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영강 Aug 17. 2024

마을의 균열

굵다란 비가 내린 뒤의 모습처럼 마을은 온통 얼룩으로 뒤덮여 있었다. 디케이가 단상에 올랐다는 소식은 곧 닥칠 대회 개최에 열광하던 사람들의 태도를 완전히 고쳐 놓는 역행의 발판이 되었다. 난리와도 같던 지지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고, 홈을 포함한 몇몇 도전자들 역시 의욕을 잃은 채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현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현 지킴이 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사는 집의 길목에는 흥분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있었다. 그리고 당사자 없는 공세가 이어졌다.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이들의 표정은 모두 균일했다. 겁에 질려 있거나, 화가 나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감정보다 이성을 앞세운 쪽이 전자였다. 적어도 그들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따질 줄 알았다. 침묵으로 이어져 오던 시티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이며, 경작지에서 나오는 구체적인 식량 의 양, 마을의 정체성 문제. 그들은 그런 것들을 생각했다. 반면, 화를 내는 이들은 호소가 우선이었다. 욕설은 기본이었고, 진실을 끄집어 올린 디케이와 사실을 함구하고 있던 사람들, 특히 마토 한 사람을 향한 적개심이 상당했다. 부족한 배움을 수치로 품고 있던 사람일수록 그런 감이 더했다. 혼돈처럼 진행되던 마을의 난장판이 진정되기 시작한 건, 피크가 모습을 보였을 때였다. 한창 다툼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 단상에서 피크의 목소리가 울렸다.


근 10년. 10년 만에 울린 목소리였다.


“이번 대회는 개최되지 않습니다.”


처절하리만치 가라앉고, 깊숙이 자리한 인간의 본능적 동정심을 유발하는 목소리였다. 강함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소리의 크기까지 작았기에, 사람들은 더욱 숨죽여 그를 들었다. 이후로 피크는 별달리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모여 있는 군중들에게로 사과를 건넸고, 분노의 방향을 자신에게로 돌려 달라는 말을 덧붙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투표 시행 일을 알렸다. 피크의 태도에 사람들은 관대했다. 그다음 날까지 마을엔 더 이상의 시끄러움이 일지 않았다. 그리고 투표를 앞둔 전날 밤, 일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 모두가 군의 집에 모였다. 총 8명이었다. 여덟 사람이 자리에 붙어 앉았다. 가운데만 비우고서 정사각형을 정면, 그리고 사선으로 겹쳐 놓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사각형의 꼭짓점에 사람들이 자리했다.


“디케이, 이 개새끼야!! 네놈 하나 때문에 망가진 마을 꼬락서니를 봐. 이제 통쾌해? 이게 네가 바라던 결과야? 어?!!”


대화는 군의 고성과 함께 시작되었다. 들어올 사람 수에 맞추어 가구들을 구석에 몰아 놓은 탓에 잡을 물건들이 없었지만, 군은 무언갈 던지고 싶다는 듯이 자꾸만 눈을 두리번 댔다. 그리고 그 옆의 피크가 말했다.


“침착하지. 흥분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잖나.”


“침착? 그래, 난 반대로 물어야겠어, 피크. 너는 왜 그렇게 침착한 거야? 저 개새끼랑 미리 입이라도 맞추었어? 그런 거야?”


“조금도 그렇지 않아.”


피크가 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였다. 그리고 군의 맞은편에 앉은 마토가 입을 열었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합니다.”


일곱의 시선이 일제히 그리로 움직였다. 마토는 시간을 끌지 않았다.


“지금껏 들키지 않은 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한번은 사람들이 멍청해서 그런 것이다, 라는 생각을 품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반응을 보니 그때의 생각이 완전히 잘못됐던 것이더군요. 사람들이 멍청한 게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선했던 것이었습니다.”


그에 그의 오른편에서 말을 듣고 있던 민트가 되물었다.


“선하다고요?”


“그렇습니다. 뻔히 보이는 아이의 거짓말을 넘어가 주는 부모처럼 말이죠. 지금 마을을 돌아보면 그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들이, 행동에서 나오는 몸짓들이 이야기해 줍니다. 애초에 알고 있던 사실이라고, 왜 모른 척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냐고 반발하면서요.”


“그렇게 믿고 싶은 자네만의 착각은 아니고?”


군이 서 있던 몸을 의자에 앉히며 말했다.


“믿고 싶은 건 맞습니다만, 착각은 아닐 겁니다. 적어도 저희가 내민 거짓, 기만보다는 솔직한 반응일 테죠.”


“그게 중요한 시점은 지나갔어요. 우린 근간을 고민해야 해요.”


민트가 긴 다리를 앞으로 쭉 내밀며 말했다. 그리고 조용히 있던 키가 보태어 말했다.


