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은 나를 깨끗한 사무실로 안내했다. 커피를 내리는 순간부터 가시방석이었다. 편집장은 묘하게 훤칠한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여자 문제가 있을 것 같은 사람이랄까. 40대가 가장 끓어오르는 나이니까. 나는 다리를 최대한 오므리고, 양손을 책상 위에 가지런히 모은 채 커피가 빨리 내려오길 기도했다.
“악몽 꿨죠?”
맞은편에 앉은 성희가 물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미간을 계속 찌푸리시던데요. 얼굴에 땀도 송골송골 맺히시고.”
“아.”
그때, 엉덩방아를 찧었던 편집장이 내게 말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낙법을 제대로 쳐서 별로 안 아픕니다.”
“……”
그는 썰렁한 농담을 날리고는 홀로 킥킥 웃으며 커피를 내려놓았다.
“자. 그럼, 일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편집장은 노트와 볼펜을 꺼내고는 재킷에 꽂혀 있던 돋보기를 착용했다.
“우선은 저희 모두 신생 기업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제가 먼저 제의를 드린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공생을 하자는 거죠.”
“저희는 그저 회계 업무를 보는 작은 기업에 불과한데, 어쩌다가 저희 쪽을 알게 되셨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예산의 이유가 가장 컸습니다. 그리고, 그쪽 사장님이 가지고 계신 부지도 저희 출판사에 알맞게 필요한 크기여서요.”
“…그,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공장에 관해서는 아직 확정된 게 없어요. 사장님께서는 모르는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대신에, 출판사와 일하는 걸 내심 바라고 계시긴 합니다. 적어도 등쳐먹을 인간들은 아닐 거라고.”
그에 편집장과 성희가 동시에 대답했다.
“아유- 그럼요.”
“엥? 아닌데?”
편집장은 성희를 지그시 바라봤다.
“저희 대부분이 등쳐먹는 사람들이에요. 일단 서점에서 등쳐먹지, 출판사에서 등쳐먹지, 작가들이 가져가는 돈이 얼만지 아시잖아요. 글을 써 보셔서.”
“어이쿠야.”
편집장이 탄식했다.
“작가들 노고를 생각해서라도 절반 이상은 주는 게 옳다고 저는 늘 생각해 왔어요. 그래야 우리나라도 작가를 하려는 사람이 많아질 테고, 노벨상도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글을 못 쓰는 게 아니라니까요? 생계가 걸린 일이니 선뜻 나서질 못하는 거지.”
그리고 성희는 할 말 다 했다는 듯이 시원하게 목도리를 휘감으며 커피를 홀짝였다. 뭐랄까, 눈앞에서 천군만마를 만난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나는 작가가 아님에도 울컥함이 치솟아, 언젠가부터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아무튼 현재 상황은 그렇습니다. 임대해 드릴지 말지는 제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니 사장님께 말씀을 드려 놓죠.”
“예,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편집장의 손에 들린 볼펜이 빙빙 돌아갔다.
“글을 써 보셨다고?”
“…아, 예. 근데 등단은 못 했습니다.”
“어떤 글인가요?”
“설명할 필요도 없는 졸작입니다.”
“정말 졸작이라면 설명이라는 단어조차 쓰지 못할 테죠. 들어나 볼 수 있을까요?”
나는 한숨 쉬며 성희를 바라봤다. 성희가 수첩을 꺼내 들었다. 거기서 나는 이들이 책에 제대로 미친 사람들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봤다. 시작이 어떻게 되었더라. 시작은…
“한 남자가 재벌 집 여자를 만나 시작되는 이야기예요. 남자는 가난하고, 비루한 인생을 살고 있지만, 여자는 재력가의 손녀딸이죠. 그런데 그녀에겐 사람이 없어요. 그녀의 곁은 딱딱하고, 고지식한 허수아비들뿐이죠. 그래서 그녀는 자기 사람을 찾기 위한 여정을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남자 주인공을 만나게 되죠. 제목이 식물인간인 이유는 재벌가의 속사정이 소설 전체를 아우르는 이야기이기에 그렇게 지었습니다.”
