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가 열리는 날. 개최 장소는 단상 앞 평지서부터 시작되었다. 부활의 장은 끝내 열리지 못했다. 전 주까지만 하더라도 부흥의 기류를 타고 신이 난 채 대회 준비를 하던 군과 포렌, 토슈, 세 사람은 하루아침에 평범한 일손으로 전락했다. 물론 그들 셋은 고운 얼굴로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성난 군중을 보며 조용히 물러날 뿐이었다. 투표는 피크의 지시하에, 종이와 펜으로써 진행되는 걸로 결정이 났다. 종이는 마을에 있어 귀한 축에 속하는 물건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사용처가 애매하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소금도 후추도 아닌, 설탕과 사카린의 경계 정도. 물론, 고전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토에게는 예외였다. 다시 말해, 군이 담배 마는 종이를 내놓아야 했던 이유는 그가 글쟁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경우는 딱 두 가지입니다.”
단상 앞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걸친 디케이가 말했다. 일전의 사고로 확성기가 부서졌기에, 증폭을 위한 장치는 들려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멸망의 날이라도 온 듯한 침울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을 사람 모두가 모인 규모는 네모 넓적한 단상 두 개를 나란히 붙여 놓은 것과 크기가 흡사했다. 평소와 가장 다른 것은 제일 앞쪽 열에 자리한 얼굴들이었다. 그간에 있어 불문율과 같은 일이었다. 지킴이를 포함한 자기 영역이 확고한 사람들, 그들이 무조건 앞줄에 섰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첫째로 눈에 띄는 것은 맨 뒷줄에 자리한 피크 내외였다. 오랜만에 집에서 내려온 워블을 향해 끊임없이 뻗어가는 사람들의 눈길은 덤이었다.
“잉크 없는 펜과 종이입니다.”
디케이가 펜과 종이를 각각 사람들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지킴이 철폐에 동의하시면 구멍을. 철폐에 동의하지 않으시면 종이를 그대로 두시면 되겠습니다.”
디케이의 눈빛은 말을 해 나갈수록 무섭도록 비장하게 변했다. 크게 목소리를 키워 감에 따라, 긁히어 나오는 목소리도 그랬다.
“종이는 마을 사람 수에 맞게 준비하였습니다. 무효표의 시비가 나오지 않게 괜한 서명을 바라지는 않겠습니다. 구멍, 원본. 둘 중 하나면 됩니다.”
그리고 디케이는 몸을 돌려, 단상 뒤쪽의 그림자를 향해 말했다.
“투표는 저곳에서 진행될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천막으로 하늘과 동시에 사방을 둘러싸 놓았습니다. 누출로 인한 피해는 절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걸, 저 디케이가 약속하겠습니다.”
사람 중 몇몇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누가 봐도 구멍을 뚫을 사람이었다. 정확히 그들 사이였다. 누구도 관심 가지지 않았고, 인기척조차 풍기지 않던 곳. 낮은 곳에서의 목소리였지만, 정말이지 장소를 울리는 소리였다.
“지킴이가 사라진 뒤에는 어떻게 할 셈인가?”
레드였다. 그가 벌린 입을 닫고, 말을 그칠 때면 늘 뒤따르던 코웃음 치는 소리. 오늘 이 자리에서는 그 누구의 입에서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벽처럼 서 있던 사람들이 레드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길을 여는 사람들의 눈빛은 강렬했다. 그들 중 젊은 몇몇은 디케이와 레드를 번갈아 보며 잔뜩 경직된 몸놀림을 보이는 이들도 존재했다. 그리고 디케이의 대답 소리가 울렸다.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여기에 계신 분들 모두는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어려운 말을 꺼내 주신 레드 씨를 포함해서 말이죠.”
잠깐 말을 끊은 디케이는 매우 격하게 머리를 긁었다. 그리곤 끝내 스스로의 분에 못 이긴 듯, 떼어 낸 손으로써 허망하게 허공을 휘저었다.