“그렇습니다. 투표 결과는 일방적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키가 입을 열자, 그의 주변에 앉은 지킴이들의 말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페리 혼자만 말을 아꼈다.


“폐지겠죠.”


“니미.”


거친 언변을 내뱉은 매드에 발끈하는 사람은 없었다. 분위기가 그랬다. 시작부터 열을 낸 군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비관론자가 된 것처럼 힘이 없었다. 황혼에 영혼을 떼먹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동안 집은 적막으로 둘러싸였다. 공허한 웃음소리가 지나가는 듯했다. 시선들이 늘어진 몸뚱이처럼 바닥으로 주저앉혀 있었다. 피크는 언제부턴가 아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디케이가 보고 있었다. 눈을 감고, 뜬 사람이 반대가 된 듯 디케이의 눈이 고요했다.


“피크, 네가 다시 한번 나서 줬으면 해.”


디케이가 말했다. 흔들리는 눈꺼풀 아래로 피크의 입술이 움직였다.


“뭘, 어떻게?”


“끝났다고 생각하나?”


디케이의 물음에 피크가 턱을 실룩였다. 그리고 질끈 감은 눈을 떠올려 디케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정확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어.”


“새로운 시작? 사람들이 더 이상 날 신뢰할 거라 보나? 내일 당장에 길거리에서 발견돼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야, 지금의 나는.”

     

“누구도 자넬 죽이고 싶어 하지 않아. 마을 사람들을 기분 따라 보지 마. 그런 마음으로 저들을 데려온 게 아니잖나.”


그리고 디케이가 말을 이으려는 찰나, 피크가 묘한 웃음을 얼굴 위로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날 내가 어떤 심정으로 단상에 올라갔는지 넌 절대 모를 거야.”


디케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나는 알지 못해.”


“뻔뻔하군.”


“사실이니까.”


“이번엔 워블을 잃는 게 아닐까 두려워 목소리도 안 나오더군.”


피크의 그 말에 조용히 숙여 있던 여섯의 고개 동시에 딸려 갔다. 디케이는 그들보다 반응이 한 박자 느렸다. 그 대신 동작이 곱절로 컸다. 그리고 결여된 감수성을 단번에 끌어모은 것처럼 목소리를 크게 내어 그 말에 반대를 표했다.


“무슨 헛소리야! 피크!!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했는지나 알아?!”


그에 피크가 구시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입으로 내가 한 말이야, 모를 리가 없지.”


또 한 사람, 가만히 있지 않았다. 군이었다.


“대단하군, 대단해. 투표용지를 손에 쥔 사람들이 방금 네 그 말을 들었으면 아주 좋아했겠어.”


군의 목소리를 이어, 디케이가 참지 못한 듯 언성을 높였다.


“내일 그딴 잡소리가 단상 어디서든 울렸다간 내 손에 먼저 죽을 줄 알아, 피크.”


디케이의 말이 끝나자, 올라간 몸들이 하나둘 아래로 내려왔다. 남자들만이 그랬다. 감정을 공유하는 건지, 감정에 같이 격해진 건지는 분명치 않았지만, 페리가 있기 전까지 유일하게 여자 역할을 맡고 있던 민트는 몹시 무던했다. 큰 목소리는 물론이거니와, 과격한 몸짓이 얼굴 앞을 지나가는데도 그녀는 달리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오늘 자리에 참석해 주지 않겠냐는 말을 들을 때도 민트는 비슷했다. 입막음 혹은 입맞춤. 전 지킴이 중 유일하게 초대받은 사람. 뭐가 됐든 민트는 망설이지 않았다. 어수선해진 틈을 타, 민트의 고개가 마토의 등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모임 내도록 말을 꺼내 놓지 않은 페리의 얼굴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흘겼다. 민트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입꼬리로 보아, 예쁜 말은 아닌 듯했다. 페리는 소동에도 아랑곳없이 처음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전의 때처럼 연녹색의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모두가 자리에 엉덩이를 붙일 때쯤 민트의 목소리가 주위로 퍼졌다.


“가더의 의견은 어때요?”


그리고 그 말은 구석구석 스며들었다. 의자의 덜컥하는 소리가 치밀었고, 누군가는 환청을 들은 듯한 얼굴로 민트를 바라보았다. 그때 처음으로 페리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 명칭을 굳이 꺼내 들 필요가 있으셨을까요?”


페리가 민트의 눈을 쳐다보지 않은 채 고개를 미세하게 틀어 대답했다. 그리고 민트는 페리의 얼굴과 직선이 되도록 응시하며 그 말을 받았다.


“아니, 뭐. 불편하게 들렸다면 미안해요. 하지만 아주 오래된 일도 아니잖아요? 그쪽 의견이 궁금했어요.”


