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에게서 받은 옷들이 너무도 작은 나머지, 맞는 것이 없었던 공덕은 욕실에서 나체에 가깝다시피 한 모습으로 걸어 나왔다. 행여 아이나 부인이라도 마주칠까, 밖으로 나온 공덕은 일부러 소리 내어 걸음을 내밟았다. 다행히 그가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2층으로 올라온 사람은 없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던 초저녁의 밝음은 사라지고, 방은 완전한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공덕은 방문 옆 벽면을 조금씩 더듬어 나가며 스위치를 찾아 나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스위치가 올라가고, 군데군데 박혀 있는 주황빛의 매립 등이 방을 환히 비췄다. 불을 켠 공덕은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작게 중얼거렸다.
“이럴 거면 주지나 말 것이지.”
그리고 공덕은 한숨 쉬며 바닥에 팽개쳐 놓았던 옷가지들을 다시 하나둘 주워들어 차례로 팔다리를 밀어 넣었다. 벗었던 옷을 재탕하는 불쾌한 기분이 꿈틀대는 공덕의 얼굴 위로 고스란히 떠올랐다. 원래의 옷으로 갈아입은 공덕은 곧장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집은 원래부터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터무니없는 고요함을 보여 주었다. 공덕은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갔다.
“대단히도 컴컴하군. 그렇다는 건, 불이 있는 쪽으로 오라는 거겠지.”
1층으로 내려온 공덕이 주변을 살펴보고서는 말을 뱉어냈다. 공덕의 말마따나 빛이 귀했다. 닫아 놓은 방들의 문틈으로도, 바다와 부닥쳐 튕겨 나오는 달빛도.
“여깁니다, 공덕 씨.”
남자의 목소리, 남자는 불이 훤한 곳 아래에 앉아 공덕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남자의 모습을 본 공덕은 생각했다.
‘어디부터 보고 있었을까. 밝은 데서 나를 훑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지 않은데.’
공덕은 남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식탁의 의자를 뺐다. 남자는 공덕이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말을 꺼냈다.
“스튜라도 데워 드릴까요? 배가 고프실 것 같은데.”
“아니요, 괜찮습니다.”
남자의 권유에 공덕이 상체를 뒤로 젖히며 말했다.
“다만, 졸음이 몰려온 탓에 머리가 좀 멍하군요.”
그에 남자가 깍지 낀 손을 식탁 위에 올리며 대답했다.
“아, 그래요. 미안합니다. 빨리 끝내죠.”
“저를 상대로 취조라도 하시고 싶은 모양입니다.”
“아니요. 개인의 호기심이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옷이 그대로이시네요?”
남자의 말에 공덕의 시선이 자연스레 아래로 내려갔다. 공덕은 그때 깨달았다. 남자가 자신의 화를 돋우기 위해 작은 옷을 건넨 것은 아니었음을.
“아, 예. 제가 덩치가 크다 보니.”
“저런. 죄송합니다. 그게 제게 있는 가장 큰 사이즈의 옷이라 드린 것이었는데, 이거 오해를 하셨겠네요.”
“괜찮습니다. 하루쯤 더 입는다고 해서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니까요. 그보다 무슨 말이 하고 싶어 저를 부른 겁니까? 본론으로 빨리 넘어가 주셨으면 하는데.”
공덕의 말과 함께 남자의 눈썹 아래로 일순간 그늘이 드리웠다. 조명과 남자의 우연한 각도에 불과했지만, 분위기가 바뀐 듯한 느낌이 가히 연출적이었다. 그리고 전원이 들어온 마이크에서 들리는 으스스한 공기 소리처럼 남자의 목소리가 부엌 공간을 번져 나갔다.
“혹시 겹이 두 개인 창문이 서로 달리 열려 있는 걸 본 적 있으신지요?”
공덕이 뒤로 젖히어 놓은 상체를 다시 앞으로 끌고 오며 남자의 물음에 대답했다.
“말이 어렵군요.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안쪽 창과 바깥쪽 창, 두 개의 창이 열려 있는 정도가 다른 모습, 그 모습을 보신 적이 있느냐는 얘기입니다.”
