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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Sep 24. 2024

등대의 집

“회장님이 보이지 않으시네요.”


계단을 올라온 남자가 말을 반복했다. 한국인이 아니었다. 외국 사람이었다. 그가 올라온 것을 본 연희가 가장 먼저 입을 벌렸다.


“저는 남 회장님 밑에서 일하는 집사입니다. 전화를 빌릴 수 있을까요? 한 통이면 됩니다. 우선에 저는 이곳이 어디인지조차…”


“빌려 드릴 수 없습니다.”


남자가 바닥에서 말하는 연희를 보며 답했다. 단단, 딱딱, 다른 말로는 표현되지 않았다. 어눌하고 분명치 못한 발음. 남자는 공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일 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공덕 씨.”


공덕을 향한 목소리, 부드럽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회장님께서 남은 일이 있으셔서요. 시간 엄수를 중시하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과에 대한 보상은 추후 모자라지 않게 챙겨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장소가 이곳인 건 어떻게 설명하실 건지요? 그러고 보니, 아까 마주친 그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군요. 그는 어디 있습니까?”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로 툭툭 내뱉는 말소리. 말을 하는 남자에겐 이렇다 할 몸짓 하나 존재하지 않았지만, 기품이 있었다. 타국의 변변치 않은 인생을 청산키 위해 도망 나온 사람에게서 풍길 만한 것이 못되었다.


“임시로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그 친구는 회장님을 모시러 다시 돌아간 것이고요. 회장님께서 섬에 도착하시면 장소를 옮길 것입니다. 하루만 봐주시지요.”


긴 정적이 흘렀다.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남자와 그와 같은 모습의 공덕, 그리고 할 말을 잃어버린 연희. 세 사람은 비교적 점잖게 정적을 흘려보냈다.


“등을 켤 시간이군요.”


침묵을 깬 건 남자였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등대 전부를 메우고도 남을 만큼 소리의 끝맺음이 묵직했다.


“괜찮다면, 불을 좀 올려 주시겠습니까?”


공덕이 유리로 만들어진 방으로 들어가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그곳이 등대를 조작할 수 있는 공간인 듯했다.


“집으로 가시죠. 불을 올린다 해도 추위를 피하긴 어렵습니다.”


그를 들은 공덕이 한 발을 앞으로 내리며 말을 이었다.


“괜찮겠습니까, 집에는 아이가…”


“외로운 아이입니다. 상냥히 대해 주기만 한다면 저도, 제 아들도 당신을 밀어내지 않을 겁니다.”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남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등대의 등이 밝게 피어올랐다. 방에 있던 남자는 공덕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공덕의 대답은 물론입니다.’였다.


방에서 나온 남자는 공덕을 향하여 똑같이 말하였다.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아이에게 해가 가는 일은 없게끔 하겠습니다.”


‘어떻게’라는 이유를 묻는 일 대신, ‘확인’을 반복한다는 것. 남자는 대비책을 마련해 두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남자는 방의 문을 걸어 잠그면서 공덕의 눈빛을 훑었다. 진심의 여부에 마침표를 찍으려는 행위처럼 보였다. 그리고 남자는 연희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건넸다.


“불을 올려놓았습니다. 적어도 얼어 죽을 일은 없을 겁니다.”


연희가 뭐라 말을 하였지만, 등대 아래로 내려가는 둘에게는 이미 관심사 밖의 일이었다. 남자가 앞장섰고, 공덕이 그 뒤를 따랐다.


“좋은 밤 되시길.”


연희에 시선을 향해 있던 공덕이 계단 위로 첫발을 내려놓으며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연희는 등대에 홀로 남겨졌다. 그들이 떠난 뒤부터 연희는 조용한 모습을 보였다. 반항 없는 밤. 그것이 그녀가 청한 길이었다.


“섬에 도착한 뒤 부인을 뵈었습니다. 도자기 굽는 일을 하시는 것 같던데.”


남자의 집으로 향해 가는 길. 공덕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이가 생기기 이전에 생긴 버릇입니다. 어느 날부터 불을 지피기 시작하더군요. 섬의 어둠이 무섭다며.”

남자가 주머니에서 마홈의 사진을 꺼내 들었다.


“말을 맞추시죠.”


공덕이 말했다.


“아이에게만 적용되는 사안일까요?”


“아니요, 둘 다. 부인분은 어둠을 무서워하시니까요.”


그를 들은 남자는 생각이 필요한 듯 고개를 숙여 한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하죠. 아이가 보고 싶었던 회장님께 피치 못 할 사정이 생겨, 제가 하루 일찍 인사를 드리러 온 것으로.”


“아니요. 어떤 말을 해도 제 아내는 믿지 않을 겁니다.”


남자의 단호한 말에 공덕은 되물었다.


“확신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아내가 말하더군요. 뛰쳐나가는 당신의 뒷모습이 너무나 다급해,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불안했다고. 특히나 당신의 그 바지. 바지가 무서웠다더군요.”


공덕의 주변서부터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오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 조명이 밝았다. 대부분이 라탄 양식의 등. 여자의 작품인 듯했다. 여자는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었다. 남자가 먼저 신발을 벗고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안내를 부탁해요.”


남자가 다가온 여자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공덕을 보는 여자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남자는 말했다.


“아, 저희의 저녁은 7시예요. 시간이 정해져 있답니다. 잠시 후 식탁에서 뵙죠. 공덕 씨.”


