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영강 Sep 27. 2024

미소 띤 인사

기성은 학창 시절의 꿈을 꾸고 있다. 거짓이 꿈속에서도 피어올랐다. 황급히 진실을 은폐하려 움직였다. 자의임을 기성은 알고 있다. 어디선가 들어 본 노랫말, 어디선가 보았던 풍경, 어디선가 맛봤던 음식. 다음은 화초가 나왔다. 온실 속의 화초. 기성은 그곳을 바라보았다. 웬 사내가 화초에 물을 주기 위해 좁은 곳으로 허리를 굽혀 호스를 끌고 왔다. 기성은 그를 보고 생각했다. 온실 속의 화초는 허리를 굽힌 사람을 보며 자라는구나. 다음은 그가 예상했던 것이 그대로 그의 눈앞을 지나갔다. 기성은 신기해했다. 한편으론 자신이 으스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 어디선가 들었을 범 직한 노래가 다시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원래의 노랫가락과 달랐다. 끝이 이상했다. 급히 쥐어짜 내다 마지막에서 그 힘을 다한 듯한 느낌. 그리고 기성은 높은 파도를 보았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를 두들겼다.


“일어났습니다.”


“그래?”


남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 기성은 꿈에서 깨어났다. 입안의 수분이라는 수분은 모조리 빨려 버린 듯한 느낌과 함께. 기성은 양쪽에서 요동치는 맥박을 느끼며 감겨 있던 눈을 천천히 떠올렸다.


“낄낄. 형님, 눈꺼풀 떨리는 것 좀 보십시오. 형씨가 많이 놀란 모양입니다.”


“그래? 그럼 어떻게, 심신이 안정되는 약물이라도 좀 투여해 드려야 되나?”


기성은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귀에 느껴지는 상황들을 한 가지씩 감으로 짚어 나갈 뿐이었다. 나무 의자, 손과 발이 단단히 묶여 있고, 얼굴에는 별다른 장치가 달려 있지 않다. 5층에서 보았던 키다리, 그리고 그의 옆에 서 있는 덩치 하나. 다음으로 기성은 어렴풋이 떠오르는 홀쭉한 사내를 찾았지만, 그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뭡니까?”


공포와 긴장 속에서 기성은 첫마디를 뱉어내었다.


“뭐일 것 같은데요?”


키다리 옆에 있는 사내가 기성의 앞으로 두툼한 몸통을 내밀며 말했다.


“지금에 와서는 두려울 것도 없지 않아요? 그냥 재미 삼아 말해 봐요. 나도 형씨의 추리가 궁금해서 그러는 거니까.”


덩치는 계속해 기성 쪽으로 얼굴을 기울였다. 둘은 점점 가까워져 갔다. 기성의 앞머리와 머리를 올린 덩치의 이마가 거의 닿을락 말락 하는 수준에까지 이른 그때. 가만히 있던 키다리가 움직였다.


“그쯤 하지.”


몸무게가 140은 족히 넘어 보이는 남자를 오롯이 한쪽 팔의 힘으로 끌고 간 키다리. 탁, 탁, 탁. 덩치가 뒤로 밀려나며 넘어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을 굴렸다.


“죄송합니다.”


중심을 잡은 덩치는 곧장 키다리에게 사과를 건넸다.


“가이드 양반.”


키다리가 기성을 불렀다.


“분노는 지금 당신이 느낄 감정이 아냐. 웃거나, 울거나. 양자택일이라고.”


그에 기성은 말없이 키다리를 올려다봤다.


“여유가 넘치는군. 죽는 게 두렵지 않나? 지금 당장이라도 네 모가지를 부러뜨려 줄 수 있어.”


“그러는 당신은 뭐가 그리도 조급한데? 당장이라도 나를 죽이는 게 가능한 사람이. 왜, 일이 틀어져 회장한테 집 나가란 소리라도 들을까 봐 좀이 쑤시는가 보지?”