“초창기의 마을의 형태로 돌아갈 것입니다. 자유 하나만을 갈구하며 다른 무엇에도 눈을 두지 않던 우리들 본연의 시절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시절은 당연하게도, 배가 고플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쫓기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내 왔듯이 시간은 흘러가기 마련입니다.”
거기서 레드는 반문했다.
“자네는 확신할 수 있나? 여기 있는 모두는 도피를 꾀한 자들이야. 꿈으로의 도피도 아니지. 당장 마주한 현실이 싫어 무의 땅으로 뿌리를 옮겨 온 이들이라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레드 씨.”
디케이가 싸늘하게 말하자, 레드를 보는 사람들의 얼굴엔 걱정스러움까지 깃들기 시작했다. 그에 레드는 웃으며 대답했다.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듣고 싶은 걸세. 자네 역시도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닌가.”
어디선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일었고, 퓨티의 목소리가 다음으로 그 목소리를 덮었다. 대충, 레드에 대한 경탄과 동조였다. 그런 자리는 사람들이 모인 곳 군데군데로 번져 나갔다.
“상황은 비슷하지만, 그때와는 다를 겁니다. 우리에겐 경작지가 생겼으니까요. 기존에 드시던 양에서 절반가량을 줄이면 되는 수치입니다.”
그에 레드가 말했다.
“절반 가까이. 그래, 여기 있는 우리는 자네 덕에 그 광경을 보았지. 그간 지킴이들이 마음고생을 해 왔단 사실도 함께 말이야.”
“그 포상으로 그들은 지금껏 무한한 편의를 누려 왔습니다.”
디케이가 또 한 번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레드가 그와 전혀 반대되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디케이 자네는 지킴이들에게 받은 편의가 없나? 의사인 자네에게 그들의 존재는 누구보다 쏠쏠하였을 것 같은데.”
“…해서, 지금 바로잡으려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참회를 하면서 말이죠.”
이를 악물며 나오는 말에도 레드는 조금의 주춤하는 모습 없이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신기함의 연속이란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참회라, 그런 참회라면 혼자 해도 되지 않았을까. 아, 물론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말일세.”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디케이의 입에서 직설적인 말이 나왔다.
“레드 씨, 지금 하는 행동들이 독단적인 것이 맞습니까?”
레드의 주변은 이제 작대기로 원을 그을 수 있을 만큼이나 공간이 넓혀져 있었다. 그 주변, 집중한 사람들의 눈꺼풀이 마치 보이지 않는 힘에 떠밀린 듯 레드의 입술에 맞추어 움직였다.
“그 말은 조금 불쾌하군. 디케이, 자네는 방금 마을 사람 전부를 의심한 걸세. 그리고 이쯤에서 모두가 묻고 싶을 테니, 입을 떼 놓은 내가 마저 말을 하겠네.”
“자네야말로 모두를 배신한 이유가 무엇인가?”
“배신이라고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디케이가 눈을 부릅뜨며 대꾸했다.
“진실을 선두에 앞세웠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로부터 등을 돌린 그 시점은 배신이 맞지. 투표를 마치고 얼마의 사람이 자네에게 갈지는 모르겠네만, 현재를 놓고 본다면 자네는 틀림없는 배신자야.”
단상 아래로 이어지는 세 칸의 계단이 끊어질 듯 소리를 냈다. 길은 앞쪽 열부터였다. 사람들 사이로 길이 열릴 때마다 흰색의 헐렁한 가운이 펄럭였다. 디케이는 금방 레드의 코앞으로 다가와 섰다. 자리에 선 디케이는 몸을 움츠린 주변인들과는 다르게 눈만을 아래로 내리깔며 레드를 노려봤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 그와 비슷한 속도로 또 하나의 길이 열리고 있었다.
“그만들 하세요!”
고개를 보인 것은 퓨티였다. 인파에서 나온 퓨티는 곧장 레드의 옆구리로 손을 넣어 팔을 휘감으며 소리쳤다. 둘 다를 향한 말 같았지만, 퓨티의 시선은 오로지 디케이를 향해 있었다. 레드는 손으로 퓨티의 머리를 토닥였다. 거기서 사람들은 한 번 더 경탄을 보였다.
