을 시작했다.


“나의 아내는 보다시피 기나긴 잠에 몸을 맡겨 있는 상태야. 하여, 잠에서 깨어 있는 우리가 도움을 줘야 하네.”


“사모님께서 편안한 꿈을 꾸시게끔 말이죠?”


시안이 나아갔던 걸음을 돌려 남현의 곁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무심결에 나온 요설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남현의 가슴을 건드리는 한마디가 되어 주었다. 시안의 말이 진심이건 아니건, 그러한 것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남현은 탄복했다.


“…그, 그래! 그렇고말고. 축복받은 이 여인의 잠을 깨우지 않고, 편안한 수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말이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일종의 이 여인만을 위한 심복이라 생각하면 되는 걸세.”


흥분에 찬 목소리로 떨며 말하는 남현이 시안은 두려웠다.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달아나고 싶었지만, 그녀는 참고, 또 참았다. 이 순간, 지금의 이 순간 하나만을 버틴다면 지위가 바뀌었기 때문에. 시안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벌렸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만 알려 주신다면 회장님께서 자릴 비운 사이 제가 잘 모시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저 말을 함과 동시에 시안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이성은 토막이 났다. 광기가 어린 상대임을 알면서도 바치는 자신의 인생. 시안은 후회를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의 그녀는 크루즈에 처음 올라 본 소녀처럼 행복에 겨워, 벅찬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짝! 짝!’


남현이 두 번 손뼉 쳤다. 시안의 눈이 자연스레 그 소리를 따라갔다.


“자, 우선 중요한 것은 세 가지야. 호흡, 맥박, 그리고 TPN. 저 위에 매달린 용액이 보이나? 저것이 TPN이네. 저 용액은 하루에 한 번의 교체가 필요해. 그다음으로는 마사지. 딱딱히 굳은 여인의 몸을 주무르고, 또 뒤집는 것이지. 파인 피부를 풀어 주기 위한 행위라 생각하면 되네. 못해도 하루에 4번에서 6번 정도는 행해야 하지. 똑똑한 아가씨니 금방 적응할 거라 믿네만, 너무 스스럼없이 달려들진 말게. 잠이 든 여인도 그런 상대를 고스란히 느끼거든.”


설명이 길었다. 여인의 옷을 걷어 올려 주삿바늘을 보이고, 호흡기에 맺히는 숨결을 들으라는 듯이 시안의 얼굴을 그 가까이 데려가는 둥, 누가 봐도 깊은 애착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잠시 틈이 난 그때, 다시금 여인의 몸 구석구석을 손으로 짚어 가며 설명을 이으려는 남현을 시안이 불러 세웠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회장님께서 아셔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에 남현이 내렸던 여인의 옷을 도로 끌어 올리며 대답했다.


“뭔가?”


“만약, 만약에라도 위급한 상황이 오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저는 이런 일을 해 본 적도 없거니와, 하물며 주삿바늘 같은 걸 잡아 본 적도 없는 일반인에 불과한데…”


“아아, 괜찮아, 괜찮아. 다 알고 있으니까. 괜한 걱정으로 거기까지 나아가지 말게. 당장에 자네가 할 일은 그것들이 아니니. 지금 들은 얘기들은 그냥 그렇구나, 하고 알고만 있으면 되네. 후의 모든 수순이 마련되어 있으니까 걱정 없이 따라만 오게. 알겠나?”


말을 마친 남현은 간단히 시안의 어깨를 토닥인 후, 계속해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의 자네가 우선시해야 하는 일은 친밀도를 쌓는 것이라네. 다른 누가 아닌, 이 사람과 말이야. 혼자 이곳에 내려와 여인을 만나고, 또 피부의 감촉을 알아 가면서 느낌을 축적하는 것이지. 혼자 온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 될 수도 있어. 이해가 가나?”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천천히 알아 나가면 되네. 걱정치 말게.”


걱정이라는 단어가 시안의 머릿속에 자꾸만 쌓여갔다. 그리고 방금에 쌓인 걱정이라는 단어는 그녀에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시안은 불안이 차오름을 느끼며 머리를 뒤흔들었다.


“왜 그러는가?”


그를 본 남현이 시안에게 물었다. 남현의 말에 줄곧 대답을 잘해 나가던 시안은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멈칫멈칫하는 시안의 입술을 본 남현은 그녀의 입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겁에 질린 얼굴이군. 짱짱한 아가씨가 고작 집에 있는 노인네들의 조잘댐을 걱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왜, 내 딸이 신경 쓰이나?”


시안은 몸을 움찔거렸다. 완벽한 정곡이었다. 시안은 말문이 열리지 않음이 느껴졌다. 그녀는 계속해 턱을 벌리려다 이내 그를 포기하고서는 표정으로써 말을 대신했다. 분홍색 커튼이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커튼을 되돌린 남현은 말없이 걸음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몇 발자국 앞으로 나아간 그는 다시 몸을 뒤돌려 시안에게 앞으로 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받게. 아까 보았듯 여기로 통하는 유일한 열쇠일세. 둔탁한 소리가 들릴 때까지 밀어 넣으면 돼. 닫을 때도 마찬가지.”


시안에게 펜대를 내미는 남현의 말속에 가현의 얘기는 없었다.


“실수했습니다.”


펜을 받아 든 시안이 허리 굽혀 사과했다.


“그래,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면 되는 걸세. 궁의 집사로서.”


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앞으로 남현의 오른손이 마중 나와 있었다. 시안은 남현의 손을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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