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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Aug 19. 2024

조작된 투표

결말이 이렇게 되리라는 걸, 자리의 모두는 알았을지 모른다. 처음으로 나선 홈은 천막으로 들어가 금세 밖으로 빠져나왔다. 당장에 보아도 굳은 얼굴에 검은 모자의 그늘까지 더해져, 단상 반대에 난 허름한 골짜기로 걸음을 옮기는 그를 잡고자 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처음을 청한 홈이 어떤 선택을 했는가에 있어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던 이라면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마치 들으라는 듯한 소리였으니까. 디케이도 그 소리가 들린 순간만큼은 뒷사람 보채기에서 한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첫 번째가 되지 않은 앞줄 사람들, 특히 디케이와 실랑이를 벌이던 그 남자의 입이 특히 가벼웠다. 앞을 향해 있던 이들의 고개가 연달아 뒤로 넘어갈 때면 굽은 마디가 실로 살아 있는 어떠한 생명체처럼 크게 꿀렁거렸다. 디케이는 줄의 중간쯤까지 그런 상태가 이어지는 걸 보고 있다가 급하게 뛰어내려 막 고개를 뒤로 젖히려는 사람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말은 하지 않았다. 가까이로 온 디케이를 본 그는 저항하지 않고 고개를 앞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리고 디케이는 흘러내린 안경을 콧잔 등에 도로 얹은 다음, 터벅터벅 단상 쪽으로 걸었다. 굽은 마디가 또 한 번 꿀렁거렸다. 디케이가 천막으로 팔을 뻗으며 남자에게 말했다.


“들어가시죠.”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두 자리의 숫자가 되기 이전의 사람들은 하나 같이 꽤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 그리고 투표를 마치고 나온 사람들은 천막에서 멀지 않은 자리에 터를 잡아 이야기를 나눴다. 대개 둥그스름한 주동자가 있었고, 거기로 보통의 인간이 몰려와 꽂히는 꼴이었다. 터무니없이 작은 목소리를 내는 그들 사이에서 간혹 누군가가 직접적인 말을 내뱉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다수의 침묵에 의해 묵살됐다. 그리고 한 번 제지를 당한 사람은 슬그머니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아마도 눈치를 챈 것이다. 이쪽 무리에서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이 자신 하나뿐이라는 것을. 투표가 거듭되고, 줄이 짧아질수록 그러한 떼들이 많아졌다. 또한, 자리를 피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팔짱과 짝다리, 원로와도 같은 자세로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처음 한두 번은 나가는 이에게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점점 그 수가 많아지고, 무리에서 빠져나간 그들이 어느덧 자신들이 서 있는 둥지 하나만큼의 크기를 조성하였을 때가 되어서야, 시선들이 움직였다.

“내가 먼저 들어갈게요.”


그녀의 목소리는 예외였다.


“괜찮겠어?”


피크가 워블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괜찮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요?”


“…그, 그렇지.”


확실히 워블은 퓨티를 만난 이후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워블의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10년 치에 걸맞은 표정을 드러냈다. 피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소 듣지 못한 목소리를 들은 탓인지 그의 얼굴에 적잖은 당황이 묻어 있었다. 단상 앞에 선 워블은 발아래의 계단을 신기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는 다리를 들어 조심스레 그 위로 올려놓았다. 디케이가 무도회장 사내라도 된 듯이 펼친 손을 워블에게로 내밀었다. 손을 잡고서 계단을 오른 워블은 잘게 말린 스카프를 머리 밖으로 빼낸 다음, 천막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남은 사람은 이제 몇 되지 않았다.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뒷줄은 거의 다 마을 내 유명인들이었다. 리더, 책임, 관리, 특권과 같은 단어로써 엮을 수 있는 사람들. 앞선 사람들과 다를 건 없었다. 외관이 우중충하고, 조금 더 복잡해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 어딘가에 퓨티가 서 있었다. 포도 함께였다.


“아버지, 곧 저희 차례예요. 준비하세요.”


퓨티는 말하기 전, 앞뒤로 남은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했다. 포가 이내 입을 뻐끔거려 보였지만, 퓨티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받는 사람이 없는 대답이었다. 그 순간 이후로 포는 더욱 희멀건 송충이 같았다. 아래로 처진 입이, 손수 펴낼 수 있는 의지라고는 얇게 퍼진 팔다리를 움직이는 일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어떻게 투표하실 거예요?”


포는 입술을 길게 늘이고는 한 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퓨티는 또 다른 곳에 눈이 가 있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너무 하루아침에 벌어진 일이라, 아직 마음 정리가 덜 되어서요. 완전한 독립을 위한 절차라고들 말하지만, 그게 단순히 선택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인지 하는 의문이 들어요. 물론 많은 말들이 오갔을 테죠. 하지만 저는…, 제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알량한 감정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잘 모르겠어요.”