“당신이 이 자리를 흔드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제가 마을 사람들에게 배신자 소리를 듣는 것도 괜찮을 따름입니다. 단지 하나, 여러분들이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알던 독립은 철저히 실패했고, 우리가 앞으로 지향해야 할 방향은 전과는 달라야 한다는 사실을요.”
거기서 사람들은 다시 한번 갈라졌다. 명료하게 이등분이 됐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격앙된 말소리가 양쪽에서 높게 솟구쳤더라면, 사람들은 침묵 속의 불편함을 감내하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너무도 조용히 있었으며, 작은 수신호를 통해서만 적과 아군을 구분 지었다. 머리가 좋은 디케이도 그를 감지한 듯, 투표 진행을 재촉하는 말은 단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레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레드는 퓨티가 곁으로 옴과 동시에 홀연히 입을 다물었다. 디케이는 단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디케이는 피크가 있는 뒤쪽 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디케이가 뒤로 멀어져 갈수록 인파 사이로 벌어져 있던 공간들이 원래대로 메꿔져 갔다.
“멋있으셨어요.”
퓨티가 작은 목소리로 레드를 향해 말했다.
“그러니.”
레드가 다시금 퓨티의 머리를 토닥이며 대답했다.
“어느 누구도 예상 못 했을 거예요. 다름 아닌 할아버지께서 나서실 줄은요.”
“나도 몰랐단다, 퓨티야.”
“정말 보기 좋았어요. 진작 이렇게 목소리를 내셨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던걸요. 물론 저야 할아버지께서 원래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요.”
“그렇게 말해 주니 기분이 좋구나. 나는 단지…”
흐리게 남긴 말끝과 더불어 레드의 시선이 뒤쪽으로 넘어갔다. 낮은 키임에도 단번에 그녀가 있는 곳을 찾아낸 것을 보아, 사람이 모이는 순간부터 그곳을 바라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레드를 따라 시선을 돌린 퓨티도 확신하는 미소와 함께 단번에 민트가 보이는 곳에서 눈을 멈춰 세웠다. 민트는 피크와 디케이 사이에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아름다우시죠, 민트 씨.”
퓨티가 레드를 대신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마을에 몇 없는 좋은 사람이지.”
“맞아요. 사실을 알고 나니 더욱 그러해 보여요. 몇 번인가 저희 집에 좋은 음식을 나눠 주신 적이 있거든요. 저는 단순하게 생각했어요. 지킴이기 때문에 여유가 있는 거라고요. 하지만 아니었어요. 민트 씨는 목숨을 거셨던 거예요.”
퓨티의 말을 들은 레드는 무언갈 전하려는 듯이 희미하고도 아련한 눈빛으로써 이제는 몸을 돌린 민트의 옆모습을 향하여 재차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이제, 줄은 떠들썩하지 않았다. 투표를 앞둔 사람들은 철저히 개인이 되어 있었다. 또한, 듣는 일만을 당연하게 여기던 사람들은 달리 말이 없었다. 하는 법을 모르는 듯 보일 정도였다. 반대로 디케이가 있는 곳은 너무도 시끄러웠다.
“내가 강압적이라고? 오, 피크. 적어도 자네한테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어.”
“고작 내 자격 따지자고 모인 자리가 아니잖나, 디케이. 지금 네가 보인 행동은 사람들로 하여금 혼란을 야기하고 있어. 자중해.”
“자중? 이게 지금 자중할 사안으로 보여??”
디케이가 피크의 코앞으로 뻗친 팔을 맹렬히 뒤흔들며 말을 뱉어냈다. 얼굴에 거의 닿을 거리였다. 피크 바로 옆의 워블은 가만히 있었다. 그 누구도 그의 행동을 말리고 나서지 않았다.
“인간은 분위기에 휩쓸리는 동물이야. 이 분위기가 계속되면 네가 바라는 결과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어.”
