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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Aug 19. 2024

포의 녹음기

운이 좋았다. 퓨티가 집에 온 건, 포가 마을을 돌고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포는 침대에서 퓨티를 맞았다. 퓨티의 얼굴에서 포는 그녀가 무언가 달라졌다는 걸 느꼈지만, 딱히 평소와는 다른 제스처를 내밀거나 하진 않았다. 본인의 눈썰미를 의심했다기보다는 방금 치르고 들어온 범행의 꼬리가 손짓에 드러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퓨티는 포에게 인사를 하고, 아침 무렵 침대 아래에 정갈히 정돈해 둔 담요 속으로 몸을 파고들었다. 퓨티는 금방 잠이 들었다. 새근새근한 그녀의 숨소리가 마을의 폭포 소리와 함께 집 안을 평온히 채웠다. 포는 조금도 잠이 오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해진 공기에 묘한 흥분감이 느껴졌다. 포는 침대 등받이에 기대어 조금 전을 회상했다. 비가 왔음에도 걷기에 적당한 습도였었지, 검은색 모자가 걸려 있는 집은 깨나 인상적이었어. 부러운걸. 그런 고급진 여자 앞에 집이 배정되었다는 게. 뭐, 향수 쓰는 여자를 다루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리고 포는 등을 기댄 채로 팔을 길게 뻗어 닫혀 있는 창을 열어젖혔다. 창은 오래 열어 놓지 못한다. 불이 없다 한들, 사람의 피를 멀리서도 맡아 내는 벌레들이 천지니까. 포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나무에 가려진 별을 쳐다보았다. 마을의 별은 셀 수 없다는 표현조차 아까울 정도였다. 시티가 고도로 발달된 기구를 통해서만 별이란 존재를 향유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곳은 비용에 막혀 별을 접하지 못했던 사람에게 그야말로 천국인 셈이다. 실제로 별은 마을에 갓 입성한 풋내기들이 가장 먼저 마음을 트는 대상이기도 했다. 십이면 십, 백이면 백, 모두가 그랬다. 그리고 그들은 별의 힘을 빌려 차츰 불면과도 같은 독백과 사색에 익숙해져 갔다. 포는 고개를 내려 퓨티가 잠든 것을 다시금 확인한 다음, 사색을 택했다. 사색이란 단어를 붙이기엔 거창하긴 했다. 그가 지금부터 할 거라곤 바를 떠올리는 일이었으니까. 포는 별빛을 정중앙에 담은 채로 눈을 감았다. 휘어 있는 체리 빛깔 네온사인이 단출하게 걸려 있는 곳이다. 성공적으로 바의 입구에 다다른 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포는 조경이 흐트러지지 않게 최대한 호흡을 늦추며, 전시회장을 따라 한 듯한 둥근 계단 위로 발을 내렸다. 초입에서는 조금도 들리지 않던 재즈풍의 음악이 계단 아래서부터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다. 계단을 절반 정도 내려온 포는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화로 정확히 두 장.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좌우로 보초처럼 서 있는 두 명의 사내를 향해 포는 각각 그를 건넸다. 두 사람은 상대가 움직임을 알아차릴 만큼만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시했다. 엉덩이를 떼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좌석에 알맞은 머릿수만큼이 가게에 들어차 있었다. 포는 빈자리의 유무보다 먼저인 게 있었다. 치파오…, 치파오…, 포는 되뇄다. 치파오를 입고 있는 사람이 딱 한 사람 보였다. 포는 금방 그녀를 찾아내었다. 여자의 머리에 구멍이 송송 뚫린 장식이 보였다. 여자는 거기에 매달린 끈으로 머리를 묶고 있었다. 키는 160 전후, 눈썹이 조금 올라간 편이었는데, 초롱초롱한 눈망울 덕분에 앙칼진 인상은 못되었다. 포는 문득 걸음이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주변 배경도 더디게 보였다. 그녀는 술이 진열된 틀을 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아주 정성스러운 손놀림이었는데, 언뜻 보면 자신이 가게의 사장이라도 된 듯한, 최면 혹은 과시를 내뿜는 것 같기도 했다. 포는 언제나 그랬듯 쭈뼛쭈뼛하게 변한 자신의 걸음걸이를 원망하면서 그녀의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포는 적당한 크기의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리고 정전기와 같은 따끔함을 몸 깊숙한 곳에서 느꼈다.


“아, 안녕하세요.”