말끝에 물음표가 채 맺히기도 전이었다. 키다리의 오른손이 기성의 왼뺨을 강하게 강타했다. 기성은 의자에 묶인 상태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키다리의 분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그는 한 번 더 내려칠 생각이었다. 무지막지한 보폭이 기성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키다리는 기성이 옆으로 넘어진 상태에서 유일하게 앞으로 삐져나온 부분. 발목을 노려봤다.


“형씨는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잘 어울려. 말뜻인즉, 휠체어에 올라 있어도 그 모습이 크게 우스꽝스럽진 않을 거란 얘기지.”


그리고 말을 끝낸 키다리는 기성의 발목을 그대로 내리밟았다. 굵은 대나무 줄기가 동강 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신음은 짧았다. 눈물을 앗아 가기 위해 마른 안구를 쥐어짜이는 것처럼 고통이 극심했지만, 기성은 입술을 깨물고서 소리를 아꼈다. 키다리의 말을 받아칠 때와 같은 마음가짐이었다.


‘나는 여기서 죽지 않는다.’


‘저 사람은 절대 나를 죽일 수 없다.’


“어때, 가이드 양반. 외발의 처지가 된 기분이?”


덜렁거리는 오른 발목. 으스러진 달팽이의 모습 같았다. 키다리는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그를 관망했다.


“괜찮아, 괜찮아.”


“…안 괜찮으니까, 그 입 좀 다물어.”


“뭐?”


그에 키다리가 반응했다.


“난 지금 어떻게 해야 남의 눈치를 덜 보며 살 수 있을까, 하는 심도 있는 고민에 잠겨 있어. 그러니까 제발 그 넙치 같은 입 좀 다물어.”


“발 한쪽에 정신머리가 날아갔나?”


“새끼야. 이제 외발 인생이 되었으니, 남 눈치를 더 봐야 할 거 아니야. 몸이 멀쩡했을 때도 지옥이었는데, 이 앞은 어떻겠어?”


“어차피 액자에 갇혀 아래로 떨어지면 발목뿐 아니라 몸의 모든 부분이 조각날 테니까 그런 걱정은 굳이 하지 않아도 돼.”


액자에 갇힌다. 조각난다. 소각된다. 그리고, 사라진다. 키다리의 말에 기성의 머릿속을 차례차례 방문한 문구들이다. 그때부터였다. 기성의 온몸에 퍼져 있는 신경세포들이 부서진 그의 오른 발목을 기점으로 날뛰기 시작한 것은. 외면하고 있던 공포심을 찾음과 동시에 막다른 길로 향하는 자신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막다른 길목 앞을 지키고 있는 까만색의 인사 하나. 못마땅하다는 듯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는 그의 손은 당연하게도 죽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기성이 앞을 지나가면 그 인사는 활짝 웃으며 박수를 날리리라.


“형님, 전화입니다.”


키다리 뒤에 서 있던 덩치의 목소리였다.


“이리 내.”


덩치가 걸어와 전화를 건넸다.


“예, 보스.”


“어디예요? 잘 오고 있어요?”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멀지 않은 곳? 구태여 돌려서 말하는 이유가 있어요?”


존대와 함께 은은히 발려 나오는 하대. 은평 특유의 강점이었다.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아니면 닥치고 서둘러 오세요. 액자도 지금 도착하였으니까요.”


“예. 금방 가겠습니다, 보스. 잠시만 기다려 주시길.”


그리고 은평의 대답 없이 전화는 끊겼다. 키다리는 덩치를 향해 전화를 던지며 말했다.


“풀어.”


“가야 합니까?”


전화를 주머니에 넣은 덩치가 엉킨 바지춤을 정돈하며 물었다. 키다리는 말없이 한 번 고개를 끄덕거렸다. 신음하는 기성의 얼굴, 그리고 덜렁이는 그의 발목에 감긴 테이프를 조심스럽게 떼어 내는 덩치. 그곳에 기성의 곁에 얼씬거리고 있던 인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활짝 핀 미소와 함께인 그. 키다리는 움직이는 그의 입술을 천천히 속으로 따라 그렸다.     


막다른 길목에 들어선 걸 환영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