이해 못 한 공덕에게 남자는 차분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어떻든 말의 의미만 통하면 된다는 정도가 아닌, 완벽한 이해. 그것이 남자가 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설명을 들은 공덕은 남자의 말을 한 번에 이해했다.
“방충망까지 합하면 세 구역이지요. 그리고 보통은 안쪽 창 두 개를 한꺼번에 열어 놓고요.”
“그래요! 그 말입니다. 그럼, 이제 그와 똑같은 상황을 머릿속에 한 번 떠올려 봐주시겠습니까? 지금 말한 것과 똑같이요.”
반발심이 앞서나갔지만, 공손하고도 태평스러운 남자의 요구에 공덕은 거절을 표할 수 없었다. 공덕은 딱히 이렇다 할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그때, 남자가 요구를 덧붙였다.
“눈을 감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냥 계속 말씀하시죠. 집이 어두워 집중키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남자는 공덕만큼이나 셈이 빠른 작자였다.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으로 그 상태에서, 떠올린 창 중의 하나를 다르게 놓아 보시겠습니까?”
공덕은 남자의 말대로 세 개의 창 중 하나를 닫았다. 제일 안쪽에 자리한 두꺼운 창이었다.
“닫았습니다.”
공덕이 말하자, 남자가 눈에 힘을 주며 질문을 건넸다.
“창이 엇갈려 있는 모습을 보니 어떻습니까?”
공덕은 보이는 그대로 대답했다. 애초에 남자가 무슨 의도로써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대답에 거짓을 섞을 수 없었다.
“어떻게 보인다…, 글쎄요. 일단은 거슬리는군요. 또, 굳이 말하자면 불편하다고도 할 수 있겠고.”
거슬리고 불편하다는 공덕의 대답.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시겠나요?”
“제가 불편하다는 말씀을 돌려 하시는 것처럼 들리긴 합니다.”
공덕의 말에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요, 아니요. 그건 완전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공덕 씨. 공덕 씨를 집으로 들인 건 저예요. 제가 불편함을 느끼는 건 공덕 씨가 아닙니다. 다른 창을 움직여 보세요.”
“회장님과의 얘기 역시 이미 끝이 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마지막 창이 있을 겁니다. 그걸 말해 주세요.”
그때야 공덕은 눈치챘다. 남자가 여태 말한 창이 누구를 뜻하는 것이고, 왜 그토록 말을 빙빙 돌려 했는가를.
“등대에 있는 사람을 말하고 계셨군요.”
공덕의 말을 들은 남자는 대답 없이 눈을 감고 고개를 크게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한층 풀어진 얼굴로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회장님과 공덕 씨와는 말을 섞어 보았지만, 그 여인과 저는 오늘이 첫 만남입니다. 사람을 맞춰 주셨으니, 이유 역시 알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에 공덕은 왼쪽으로 다리를 꼬며 남자에게 되물었다.
“까닭이 있습니까?”
“예?”
“등대에 있는 여인을 걱정하시는 까닭을 물었습니다.”
공덕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첫 만남에도 불구하고 꽤 거칠게 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지금에 와 그것을 다시 짚으시는 이유가 궁금하군요.”
쉴 틈 없이 몰아세우던 남자의 말문이 실로 꿴 것만큼이나 조용했다. 공덕은 남자와 정반대였다. 공덕은 자비를 싫어했다. 공덕은 남자에게 생각할 시간을 베풀어 주지 않았다.
“이거 정말 이유가 있는 모양이군요.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저희 일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계속되는 공덕의 문책과 그를 피하려고만 하는 남자. 어둑한 부엌이 금세 둘의 열기로 가득 찼다. 오래 이어질 마찰처럼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마찰은 금방 끝났다. 둘은 그의 딱 중간 지점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남자의 말로써 그들은 그 지점을 벗어났다.
“…그 여인이 무엇을 잘못한 겁니까?”
“아는 사람입니까?”