“네.”


그리고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공덕은 여자를 향해 말했다.


“오후에 보인 모습은 사과드리겠습니다. 제가 너무 안일했어요. 그렇게 급하게 나가는 건 경우가 아니었는데.”


“아.”


여자가 어색하게 소리 내었다.


“그리고 또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하룻밤 신세를 져도 되겠습니까.”


“네, 그래요.”


“자는 곳은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2층 방도 괜찮으실까요?”


여자가 물었다.


“그럼요. 물론입니다.”


“2층엔 아이가 머무르고 있어요. 아직도 혼자 자는 걸 무서워한답니다. 시끄러울 거예요. 새벽이 되면 1층 왕래를 시작하거든요.”


“괜찮습니다.”


공덕이 고민치 않고 답하자, 여자는 말없이 돌아서 따라오라는 듯 걸음을 내렸다. 공덕은 움츠린 몸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집의 2층으로 오르는 길. 통로는 단출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이 놓여 있었는데, 별다른 것은 없었다. 포인트가 있다면 앞쪽 표면마다 야광 스티커가 가로로 길게 붙어 있다는 것 정도.


“이곳이에요.”


여자가 세 개의 문 중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편히 쉬세요.”


여자가 내려가고, 그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공덕은 작게 말을 뱉어냈다.


“…예상은 했지만.”


그리고 공덕은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크지 않은 방이었다. 침대 하나, 낡은 암막 커튼 하나, 잡동사니들을 쌓아 놓은 책상 하나. 그 아래 들어가 있는 가죽 의자는 외피의 가죽이 이미 다 벗겨져 나가 있었다. 사랑방치고는 남루하였으며, 창고치고는 방의 구색이 갖춰져 있었다. 공덕은 괜한 추측을 하려 들지 않았다. 입을 거리 하나 챙겨 오지 않고서 빈손으로 섬에 온 그였기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최대한 공간을 찾아, 입고 있는 옷들을 가지런히 널어놓고, 복도에 있던 두 개의 문 중에 있을 욕실에서 씻고 싶은 마음이 지금의 공덕이 속으로 떠올리고 있는 전부였다. 공덕은 걸치고 있던 옷을 한 꺼풀씩 벗기 시작했다. 외투를 벗자, 연희의 눈속임을 위해 걸치고 있었던 얇은 하와이안 셔츠가 드러났다. 무더운 피서지에서나 볼 법한 행색. 이제는 조금도 필요치 않은 것들. 여자가 고깝게 여겼던 노란색 파자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도 참 별 짓거릴 다 하는군.”


윗옷을 벗고, 다음 차례인 바지에 손을 올린 공덕이 말했다. 저 한마디가 시발점이었다. 다음의 것들은 식물의 뿌리처럼 줄줄이 엮여 나왔다. 가현이 이따위 꾐에 속아 넘어갈 허술한 인물인가. 회장은 그것을 진정으로 모르는가.


‘똑똑.’


공덕은 내리던 바지를 다시금 올리며 대답했다.


“네.”


“식사 안 하십니까? 7시가 넘었습니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공덕이 문을 열자, 편안한 복장과는 달리 편안하지 않은 얼굴을 띤 남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아, 괜찮습니다.”


공덕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보였다. 속에 없는 말이라는 걸 알기라도 한다는 듯이.


“혹시 남는 옷이 없을지요. 보시다시피 제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이 이렇다 해서요.”


“옷이야 많습니다. 방이 춥진 않을 테니 움직이기 편한 옷을 드리죠. 수건도 필요하실 테죠?”


“네, 그렇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두 번 끄덕거리고서 방 앞에서 몸을 돌렸다. 공덕이 열린 문을 닫을 때쯤, 계단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내와 아이는 식사를 끝마쳤으니, 마음 쓰지 않고 내려오셔도 됩니다. 부엌 불을 켜놓겠습니다.”


그리고 말을 마친 남자는 아래로 내려갔다.


“은근히 사람 불편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군.”


작게 투정의 목소리를 내뱉은 공덕은 문을 반쯤 열어 놓고서 입고 있던 옷을 마저 내리기 시작했다. 1층으로 내려간 남자는 금방 2층으로 올라왔다. 바지, 윗옷, 수건, 세면도구, 층층이 쌓아 손 위에 올린 채로. 마치 호텔리어 같았다. 공덕은 속옷 바람으로 손을 내밀어 그를 건네받았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방문 손잡이를 당겼다.


“씻은 뒤에 혹시나 피로가…”


문이 완전히 닫히려는 찰나였다. 남자의 말에 공덕은 다시 문을 열어야 했다. 공덕은 탈출로가 없음에 어금니를 깨물었다.


“아무래도 오늘 잠자리는 저녁을 먹어야 들 수가 있나 봅니다.”


“아, 강요는 아닙니다. 그래도 곧장 잠에 드실 거면 알려는 주세요. 켜놓은 불은 꺼야 하니까요.”


“2층에도 욕실이 있습니까?”


“예. 저기 노란 페인트로 덧칠된 곳이 욕실입니다. 씻기엔 1층의 것이 더 널찍하고 사용하기 좋습니다.”


“아뇨. 저기에 있는 것을 사용하겠습니다.”


이번만은 선수를 넘겨주지 않겠다는 공덕의 굳은 의지였다.


“그래요. 그럼, 저는 부엌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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