말을 마치자, 성희가 물음을 건네왔다.
“실제로 식물인간 상태인 인물이 있는 건가요?”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대답했다.
“네. 여자 주인공의 어머니가 그렇습니다.”
그 말에 편집장이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런 상태에 계신 어머니를 따님은 모르는 거고요?”
“네.”
솔직히 놀랐다. 내가 몇 마디를 했다고. 이 정도는 되어야 책을 찍어 낼 자격이 있는 건가.
“미스터리와 스릴러를 합친 소설이군요. 지금 들어 본 이야기로만 봐서는 그렇게 졸작은 아닌 듯한데. 안 그래?”
“특이한 소재긴 하네요. 가난한 사람과 부잣집의 로맨스는 흔한 설정이긴 하지만.”
“그러니까. 내가 보니 부잣집 집안에 관한 이야기가 주인 것 같아. 미생 씨의 관상을 봐도 단순한 로맨스물을 쓸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미생 씨, 그거 파일 있어요?”
편집장의 물음에 성희가 대신 대답했다.
“있으시대요. 이십 대가 담겨 있는 녀석이라 절대 못 버리겠다고. 내 청춘이 담긴 자식을 어떻게 그리 쉽게 버릴 수 있었겠느냐고.”
“자식이라는 말은 안 했던 것 같은데요.”
편집장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결심을 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일로 파일 좀 보내 봐요. 한글? PDF?”
“한글요.”
“오케이.”
내가 지금 10년 전 습작을 투고하러 출판사에 방문한 건가. 어느새 내 해방이 사라져 버렸다. 두 사람은 나를 출구까지 배웅했다. 휴대전화를 꺼내 보니 설화의 전화가 무려 13통이나 찍혀 있었다. 나는 발신 버튼을 누르려다가 한숨이 불쑥 새어 나와, 세븐스타를 꺼냈다. 글을 쓴답시고 시작한 담배. 흡연이 습관이 된 결정적인 요인은 영화였다. 비극적인 내용에, 처절하게 막을 내린 남자 주인공. 필 수밖에 없었다. 아니, 피우고 싶었다. 그 특유의 떫음을 경험하지 못한 것으로 채우고 싶었으니까. 그런 생각 중에 어느새 담배를 다 피웠다. 나는 발신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들리지도 않았다.
“야!! 갑자기 나가 버리면 어떡해!! 회사 생활이 개똥으로 보여?! 내가 늘 말했지?! 회사 생활 좀 차분히 하라고!! 조급하면 일을 그르친다고!!! 이게 진짜 항상 말로만 하니까. 야! 듣고 있어?”
“팀장님, 지금 혼자 계시죠?”
“그래! 왜!”
“반말 쓰시길래요.”
“……그래서?”
“팀장님 혼자 계실 때 야릇해지시잖아요.”
못 알아들을 괴성이 전화 너머에서 들려왔다.
“이야기는 잘됐어요.”
“무슨 이야기가 어떻게 잘됐는데?”
“여기서 원하는 건 두 가지예요. 회계 업무와 땅.”
“땅? 땅은 뭔데? 설마하니 영감님 부지를 말하는 거야? 회사 뒤에 있는?”
“네. 거기에 공장을 만들고 싶다고 하네요.”
“자기네들 책 찍으려고?”
“네네.”
“근데 그거 사장님 땅인데 네가 맘대로 결정해도 되는 거야?”
“저는 뭐, 별다른 말 안 했어요. 사장님께 말씀드려 본다고만 했지.”
“기다려 봐. 사장한테 전화해 볼게.”
“알겠어요.”
“그리고, 야.”
“네.”
“혼자 있어서가 아니라 네가 있어서 야릇해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