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부활의 장이 열리기까지 10일이 남았다. 개인으로 수놓인 마을이 하나로 응집돼, 긍정적인 활달함을 뿜어내는 유일한 기간. 거리는 분위기부터 이전과 달랐다. 달의 생계를 위한 치밀하고 각 잡힌 이웃 간의 머리싸움이 아닌, 공통된 구경거리 하나를 즐기기 위해 모인 사람들. 물론 그 와중에도 근질거림을 참지 못한 사람들은 한구석에서 지지라는 다른 존재로 속을 달래곤 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분위기를 진심으로 환영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참가자들의 사인은 확실히 수거했겠지?”
군이 여느 때처럼 진중한 손놀림으로 담배를 말며 양옆에 앉은 쌍둥이 자매를 향해 말했다.
“아마도요.”
포렌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런 포렌을 비웃듯 토슈가 이어 목소릴 내밀었다.
“아마도라니, 언니. 며칠 남지 않았다고? 전처럼 언니가 아래쪽 집들을 맡는 거 알고는 있는 거지?”
“알고 있어. …그게 변한 적은 없었으니까.”
대꾸한 포렌은 토슈의 눈을 힐끔 쳐다본 다음, 군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힘없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뭐, 모쪼록 정해 놓은 기한 안으로만 맞춰 주면 돼.”
군이 모른 척 넘어가 주길 바라는 말투로 말했다.
“이번 코스는 어디예요? 사람들이 무척 달아올라 있어요. 매번 관심이 뜨거웠다지만, 지금 마을엔 뭔가 색다른 긴장감이 돈달까.”
“그럴 수밖에 없을 거야. 이번엔 세 곳 모두 피가 튀기니까. 특히나 키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일걸. 챙겨 주던 젊은 피가 자신을 꺾겠다고 도전에 나섰으니 말이야.”
그리고 그의 이야기가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포렌이 입을 열었다.
“붙임성이 좋은 사람이에요.”
“그래, 근래에 들어온 사람치곤 평판이 괜찮더군.”
토슈는 그런 군을 아니꼽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그 사람을 지지할까 해요.”
포렌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앞서 말했듯 지킴이가 되는 세 사람은 갑옷 같은 대우를 곧장 누릴 수 있게 됐는데, 그때 일반 주민들에게 발현되는 것이 지지였다. 말하자면 일종의 줄서기였다. 마을 사람들은 각 종목에 출전하는 사람 중에 자신이 응원하는 특정인 한 사람을 상대로 호감을 표할 수 있었다. 방법은 정해진 게 없었다. 아니, 애초에 기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지지는 예외의 영역이었다. 본인의 여유에 따라, 배짱에 따라, 0부터 100까지를 그들에게 표출할 수 있었다. 타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금단의 선까지도. 지지에는 안 될 것이 없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 건가, 포렌?”
군이 한쪽 눈을 감은 채로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며 말했다.
“…아마도요.”
“제아무리 제한이 없다지만, 책임자가 직접 지지에 발을 담그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반향을 일으킬 수 있어. 그 말은 못 들은 걸로 하지.”
그리고 군의 말이 끝나자마자 토슈가 세상 가벼운 어조로 포렌을 향해 말을 던졌다.
“언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지지라니. 우리는 지금도 충분히 마을 사람들에게 가시 같은 존재라고.”
“할 거야.”
포렌의 단호한 말투에 의자에 편하게 누워 있던 군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물었다.
“왜?”
토슈도 가만있지 않았다.
“반하기라도 한 거야?”
“토슈.”
군은 오른쪽 팔로 토슈를 가로막아, 그녀가 포렌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도록 했다.
“알겠어요. 안 하던 짓을 한다니까 그러죠.”
“이유를 말해 봐. 납득할 만한 이유를 들려준다면 허락해 주지.”
그에 포렌이 군의 왼쪽에 박힌 검은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자리 내도록 꼬꾸라져 있던 목소리가 처음으로 곤두서 있었다.
“허락이 필요한 일인가요?”
“그래, 이유를 알아야겠어.”
