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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Aug 19. 2024

매드가 놓친 친절의 끈

짤막하게 이어진 대화는 어떠한 자취도 남기지 않았다. 두 사람의 그림자 끝단이 사라지는 무렵에는 없었던 일이 있었던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음영조차 겹치지 않았다. 그들이 가는 길목 방향으로 램프를 들고 서 있던 키는 몸을 돌려 매드가 남긴 수레를 비추었다. 페리의 눈빛이 따라 움직였다. 디케이가 등장함과 동시에 줄곧 입을 닫고 있던 페리는 여전히 말할 의지가 없는 얼굴을 띠고 있었다. 키 역시도 달리 말을 꺼내고 싶지 않은 듯이 그녀의 침묵을 그대로 둔 채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지난번보다 많은 사람이 깨어 있습니까?”


검정에 가까운 길에서 매드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그보다 세 걸음 정도 앞선 곳에서 디케이의 바쁜 발소리가 일고 있었다.


“그래. 아마 마을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깨어 있을 거야.”


그리고, 매드는 대꾸를 하지 못했다. 멀리서 서성이는 불빛이 벌써 수많은 대답을 안겨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드는 앞의 디케이를 밀치고서 불빛 속으로 내달렸다. 이미 그의 걸음에서 반쯤 이성을 잃은 더미들이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횃불을 든 사람이 어림잡아 일곱은 넘어 보였다. 그리고 그 뒤의 그늘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뭡니까?”


매드가 이를 꽉 깨문 상태로 말했다. 그늘에 압도당한 그는, 디케이를 두고 앞서 왔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했다. 그리고 멀리서 걸음을 내려놓고 있던 디케이가 전과 같은 발소리로 매드의 앞에 멈춰 섰다.


“우선은 사과부터 받게, 매드.”


말과 동시에 디케이는 매드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허리를 내려 있는 그 상태로 말을 이어 나갔다.


“자네를 설득하는 게, 오늘 내게 있어 가장 큰 목표여서 말이야. 모든 일의 정황을 말해 줄 터이니, 오늘 하루만 분노를 억눌러 줄 수 있겠나?”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이야기가 길어. 굳이 설명하자면, 진실이 끌어올려진 상황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


“진실요? 무슨 진실요?”


“마을의 지킴이가 도둑 신분이라는 사실.”


일순 디케이의 안경에 커다란 불꽃이 흔들렸다. 그를 본 매드는 흠칫하며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키 씨의 횃불까지 훔쳐 온 걸 보니, 진심이시군요. 하지만, 이제 와서요? 지금 진실을 밝힌다고 달라질 게 있습니까? 오히려 사람들에게 마을에 대한 불신만 키워 놓는 꼴이 되지 않을까요? 디케이 씨가 똑똑한 사람인 건 잘 알고 있습니다만, 현재의 저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그리고 매드는 불현듯 생각이 떠오른 듯 말을 덧붙였다.


“이 상황을 키 씨는 알고 있습니까?”


“아니. 알 수가 없지. 자네들 셋이 시티로 나가 있는 사이에 내가 벌인 일이니까.”


디케이는 불빛의 각도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마를 매드의 앞으로 내밀며 손가락으로 툭툭 쳐 보였다. 디케이의 상처를 본 매드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한숨을 푹 내쉬어 보였다. 그러고는 이내 입을 다물고는 침묵을 가졌는데, 디케이는 그런 매드의 속내를 알아차린 듯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를 몰아붙였다. 매드가 한시라도 어긋나지 않게, 디케이는 계속해서 말을 건넸다.


“일이 이대로 순리를 따라 흘러가게 된다면, 마을은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물론, 맨 처음 흙바닥에서 생활하던 때보다는 풍족하겠지. 매드 자넨 모르겠지만, 우리 대부분은 쌀이 없던 당시에도 살아갔다네. 그게 핵심이야. 현재 이 마을은 전보다 진보했다는 거니까. 게다가 지금 우리에겐 마토라는 존재까지 있어. 시간이 갈수록 경작지의 범위도 점점 늘어날 거라고.”


“우리가 추구하는 게 뭔가? 차별주의의 원천 봉쇄와 완전한 독립 아닌가. 내가 볼 땐 지금이 적기야. 이만한 시기가 없어. 게다가 당장의 대회도 코앞이니…”

     

“대충 이해했습니다.”