말을 들은 페리는 대답에 앞서, 자신에게 쏠려 있는 시선의 무게를 덜려는 듯 좌우에 자리한 피크와 마토를 한 번씩 쳐다보았다. 피크는 별다른 표정을 내비쳐 주지 않았고, 마토가 가벼이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페리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말을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재의 시티는 무척이나 변한 것 같습니다. 뭐랄까, 분위기가 느슨해졌어요. 제가 근무하던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이정도 모습은 아니었거든요. …해서 짐작해 보건대, 아무래도 시티에 제대로 된 분리가 찾아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과거에도 가림막은 분명 존재했죠. 저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살던 시기의 시티에도요. 물론 현지인들의 모습이 달라졌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들은 똑같았어요. 지독한 악취, 기울어진 걸음걸이, 미혼모로부터 아이를 사는 노인들, 어두운 물감만이 가득한 화가들의 이젤. 평소의 시티였죠.”


그리고 페리의 이야기에 방해되지 않기를 바라는 듯 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이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 완전히 죽은 곳이었지.”


페리는 고개를 연신 위아래로 흔들며 공감을 표하고는 이어 말하였다.


“제가 변화를 느낀 결정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이건 여러분들이 걱정하실까 봐,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끝을 흐리는 페리를 향해 재촉을 건네는 사람은 없었다. 군과 매드 역시도 그 순간만은 조용한 분위기를 지켰다. 모두들 그만큼 페리의 이야기에 차분하게 빠져 있었고, 소리 없는 떨림을 풍기며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

“키 씨가 주신 위조 라이선스. 그것을 쓸 일이 없었어요. 그리고 통조림을 건네준다던 남자도 자리에 없었고요.”


내려앉는 소리는 키에게서만 들린 게 아니었다. 반대로 두 명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매드만이 이해 못 한 사람의 얼굴을 짓고 있었다. 정적은 잠시였고, 페리의 앞으로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하나같이 공격적인 목소리였다. 처음은 그녀의 뒤통수를 친 군의 반말이었다.


“뭐라고? 그럼, 가더는? 아니, 그걸 왜 이제 얘기하는 거야?”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이 차례대로 탄식을 이었다.


“…세상에.”


“그럴 수가…”


“…”


피크와 디케이는 침묵했다. 페리는 그들 모두의 말을 무시하고서 키의 입술이 벌어질 때까지 그를 지켜봤다. 키는 부정하고 싶다는 얼굴을 띠고 있었다. 그때, 민트가 말했다.


“길을 잘못 든 거 아니에요? 아니면 운이 좋았을 수도 있고.”


그에 페리는 곧장 고개를 들어, 민트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요. 누가 봐도 폐차고인 곳 옆의 하나뿐인 정비소였어요. 가더가 쓰는 숙직실도 죄다 뭉개져 있었고, 그 흔한 흰색 사이렌조차 사라지고 없었어요. 다시 말해, 거길 지키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는 거죠.”


“뭐야, 그러면 거기서 탈출한 이유가 없잖아?”


매드가 말했다. 그리고 군이 낮게 깐 목소리로 그에 대꾸했다.


“친구, 말조심하길 바라.”


그리고 또, 민트가 틀린 말은 아니라는 듯이 말을 이었다.


“꼭 우리 마을이 시티의 연장선이 된 것 같네요.”


“그만들 하지! 아직 명확한 건 아무것도 없어. 확증도 없이 섣불리 판단만 해서 득 될 게 뭐가 있냔 말이야!”     

조용히 말하기를 포기한 디케이의 우렁찬 소리가 집을 가득 메웠다. 화는 곧 진실이었다. 발끈하는 사람이 생기자, 탄식이 이어지던 분위기에 한층 더 서린 기운이 맺혔다. 페리는 이미 시선을 땅 깊숙한 곳으로 곤두박아 있었다. 다들 다음으로 말하기를 꺼렸다. 겉으로 풍기는 그들 대부분의 감정은 불안이었다. 다수가 손톱을 물어뜯거나, 팔다리를 흔들었고, 머리가 긴 사람들은 그것을 괴롭혔다.


“결국 마을도 시티와 다를 게 없는 곳이었군요.”


힘없는 한편, 또렷이 울린 목소리였다. 소리는 디케이의 뒤에서 피어났다. 정면에 있던 피크는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이미 시선을 그쪽에 두고 있었다. 언제 풀렸는지 모를 걸쇠와 문이 바깥쪽으로 서서히 젖혀졌고, 그 너머의 어둠으로 스스로를 덧씌운 피사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밖이 몹시도 어두웠지만, 하나만큼은 그에게서 알 수 있었다. 눈이 몹시도 붉은 상태라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