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현의 도착은 시안이 여인의 말로부터 충격을 받은 무렵과 그 시각이 비슷했다. 궁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가현은 시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기성이 사라진 당시부터 어디에서든 시간을 의식하기 시작한 그녀에게 시간은 너무도 빠른 것이었고, 또한 그것은 그 정도의 지나침을 스스로만 인지하지 못하는 대상이 되었다. 가현은 자신의 채찍질에 통증을 느끼면서도 조각상이 있는 위치까지 차를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 가현은 쓰러지듯 차에서 몸을 내리며 속에 엉켜 있는 생각들을 재빨리 하나로 엮었다.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구할 수 있어. 그래, 내가 살릴 거야.’
궁의 입구까지 놓여 있는 열 개 남짓한 계단. 작은 고갯길에 비할 바도 못 되는 낮은 턱이었지만, 넋을 잃은 채 걸음을 올려 나가는 가현에게는 그들이 산만큼이나 높게 느껴졌다.
“문 열어!!!”
문 앞에 도착한 가현은 크게 소리쳤다. 그녀의 고함이 궁의 벽과 부닥쳐 넓은 반경으로 번져 나갔다. 손잡이 옆에 매달린 큼지막한 초인종처럼 퍼지는 처절한 목소리. 가현은 고함을 내지름과 동시에 왼 주먹으로 거칠게 문을 두들겼다.
“열어!!! 문 열라고!!!”
듣기 힘든 목소리였다. 당장에 성대 주변의 근육이 끊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목소리, 가현의 왼 주먹은 이미 살갗이 패여 검붉은 핏빛이 드리운 지 오래였다. 집 안에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들 중 하나가 무리에서 빠져나와 현관문 앞으로 가까워져 온 것은 가현이 문 앞에서 악을 내지른 지 정확히 2분가량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문을 열고 앞으로 나왔다. 젊은 여인이었다. 걱정스러운 말투와는 달리 무척이나 귀찮다는 듯한 여인의 얼굴. 그녀는 군중의 손길에 떠밀려 나온 사람이 분명했다. 여인은 가현의 얼굴을 인지함과 동시에 그 표정을 사그라뜨렸다.
“연희, 집에 있지? 어딨어? 2층에 있어?”
가현이 문을 연 여인을 밀치고서 안으로 발을 내디디며 말했다. 그리고 가현의 뒤에서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없어요.”
안으로 들어가던 가현은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가현은 젊은 여인 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무슨 뜻이야?”
“집사가 바뀌었거든요. 오늘부로.”
말을 마친 여인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가현은 젊은 여인의 어깻죽지를 강하게 움켜쥐며 물음을 이었다.
“…그러니까, 응?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 거잖아.”
젊은 여인은 더 이상 가현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여인의 시선은 이제 완전히 가현의 뒤편을 향해 있었다. 현관문 너머에 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웅성거림이었다. 뒤이어 한 명의 발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인사 올리겠습니다.”
목소리를 들은 가현은 젊은 여인의 어깨에 얹힌 손을 거둬들이고서 고개를 돌렸다. 가현은 시안은 단박에 알아봤다.
“…시안? 시안이 맞지? 시안아, 나 기억해? 저번에 내가 부탁도 하고 그랬었는데.”
가현은 시안의 앞으로 가, 그녀의 옷을 낚아챈 뒤 애원하듯 말했다.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야? 나한테 말 좀 해 줘.”
돌아오는 대꾸는 없었다. 또한, 시안을 축으로 빽빽이 늘어서기 시작하는 여인들, 그 사람들은 마치 나무와 같았다. 나무인 그들은 빠르게 하나의 숲을 형성했다. 떠들썩하고도 조용했다. 여인들 모두는 양옆을 지탱한 채로 숨어서 말을 속삭였다. 시안은 자신의 주변으로 나무들이 모두 정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뒤에야, 그녀는 말을 뱉어냈다.
“보고 계시는 그대로입니다. 제가 오늘부터 새로이 집의 집사를 도맡게 되었습니다.”
“어째서?”
“네?”
“네가 뭘 할 줄 알기에 여기, 이 수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집사가 된 거냐고.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이미 여인에게서부터 들은 말이 있는 시안이었다. 시안은 눈을 돌려 여인들의 표정을 살폈다.
“회장님의 신뢰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을까요?”
시안이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가현은 시안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 그럼, 내 아버지가 너를 신뢰하는 이유는 뭔데?”
가현의 물음에 숲의 나무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시안은 어렸다. 그녀는 아직 익지 않은 열매였다. 가현의 물음을 들은 시안은 속내를 얼굴 위로 모두 드러냈다.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데에서 나오는 승리자의 여유와 상대를 옥죄일 수단 역시 갖춰져 있다는 데에서 나오는 우월감. 결국, 시안은 입안 가득 고인 웃음을 되삼키지 못했다.
“하! 하하! 아하하하하!!”
그리고 시안의 저 같은 웃음소리는 가현으로 하여금 참고 있던 폭주의 방아쇠를 당기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짝!!’
또 한 번.
‘짝!!’
가현은 온 힘을 다하여 시안의 오른뺨을 휘갈겼다. 시안은 목이 돌아간 그 상태에서도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모두가 그녀를 미친 사람 보듯 바라봤다.
“회장님이 뭐라 했건, 내가 허락 못 해. 이 집에서 당장 나가.”
모두가 기권만이 남은 게 없다고 생각하는 그때, 시안의 입에서 가느다란 말소리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시안의 앞에 서 있는 가현은 그녀의 말소리를 똑똑히 알아들었다.
“소원이요.”
“…너?!”
“무엇이든 한 가지는 들어주겠다고 하셨죠?”
“그깟 말장난을 여기다가 갖다 붙이는 게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하니? 어림도 없어. 꿈도 꾸지 마.”
“물론 그러실 테죠. 그런데, 아가씨. 그날 아가씨께서 무엇을 하셨는지에 따라서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시안의 말에 가현의 얼굴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바라는 게 뭐야?”
가현은 물었다.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소원이라고.”
“소원의 내용은?”
시안이 대답했다.
“아가씨의 반발 없는 입 다묾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