“말하지 않겠다면요?”
“방해를 받게 되겠지.”
의자 등받이로 흰색 머플러가 쓸려 올라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포렌은 금방이라도 검붉은 피를 쥐어짤 기세로 안쪽 입술을 힘껏 깨물고 있었다. 동생 토슈에게는 일말의 눈길도 건네지 않았다. 포렌은 오로지 군만을 노려보았다. 군 역시 본 성질대로 포렌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문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계신가요-”
대치 중인 두 사람은 그 소리를 무시했다. 오히려 즐겁다는 듯 둘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 있던 토슈의 입에서 대꾸가 튀어 나갔다.
“아, 네! 들어오시면 돼요!”
토슈는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걸어갔다. 그 뒤로 어느새 따라온 포렌이 몸을 바짝 붙여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 지킴이님이셨군요?”
문을 연 토슈가 페리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문 옆에 생긴 좁은 틈으로 포렌이 몸을 숙여 빠져나갔다. 둘과 연이어 몸이 부딪혔지만, 포렌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계단을 거쳐 길목으로까지 한달음에 내빼는 포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말을 걸거나, 옷깃을 붙잡기에는 그녀의 눈에 서 있는 날이 너무나 날카로웠다.
“싸우셨나 봐요.”
페리가 포렌이 치고 지나간 자리를 손으로 툭툭 털며 말했다.
“네. 뭐…, 하지만 금방 풀릴 거예요. 큰일은 아니었으니까요.”
토슈의 눈이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를 본 페리는 작게 웃음을 내뱉고서 문을 향해 걸음을 내리며 말했다.
“그렇군요. 그럼, 저는 안으로 들어가 봐도 될까요?”
“네, 그럼요. 이쪽으로.”
길을 유도하며 토슈가 팔을 옆으로 벌렸는데 동작이 거의 페리의 골반 높이에서 형성됐다. 지난겨울, 그녀의 등장은 민트는 물론이거니와 마을 사람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 훤칠한 남자의 키를 훨씬 웃도는 2m에 다다르는 키, 거기다 최근까지 시티에 머무르며 마을과 비교가 안 되는 영양분을 구석구석까지 채워 넣어 있던 몸은 실로 압도적이었다. 긴장으로 가득할 출발선에서 히죽대며 서 있는 분위기부터 오묘했다. 지지는 온통 민트에게로만 쏠려 있었기에 관중들이 오히려 긴장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페리가 승자가 된다는 데는 이유가 불분명했다. 그러나 결과가 났고, 민트는 입을 다물었다. 관중들은 페리가 멀찍이 앞서 결승점을 통과하는 모습을 보았을 뿐이었다.
“어서 오시게.”
군이 손을 모아 예를 표하며 페리를 환영했다. 페리도 그와 똑같은 모습으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뭔가 오랜만인 거 같아요.”
“그럴 만도. 얼굴 보기에는 서로 사는 방향이 반대가 아닌가. 해서, 오늘은 어쩐 일로 오셨는가?”
“아, 대회가 다가오고 짐들이 늘어나서요.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갈피가 안 잡혀서.”
“짐?”
군이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하는 페리를 향해 되물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지지니 뭐니 하면서 본인들 살림살이를 쥐여 주는데 웃는 얼굴에 영문은 모르겠지, 안 그래도 좁은 집에 물건들은 계속 쌓여 가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요. 이게 대체 뭐죠?”
거기서 페리의 말을 들은 군이 다급히 대답하려는 찰나, 옆에서 조용히 둘의 말을 듣고 있던 토슈가 독백인지 아닌지 모를 말을 뱉어냈다.
“배부른 소리를 하시네. 한 사람에게 집의 1, 2층 전체를 쓸 수 있게 해 주는 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혜택인데. 겨우 그 정도를 불편으로 싸잡으시다뇨, 마을 곤란하게.”
“아니, 이봐요. 저는 마을에 들어온 지 이제 겨우 넉 달이 지나가는 사람이에요. 지킴이란 존재로 노동을 하는 것도 아직 익숙지 않은데, 주변 환경을 보다 신경 써서 돌봐 주셔야죠. 불편하다니까요?”