남자의 말엔 온기가 가득했고, 공덕의 말엔 한기가 가득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남자의 분명한 답에도 공덕은 추궁과 같은 말투를 놓지 않았다.
“확실합니까?”
“저는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공덕 씨.”
“아빠, 안 자?”
열기가 과열되던 둘 사이를 가로지르는 목소리. 그는 순식간에 그곳의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공덕은 들은 순간에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 수 있었다. 자그마한 발소리가 점점 더 커져 갔다. 아이의 등장과 함께 마찰은 순식간에 종식됐다. 아이는 뾰로통한 눈망울로 남자와 공덕 사이를 번갈아 바라봤다.
“깼구나, 우리 아들.”
남자가 의자에서 내려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리고 침묵 사이로 들어온 아이가 작게 재잘거렸다.
“아저씨 때문이에요?”
아이의 말에 남자, 공덕, 둘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공덕은 황당한 마음에 의해, 남자는 당황한 마음에 이끌려. 아이의 말을 들은 남자는 애꿎은 아이의 머리 쓰다듬기만을 반복했다.
“미안하구나. 전부 다 이 아저씨 잘못이야.”
말을 건넨 공덕은 앉은자리 그대로, 몸을 안쪽으로 살짝 감추어 넣었다. 큰 덩치를 숨기는 것이 아이에게 괜한 공포를 심어 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잘 시간이에요! 이제 그만 우리 아빠를 놓아주세요!”
“밤중에 시끄럽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 그런데 마홈아, 아저씨는 정말 잠깐의 시간이면 되는데. 잠시만 아빠를 빌릴 수는 없을까?”
“지났단 말이에요! 9시가 잠들 시간인데!”
아이가 다시 크게 소리쳤다. 전보다 큰 목소리였다. 소리치기를 그치지 않을 듯 보이는 아이의 모습에 공덕은 도움을 요청하듯 앞에 앉은 남자를 흘겨봤지만, 남자는 이미 단념의 가도에 올라 있었다. 남자의 회피에 공덕은 속으로 생각했다.
‘차라리 쓰레기차에 내던져지고 싶군.’
그리고 공덕은 말했다.
“아이를 올려다 놓으시죠.”
“예?”
답을 한 남자의 목소리에 당황의 기색이 가득했다.
“일을 마친 회장님께서 당장에 언제 오실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요구한 건 제가 아닙니다. 그쪽이에요.”
“그건 그렇지만…”
“제가 아이의 옆방이니 제가 할까요?”
그리고 공덕은 가만히 남자를 노려보았다. 양보, 호의, 배려 따위의 몰랑몰랑한 단어들은 들어 있지 않았다. 우직한 밀침,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남자에게 그것은 크게 먹혀들었다. 남자는 딱 한 번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남자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목소릴 내었다.
“마홈아, 오늘 하루는 네가 양보를 해 줘야겠다.”
남자가 운을 뗐음에도 공덕은 그를 향한 눈길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공덕은 눈으로 말을 건넸다. 조금 더.
“그러니까…”
남자가 말을 이으려는 그때, 아이가 말했다.
“그럼, 오늘부터 9시에 자야 하는 규칙은 없애도 되는 거예요?”
“마홈아, 꼭 9시에 잠자리에 들라는 법은 없단다. 그러한 규칙은 너 스스로 꾸며 낸 거야. 그러지 않아도 돼. 무슨 말인지 알겠니?”
“하지만 시간을 넘긴 날이면 늘 꾸중을 들었는걸요.”
“그게 이유가 되진 않아.”
“저한테는 이유가 돼요. 꾸중을 듣고 잔 날에는 악몽을 꾼단 말이에요.”
남자와 아이는 그 후로도 9시를 놓고서 엎치락뒤치락하며 서로 양보 없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이를 향한 부모의 스트레스와 부모를 향한 아이의 명분이 만나 이루어 낸 볼품없는 상황극. 중간에 낀 공덕은 테니스 코트를 보듯 누군가의 실수를 기다리며 그들 한마디 한마디를 눈으로 좇았다. 길어지는 랠리. 그리고 그 긴 랠리의 승자는, 부모의 말 하나로 단락이 났다.
