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실 비슷한 장소. 바닥에는 희고, 반짝이는 가루들이 넓게 흩뿌려져 있었다. 모든 벽면의 길이가 같은 정사각형의 공간. 각 면에는 사람의 키만큼이나 큰 화분들이 놓여 있었다. 종은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각각이 다른 종이었고, 서로가 다른 굴곡과 다른 색깔을 뽐내고 있었다. 기성의 마지막 기억은 투명한 액상이 담긴 주삿바늘이 경직된 자신의 팔뚝을 뚫고 들어오는 것을 지켜본 것이었다. 몸에 전해지는 진동이 줄어들자, 그제야 감겨 있던 기성의 양 눈가의 근육들로 꿈틀거림이 일기 시작했다. 천천히 눈을 뜬 기성은 발목의 통증을 느낌과 동시에 금방 달아올랐다. 기성은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고서 재빨리 자신이 놓인 상황을 더듬어 나가기 시작했다.
“여긴 그녀와 왔던 곳이 아니군.”
“아니지, 그 건물 지하일 수도 있겠어.”
혼잣말을 연이어 내뱉은 기성은 자신이 나무 의자에 앉히어 있는 것이 고작이고, 몸의 어느 부위도 속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기성은 압박감을 애써 외면한 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올렸다. 원래의 위치에서 벗어나 삐걱대는 오른발에 기성은 몸을 휘청거렸지만, 이내 이를 꽉 깨물고서 다시금 자세를 고쳐잡았다. 몸을 일으키는 데 성공한 기성은 중심을 지탱할 적당한 물건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빌어먹을.”
기성은 덜렁거리는 오른발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기성은 자신과 가까운 곳에 놓여 있는 화분 쪽을 향해 몸을 옮겼다. 출구는 그와 맞닿은 벽면에 나 있었다. 기성은 걷는 마디마디마다 피어오르는 고통과 어색함에 노여움을 느끼며 한쪽밖에 남지 않은 자신의 발을 끌 듯이 앞으로 옮겨 나갔다. 육체를 상황에 접목하는 데 성공한 기성이었지만, 그의 정신은 그를 버틸 만큼 단단하지 못했다. 나약하고, 허무한 감정들. 패배자 차림에 가까운 감정들이 그림자처럼 기성의 몸에 옴 붙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시간이 지났다. 지금까지 기성이 알게 된 사실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의 한쪽 발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것, 또 하나는 갇혀 있는 공간에는 한기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출구의 문은 별다른 잠금장치 없이 닫혀 있다는 것. 출구의 손잡이를 돌리는 것까지가 기성이 행한 행동의 마지막이었다. 기성이 옴 붙은 그림자들과 함께 의자로 돌아가 앉아 있기를 2시간하고도 절반 남짓한 그때, 큰 발소리가 문 쪽으로 가까워져 왔다.
“정말이군.”
“뭐랬어, 형님. 저 사람 말만 뻔지르르하다니까?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사람 보는 안목 하난 타고났어요. 동의하지, 형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짝눈 사내와 덩치, 두 사람. 키다리는 없었다. 기성은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온 틈에, 아주 잠깐이지만 초록빛을 본 것 같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기성은 다시 그 두 사람에게로 눈길을 맞췄다.
“자, 형님.”
덩치가 짝눈 사내를 향해 활짝 펼친 손바닥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짝눈 사내의 품에서 지갑이 나왔고, 덩치의 손바닥 위로 각각 다른 단위의 화폐들이 차례차례 떨궈졌다. 만 원권 한 장, 오천 원권 한 장, 천 원권 두 장, 그리고 동전 여럿. 덩치가 손으로 받아 낸 돈을 세며 짝눈 사내를 향해 말을 건넸다.
“17,900원이네? 이거 전부 맞아요? 더 있는 거 아니야?”
“없어.”
짝눈 사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를 들은 덩치가 기성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니, 형씨. 나 이거 어떡해야 해? 형님 말을 믿는 게 맞는 것 같아?”
기성은 대답했다.
“여기는 왔던 데가 아니군요.”
짝눈 사내가 한 손으로 덩치를 밀쳐 내며 빠른 속도로 걸음을 옮겨 왔다. 기성의 코앞으로 온 사내가 말했다.
“숨도 쉬지 않고 누워 있더니, 뻗은 척을 한 거였나 보군. 이거 내가 한 방 먹었어, 당신.”
짝눈 사내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기성은 그대로 그 떨림에 편승하여 말을 이어나갔다.
“큭큭큭, 정말 왔던 데가 아닌 모양이군.”
“뭐?”
“척이 아니라 정말로 뻗어 있었거든. 눈을 뜨고 본 거라곤 당신들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비친 초록빛뿐이야. 등신 새끼.”
“이런 미친 새끼가.”
사내의 손이 기성의 머리통을 강타했다.
“형님! 그만하십시오! 곧 보스께서…”
“알아!!”
사내의 걸걸한 목소리가 쫙 갈라져서는 덩치를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사내는 곧장 자신의 몽땅한 검지를 치켜들어, 기성에게 겁박의 말을 퍼부었다.
“이봐 당신, 곧 나가떨어질 목숨이라지만 너무 까불지는 마. 잘근잘근 씹듯 하다가 끝에 이르러서야 터뜨려 주는 수가 있어.”
기성은 사내의 말을 이에 껴 있던 질긴 음식물을 되씹는 것처럼 흘려보냈다. 그리고 뒷짐 지며 빠지는 사내에, 덩치가 뒷말을 보탰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우리 가이드 선생은 눈썰미가 참 좋아. 근데 그 이유를 모르겠어. 딱히 이렇다 할 직업도 없는 것이.”
“그래서?”
기성이 말하자, 덩치가 놀랍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아니, 형씨. 아무리 젊음이 무기라지만, 이거 모르는 척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지금이야말로 아는 척을 해야 하는 때라고 생각되는데.”
그에 기성은 비웃으며 말했다.
“나는 고작 여우비에 움츠려서 와이퍼를 세게 돌리는 운전사가 아니라서 말이야.”
“뭐?”
거기에서 기성의 고개가 덩치의 날갯죽지 옆으로 기울었다. 앞서 기성이 인지했던 초록빛. 이번에는 찰나에 느꼈던 적은 양이 아니었다. 화실 같은 공간에 흩뿌려져 있던 하얀 가루들이 일제히 초록색을 가리켰다. 그리고, 새로운 얼굴이 그 위로 걸음을 내려놓으며 자리에 모여 있는 세 사람을 향해 말을 던졌다.
“끌끌, 외간 남자가 이곳에 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로군.”
노인이었다.
“그런데, 그 표정은 처음이 아니야.”
“…누구시죠?”
기성은 물었다.
“나? 이곳의 수장이자, 지킴이라고나 할까.”
“아니, 아니지. 그래도 제대로 된 소개를 건네자고 한다면 건축가라고 해야 맞겠군. 평생에 걸쳐 일했지만, 유명세를 취하지 못한 나부랭이 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