매드가 디케이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그리곤 달리 반항할 마음은 없다는 걸 보여 주겠다는 듯이 힘이 들어간 어깨를 털어 냈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이번 일을 벌인 것이 다른 데 이유가 있어서가 아님을 맹세할 수 있으십니까?”


힘만 센 과거 시티인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완전히 아랫것으로 상대를 취급하고 있던 사람이 정곡을 찔렸을 때 나오는 표정, 딱 그것이었다. 디케이는 특히 처음 그 순간에 티가 많이 났다. 그 말을 들은 직후, 못 들을 말이라도 들었다는 듯이 얼굴이 꿈틀거렸다. 특히나 말미에 보인 경련에 가까운 떨림은 대답을 해야 한다는 자각과, 예상치를 벗어난 행동을 마주했다는 데에서 온 괴리를 제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매드는 평소 성격과는 다르게 꽤 긴 시간을 기다려 주었다. 상대가 디케이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적은 대략 11초간 둘의 사이를 떨어뜨려 놓았다.


“솔직히 당황했네, 매드.”


디케이가 매드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매드는 디케이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을 들었다.


“그런 오해를 사는 일은 전혀 뜻밖이었달까. 마을 앞에선 제법 설득력 있겠어. 하지만, 아니야. 이번 일에 내 개인의 감정이 들어갈 틈이 어딨다고. 이 사건의 끝에서 내가 얻을 것도 없고 말이야. 안 그런가, 매드.”


“맹세의 말로 받아들이라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맹세하지.”


둘의 고개가 교차로 한 번씩 움직였다. 매드는 뒤이어 결심한 듯 그러한 고갯짓을 몇 번 더 반복했다. 그리고 횃불이 있는 쪽을 돌아보며 매드가 말했다.


“모두가 모인 건가요?”


“아니. 전부는 아니야.”


말을 들은 매드가 꺼질 듯한 한숨을 크게 내뱉으며 말했다.


“후…, 맞아 죽을 일은 없겠죠?”


“매는 내가 미리 맞아 놓았으니, 괜찮을 거야. 매드 자네는 단순히 증인 역할만 해 주면 돼. 나를 믿지 못해 나온 이들이니까.”


“알겠습니다. 저는 디케이 씨만 믿고 가겠습니다.”


“믿어 줘서 고맙네. 다만 한 가지.”


“말씀하십시오.”


“최대한 부드럽게 말을 하길 부탁하지.”


두 사람은 횃불을 향해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 디케이가 먼저 걸음을 내렸고, 매드가 그 뒤를 따랐다. 횃불에 가까워질수록 매드의 얼굴이 붉게 타들어 갔다. 몸짓 또한 다르지 않았다. 어딘가 불편하고, 게으르게 변한 것 같기도 했다. 때로는 병자의 흉내를 내는 듯 보였다. 걸음은 이어졌고, 시간은 흘러갔다. 넓게 퍼져 있던 횃불들이 점을 찍은 듯 한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디케이가 그 모두를 안으려는 듯이 중앙으로 발을 들였다.


“매드 씨를 모셨습니다.”


타들어 가는 불꽃 너머에선 대답이 없었다. 다들 하나같이 불이 꺼지길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디케이가 말을 이어 했다.


“비난을 던지시려거든, 모든 원망을 제게로 쏘아 주십시오. 과거든, 현재든, 지킴이들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그들이 해 온 모두는 마을의 여러분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개인의 탐욕도, 편협한 사치도, 그들 모두는 참아 왔습니다. 진실이 밝혀진 지금, 저희에게 필요한 감정은 용서, 그 하나뿐일 것입니다.”


그리고 디케이의 말이 끝나자, 여러 개의 횃불 중 가장 왼쪽에 있던 불꽃이 움직였다. 처음부터 불꽃의 높이가 가장 낮은 쪽이었다. 암흑과 빛이 뒤섞여 일렁이는 한편, 얼굴 사이사이로 불규칙적으로 나 있는 굴곡들이 넘실거렸다.


“그러니까 이 일이, 지킴이가 생기고부터 계속된 역사라는 말씀이십니까? 그간 우리가 씹고, 삼켰던 곡물들이 시티서부터 떨어져 나온 부산물인 거고요? 제 이해가 맞습니까?”


“비극적이게도 그렇습니다.”