그녀도 따라 수줍게 인사했다. 인사를 받은 여자는 착하게도 기다려 주었다. 포 역시도 자신이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인사 뒤로 붙일 말들, 그래야만 이어질 대화들. 씻었음에도 크게 티가 안 나는 푸짐한 머리와 청바지 위로 빼꼼히 튀어나온 살들이 날 것에 가까운 그의 인상과 버무려져 참으로 애처로운 분위기를 이어 갔다. 사실 둘 사이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웠다. 기념일 따위를 챙겨 주거나, 서로에게 관심이 많다는 점, 모자란 사정이 본인들이 안 되는 이유인 걸 안다는 것 또한 역시. 둘은 서로에게 그런 존재였다.


“오늘은 손님이 많네요.”


“그렇죠? 아까는 어찌나 바빴던지, 자리 치우는 것까지 깜빡했다니까요!”

     

여자가 잇몸이 전부 드러날 정도로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또한 여자는 입을 가리지 않았다. 때문에 포는 그녀가 입을 벌릴 때면 늘 눈으로 그녀의 가지런한 치열을 훔쳐봤다.


“그렇군요.”


“늘 앉으시던 자리에 사람이 있어서 어떡하죠?”


“어쩔 수 없죠, 뭐. 카운터 옆 기둥에 기대어서라도 마셔야지.”


“음…”


여자가 그건 곤란하다는 듯 양손을 가슴 위에 얹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괜찮아요. 늘 하던 방식 반대로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죠.”


“음…, 알겠어요. 그럼, 오늘은 주종도 한번 바꿔 보실래요?”


“그것만은 안 돼요.”


포는 단호히 대답했다.


“취향 하나는 확고하시네요.”


고집을 꺾지 못해 아쉽다는 듯 여자는 입술을 뾰족이 실룩대고는 점선이 난 주문서에서 종이를 뜯어 포에게 건넸다. 포는 양손으로 그를 받고는 반을 접어 카디건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포는 느려졌던 시간이 다시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다. 포는 눈을 내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세계의 초침 속도는 달라지지 않았어, 조급한 건 현재의 나 하나뿐이야. 무엇 때문에 이렇게 시간이 빠르게 가는 듯이 느껴지는 거지? 완벽하기 그지없는 밤이야. 심지어 센터에 납부할 세금도 예정보다 나흘이나 일찍 송금했어. 그리고 센터를 떠올린 포는 그 순간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실수를 저지른 것인지, 달리 계산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포는 멍청하게 생긴 손바닥을 이마에 얹어 힘 있게 머리를 털어 냈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재즈에 억지로라도 녹아들려고 노력했다. 바에 구비된 음향기기는 라이브만큼의 낭만은 없었지만, 그런대로 음질이 들어 줄 만했다. 코너의 꺾이는 마디마다 매립된 남청색의 조명과 세 곳으로 분리된 천장에서 강아지풀처럼 흔들리는 연보라색의 LED가 사람들이 든 술잔의 표면과 어우러져 매혹이 강한 색을 내리고 있었다. 포는 금방 센터를 잊었다. 비록 광이 나는 구두는 아니어도, 뒷굽이 달린 신발에 리듬을 실어 떼고 붙이기에는 충분했다. 포의 불룩이 나온 배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점점 더 깊이, 점점 더 아득히. 그와 동시에 포의 시간은 훨씬 더 빠르게 흘러갔고, 포는 한층 더 인지력을 잃어 갔다. 언제부턴지 바의 무드를 바라보던 그의 눈이 감겨 있었다. 포는 이제 더 이상 춤을 추고 있지 않았다. 바의 온기만큼이나 끈적하게 흘러나오던 음악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포는 울컥하고 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누른 채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조심스럽게 리듬을 타던 발가락 위로 익숙한 거친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포는 눈을 떴다. 별이 처음 자리에서 같은 빛을 내고 있었다.


“…”


포는 입을 뻐끔거렸다. 이불에 있던 손으로 목을 쓰다듬자 정전기 소리가 피어났다. 그 뒤로도 포는 한참을 별을 바라봤다. 바가 사라지고, 남은 것은 없는 것과도 같은 달빛뿐이었다. 더불어 오랫동안 숨을 참은 탓에 한 차례 사레까지 찾아왔지만, 포는 잠든 퓨티를 깨우지 않기 위해 목에 힘을 주어 억지로 그를 잠재웠다. 그리고 열린 창을 조용히 닫았다. 창이 닫혀도 폭포의 물소리는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자연이 내뿜는 무한에 가까운 소리. 포는 언젠가 시티에 사는 누군가는 불안을 잠재우기 위하여 저 같은 소리를 녹음해 머리맡에 놓고 잔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포는 그 논제가 떠오를 때마다 반대로 그것을 향해 질문을 건넸다.


마을로 온 나는 무엇을 녹음하여야 하는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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