“너 자꾸 이러면 이 아저씨 보고 데려가라고 말한다.”
아이의 떼쓰기는 그 말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차츰차츰 얼굴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이내 아이의 눈망울로 큼지막한 눈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아이의 울음. 아이의 울음은 눈에 맺힌 눈물방울의 크기에 비하면 그 소리가 너무나 초라했다. 마치 딸꾹질을 하는 듯한 모습. 아이는 소리를 속으로 삼키며 울음을 보였다. 정작 아이를 울린 남자는 태연했다. 그로 인해 정리는 자연스레 공덕의 몫으로 가닥이 잡혔다. 당황한 공덕은 말을 끌었고, 남자는 그 순간에 공덕을 바라봤다. 그리고 남자는 공덕이 했던 것 그대로 행동했다. 자, 당신 차례야.
“아니야, 마홈아. 네 아빠가 괜히 겁주려고 저러는 거야. 아저씨 얼굴을 보렴. 아저씨는 그런 사람이 아니란다.”
공덕이 미소가 만개한 얼굴을 아이를 향해 내밀며 말했다. 낡고 해진 공덕의 얼굴 근육들이 양껏 삐걱대며 춤을 췄다. 아이는 계속해 소리를 삼키며 눈물을 떨궜다. 세지지도, 약해지지도 않은 울음 세기. 울음의 안자락에서 좀체 입을 열지 않는 아이에 공덕은 천천히 얼굴 위의 미소를 거둬들이며, 남자에게로 다시 한번 구조의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공덕의 눈짓을 본 남자는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홈아, 이리 와. 어서. 아빠 손잡고.”
몸을 내린 남자가 아이에게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래, 마홈아. 아저씨가 조금만 이따가 아빠를 침대로 돌려보낼게. 안심하고 오늘 하루만 먼저 올라가 자렴.”
터벅터벅 옮겨지는 마홈과 그 옆을 따라가는 남자의 발걸음. 마홈을 데려가는 남자의 모습은 마치 옷걸이와 같았다. 잔뜩 경직되어 고정되다시피 한 상체와 그에 매달린 깡마른 두 다리. 공덕은 마홈의 울음소리가 위층 저편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둘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다.
“정말이지, 미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가족이로군.”
부엌에 홀로 남겨진 공덕은 다리를 꼬며 말했다. 그 상태에서 천천히 떨려 가는 공덕의 오른쪽 다리. 건방짐이 실려 있는 떨림이 구겨진 메트로놈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공덕이 한 악장을 끝낼 때쯤 2층에서 문소리가 일었다. 그 소리를 들은 공덕은 빠른 템포에서 느린 템포로 아주 서서히, 떨림의 속도를 늦춰 갔다. 그리고 움직임이 더뎌져 떨림이 그친 듯 보이는 그때,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그에 공덕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초점 없는 시선과 끄덕이는 고개를 내밀었다. 남자는 몰래 입맛을 한 번 다시고는 이내 정면을 향해 있는 공덕의 눈길에 맞춰 자리에 앉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철이 들려면 한참이 걸릴 듯합니다.”
남자의 말에 공덕은 대답했다.
“오히려 드센 깡다구가 보기 좋던걸요. 사내아이라면 좋은 징조 아닙니까.”
“글쎄요. 본래 저런 성격의 아이였더라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변했거든요. 성격이.”
“아이 일도 있고, 밤 또한 늦었으니, 짧게 얘기 드리겠습니다.”
남자가 소침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무섭군요. 내심 크진 않더라도 작게나마 망설여 주시길 바라였는데.”
“무엇을 말입니까?”
“이유를 말하는 일 말입니다.”
“망설이는 것과 그러지 않는 것에 차이가 있습니까?”
“예.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렇습니다.”
남자의 대답에 공덕은 다리를 풀었다. 그리고 불룩이 들이마신 숨을 담배 연기 내뿜듯 남자의 얼굴 쪽으로 뱉어내며 말했다.
“품고 계신 것은 독입니다. 뱉으셔야 살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