디케이가 부산물이라는 단어에도 토 달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말을 들은 그 사람은 전보다 심한 굴곡을 얼굴에 덧씌우며 몸에 불을 붙일 기세로 횃불을 마구 휘둘렀다. 디케이는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매드가 선 곳에서 소리가 들렸다. 매드는 아주 천천히 발을 내렸다. 100은 쉽게 웃돌 몸무게임에도 절반이 된 양 소리가 났다. 디케이의 바로 뒤까지 몸을 붙인 매드는 헛기침을 옅게 한 다음, 추레하게 변한 자신의 발끝을 사람들 앞으로 내밀었다. 매드는 그런 인간이었다.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며, 반기를 내밀 줄도 모르는 나약한 사람. 때문인지, 매드는 제법 얼어 있었다. 그 큰 덩치로도 압도할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게 우습게 보이긴 했지만, 그는 정말 어찌할 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의 꼴을 하고 있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시선이 디케이의 뒤를 향해 날아가 꽂혔다. 만약 디케이가 그를 알아차렸다면, 아마도 사람들의 불그스레한 낯빛보다 침묵의 냄새 때문일 것이다. 타닥타닥하는 소리가 울리는 데서 나는 냄새는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맡을 수가 있었다. 불을 든 사람들, 그리고 그 뒤에 숨어 지금까지를 보고 있던 사람들, 그들이 내쉬는 숨은 진즉에 축축했고, 또 고약했다. 고약하다는 건 최소한 서 있는 그들끼리는 알 것이다. 그 뻣뻣하던 디케이가 숙이고 있으니 말이다. 단지, 어둠 속의 그들은 펼쳐질 미래의 일보다 짧게 잇고 말 눈앞의 현실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 테지만. 일단은 그랬다.


“하,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디케이 옆으로 온 매드가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리고 또다시 고약한 침묵이 장소를 뒤덮었다. 현명한 사람이 되기라도 작정한 듯 그 누구도 먼저 대답하고 나서지 않았다. 디케이와 매드 둘 중 한 사람은 속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불을 몸에 붙이고 그를 흔들어 달라고.


“디케이 씨께 들으셨겠지만, 개인적인 사설을 늘어놓자면, 저희 역시 편한 마음으로만 일을 하진 않았습니다. 아니, 할 수 없었습니다. 그건 확실합니다. 마을서 시티로의 길은 회상을 불러일으키니까요. 분명 위험한 상황임에도 그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것이 가장 괴로웠습니다.”


디케이는 말하는 매드를 최소한의 곁눈질로 계속 응시했다. 언제고 돌변하여 거친 언행을 내뱉을지 모르는 그를 감시하는 듯이.

“그간의 호사는 어떻게 생각하죠?”

“맞아요. 당신들의 거짓은 도를 넘었어요. 게다가, 지킴이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겼던 대회, 대회는 어떻게 변명할 겁니까?”


말들은 연이어 횃불 뒤에서 튀어져 나왔고, 한 번 물꼬를 튼 그들은 모두 이기적인 인간상으로 변해 있었다. 마치 눈앞의 상대에게 오롯한 잘못의 족쇄가 채워져 있다는 듯이. 미지근한 바람과도 같이 지나간 말소리는 디케이와 매드가 선 곳을 늪으로 뒤바꾸었다. 두 사람은 같은 감정을 느끼는 듯했다. 디케이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고개를 돌렸고, 매드는 이제 횃불 없이도 얼굴이 붉었다. 늪은 발을 들인 두 사람을 점점 더 깊이 데려갔다. 무엇도 존재하지 않고, 어떠한 것과도 소통할 수 없는, 철저히 고립된 장소. 입은 꿰이고 귀는 부풀어 오른 곳으로. 늪 아래에는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미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엔 어떠한 냄새도 깃들어 있지 않았으며, 오로지 애매한 온기만이 스며 있었다. 그에 먼저 정신을 놓은 건 매드였다. 디케이는 머리를 굴려 발버둥을 최대한 자제한 채 상반신 남겨 놓기를 성공하였다면, 매드는 그렇지 못했다. 그는 이질적인 감각과 분위기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고, 속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무엇에 자신을 그대로 올려놓았다. 그래서 매드의 발버둥은 억셌고, 눅진한 늪의 더욱 깊은 곳으로 잠겼다. 아마 매드는 그 때문에 잡고 있던 친절의 끈을 놓쳤을 것이다.


“이런, 개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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