그에 디케이는 순탄한 항해 길을 점지해 둔 선장처럼 여유 있는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아주 깊고도 묵직한 목소리였다.
“비겁하게 이제 와 발뺌하지 마. 이 사람들은 자네의 공포 정치 아래에서 자란 인간들이니까.”
“인정하지.”
피크가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뒷말을 붙였다.
“그러니 이만하고 자네 자리로 돌아가 보도록 해. 오늘 내로 결과를 봐야 할 것 아닌가.”
“…그래. 그렇게 하지. 피크, 자넨 방금 나를 말릴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차 버린 거야.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 투표는 압도적일 거고, 우리 역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디케이는 걸음을 돌렸다. 막혀 있던 길 위의 사람들이 소리 없이 길을 텄다. 단상에 오른 디케이는 중간 열을 시작으로 세 칸의 계단 앞까지 붙어 있는 사람들의 길을 정리했다. 달리 저항하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다들 마음을 굳힌 듯이 디케이의 지시대로 가만히 자리를 이동했다. 그리고 어느덧 한 마리의 지렁이처럼 생긴 줄이 단상 아래로 형성되었다. 디케이가 지체치 않고 소리쳤다.
“투표를 시행하겠습니다!!”
첫 번째 사람이 계단을 올랐다. 디케이는 이미 그 뒤의 사람에게로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단상에 오른 첫 번째 사람은 모든 게 낯설고, 또 두렵다는 듯이 시선을 한곳에 두지 못하고 있었다.
“저리로 들어가면 되는 건가요?”
누가 봐도 입구가 하나뿐인 천막을 바라보며 남자가 물었다.
“네. 종이와 펜은 안쪽에 비치되어 있습니다. 투표를 마친 뒤엔 들어갔던 곳으로 다시 나오시면 됩니다.”
설명을 들은 남자는 제자리서 우물거렸다. 디케이를 비롯한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를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끝내 걸음을 떼지 못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무슨 문제 있습니까?”
디케이가 물었다.
“제가 투표한 결과는 다음 사람이 무조건 알게 되지 않습니까.”
남자가 대답했다.
“예?”
그리고 디케이의 반응을 본 남자는 같은 말을 처음보다 조금 더 부풀려 토하였다.
“제 투표 결과는 모두가 알게 될 거라고요.”
디케이의 눈이 질끈 감겼다. 그리고 디케이는 눈앞의 상황을 부정하듯이 고개를 좌우로 뒤흔들었다. 꾹 눌린 목소리가 남자를 향해 갔다.
“그렇지 않습니다. 안쪽에 결과물을 은폐할 수 있는 상자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다음 사람이 그곳을 들추어 본다면요? 다음 사람 역시 회피하고 싶을 겁니다. 더욱이 두 번째 사람은 첫 번째인 저와 의견이 반대되는 경우가 반반일 뿐이기에, 제 결과가 궁금할 수밖에 없을 테죠. 본인의 해명을 위해서도 필요로 할 테고요.”
남자의 입에서 나온 해명이라는 단어. 거기에서 남자를 마냥 귀찮게 바라보던 사람들의 눈빛이 뒤바뀌었다. 굽이굽이 휘어져 있던 열의 마디가 양쪽에서 압박을 받은 듯 불룩하게 튀어나오더니 누군가가 퉁 하고 밀려 나왔다. 오늘따라 검은 모자에 가린 얼굴 면적이 넓어 보였다. 열에서 벗어난 그를 잡으려는 사람들의 손들이 가녀린 가시처럼 길게 뻗쳤지만, 거침과 날쌤 앞에서 모두 허공을 저었다. 홈은 곧장 디케이와 남자가 대치하고 있는 자리 옆으로 내달렸고, 계단을 훌쩍 뛰어넘어 단상 중앙으로 몸을 내던졌다. 단상에 쓰러진 홈의 몰골이 꼭 대회 하나를 끝마친 참가자의 모습 같았다. 몸을 일으킨 홈은 붉은 눈으로 디케이를 바라봤다.
“제가 하겠습니다. 첫 번째.”
홈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