언쟁으로 이어지기 일보 직전인 페리의 높은 언변에 군은 일났다는 듯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군은 도움을 청하는 것처럼 길게 내린 자신의 머리를 중지에다 빙빙 감으며 애걸하는 눈빛으로 토슈를 바라봤지만, 그녀의 히스테리는 이미 발동 걸려 있었다.
“잘난 체도 선을 지켜야 아름답게 봐준다는 걸 모르고 계시나 봐요. 생긴 거랑 다르게 머리는 좋지 못하신가.”
“그게 무슨?! 제가 언제 잘난 체를 했다는 건데요? 그냥 물어본 거잖아요. 자기 외모가 마음에 안 든다고 다른 이를 억지로 깎아내리려는 것도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사람이 할 짓은 아닌 거 같은데요?”
“내 얼굴이 뭐가 어때서요!!!”
비어 있는 포렌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목소리가 컸다. 토슈의 목청에 페리는 순간 어깨를 들썩였지만, 이후로 승자 비슷한 평온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자세를 다잡았다.
“그만.”
군이 몸을 떨고 있는 토슈를 붙잡아 자신의 몸 뒤로 숨기며 말했다. 토슈는 저항하지 않았다.
“미안하네, 페리 양.”
페리는 ‘그래요, 뭐.’라고 답하듯 가볍게 두 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면 밖으로 나가 이야기를 나눠도 될지 물어보겠네만.”
“저는 상관없어요.”
“고맙네.”
달변가 기질이 있는 한편, 페리는 한없이 잠잠한 사색가의 모습 또한 지니고 있었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때문에, 그녀가 언제고 맹렬히 말을 하다 그치는 시간이 찾아올 때면, 사람들은 자신이 무언가 실수를 범한 것은 아닌가, 하고 속으로 생각해야 했다. 지금의 상황처럼 빌미까지 대령받은 환경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오늘은 다들 싸우기로 작정한 날인가 보네.”
길의 내리막을 따라 걸음을 내리던 군이 페리를 향해 말을 건넸다. 5분이 넘어가던 침묵 속에서의 첫 문장이었다.
“아니면 제가 남들 싸우는 모습을 보는 날일 수도 있고요.”
페리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밀려나 있던 주제를 자연스레 데려와 말을 엮었다.
“시티에서도 겪어 보지 못한 일이에요.”
페리는 자리에 멈춰 섰다. 군도 따라 걸음을 멈췄다.
“그래서 조금 무서웠나 봐요. 처음 마을에 왔을 때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은 알 거든요. 그들이 제게 주는 것들이 얼마나 가치 있고, 또 귀중한 물건인지를요.”
“그렇네. 지지에는 끝이 없지. 특히 페리 양은 산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던 민트란 존재를 꺾었으니 그러한 감이 더 강할 걸세.”
그리고 군은 천천히 발을 앞으로 내리며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페리 양은 왜 사연을 밝히지 않는 건가?”
“사연이요?”
“사람들의 사연을 많이도 들었을 테지. 그런데 페리 양의 사연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은 것 같더군.”
군의 그 한마디에 바로 전까지 이어지던 침묵이 다시 두 사람을 옭아맸다. 마치 어딘가의 어둠 속에 숨기어 있던 총구를 서로에게 겨눈 것 같았다. 마을의 바람이 몸을 뒤틀며 둘 바로 옆을 지나갔다.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된다고 속삭이면서. 군은 먼저 총을 쏘면 필패하리라는 사실을 안다는 사람처럼 말없이 대답을 기다렸다. 둘에게 밟힌 나뭇가지와 풀이 신음을 참는 듯한 소리를 냈다. 녹엽으로 둘려 있던 분위기는 점점 갈색으로 변해 갔고, 군의 침묵과 맞물려 거세게 페리를 옥죄었다. 페리는 힘들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고, 페리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서 말을 토해 냈다.
“저는 시티의 가더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