퓨티가 말한 ‘그 자리’, 그러니까 어젯밤 군의 집에서 열린 토론회 이야기다. 그들이 모였다는 소문은 다음 날의 모두가 알고 있을 정도로 빠르게 번져 나갔는데, 정작 자리에 있었던 장본인 여덟 사람은 몸을 사렸던 탓에 누구에 의해 처음으로 말이 시작되었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퓨티 역시 시작이 아닌, 흐르는 말소리를 어디선가 들었을 뿐이었다.


“어제는 밤을 꼬박 새웠어요. 생각이 많아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거든요. 아마 최근에 겪은 일들 때문일 거예요. 표정이건, 말이건, 계획에 없던 일들을 제법 겪었거든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씀드릴게요. 아버지도 꽤 흥미롭게 들으실 수 있을 거예요.”


퓨티가 말을 끝내며 포를 올려다보았다. 포는 그제야 퓨티와 눈을 맞댈 수 있었다. 포는 그 나름으로 그녀가 최대한 오래도록 머무를 수 있게 온화한 표정을 보이려 노력했다. 실상은 세로줄로 허옇게 튼 입술이 더욱 강조될 뿐이었지만.


“봐요. 디케이 씨가 코앞이에요. 아버지부터 들어가실래요?”


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무렵에 투표를 마친 워블이 천막에서 모습을 보였다. 사람들의 고개가 달콤함을 발견한 꿀벌 무리처럼 그리로 딸려 갔다. 도도한 걸음을 내려놓는 워블은 어느 것하고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양손은 철저히 스카프 끄트머리 두 가닥에 얹은 채 오로지 하체만을 이용한 걸음이었다. 가는 방향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녀는 곧장 집으로 향할 요량인 듯 보였다. 워블은 나가는 길의 끝무렵에 이르러서도 줄의 중간에 서 있는 피크에게 눈길 한 번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단상 근처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자, 탄식과도 같은 소리가 둥지들 사이에서 샘솟았다. 마치 한숨 소리처럼도 들리는 그것들은 틀에서 벗어나지 않은 뉘앙스의 말이었지만, 어제까지는 들리는 게 불가능했던 수위가 아슬아슬한 말들도 여럿 섞여 있었다. 한 명, 그리고 또 한 명. 줄이 짧아질수록 천막으로 들어간 이들이 투표에 할애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포와 비슷한 연령의 누군가는 거의 발을 들임과 동시에 천막을 걷어차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퓨티, 올라오렴.”

     

디케이가 사람 한 명 들어가기 무섭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직이요. 저분은 금방 나오지 않으실 거예요.”


퓨티는 앞서 들어간 사람의 성격을 잘 안다는 듯이, 다리의 어느 쪽도 계단 위로 올려놓지 않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퓨티가 말한 대로 천막 안의 사람은 시간을 천천히 소모했다. 전에 들어간 사람의 두세 배 정도였다. 선택을 마치고 나와 보이는 모습마저도 그런 편이었다. 아마 깊게 생각하기를 포기한 사람이거나, 초조한 내색 보이기를 싫어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퓨티.”


디케이가 계단 아래 머물러 있는 퓨티의 신발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알겠어요.”


대답한 퓨티는 포에게로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마주친 다음, 디케이의 옆을 지나쳐 천막으로 걸음을 내밟았다. 퓨티의 눈이 천막에 닿을 정도가 되었음에도 디케이는 기다리는 포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천막 안으로 들어온 퓨티는 투표용지를 확인하기에 앞서, 내부에 관심을 기울였다. 천막 안은 밝다기보다는 컴컴한 편에 가까웠고, 그늘진 공간 뒤쪽으로 상자와 볼펜이 놓여 있었다. 상자는 뒤쪽으로 기울어진 정사각형 모양에 사람 손 하나가 들어갈 크기의 홈이 패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때 묻은 종이들이 너저분히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퓨티는 쌓인 종이를 유심히 보는 시늉을 하다가 이내 칸막이의 틈 사이로 천막의 색과 뒤섞여 초록빛을 띠는 가느다란 빛줄기를 따라 종이와 펜에 각각 손을 올렸다. 왼손으로 종이를 쥔 퓨티는 엄지와 검지, 그리고 중지를 이용해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그와 동시에 퓨티는 속으로 생각했다.


‘보슬보슬하다, 조금만 세게 누르면 가루가 될 것 같아.’


다음으로는 시간을 끌지 않았다. 퓨티는 곧바로 종이를 반 접어 상자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퓨티는 뒤돌아 천막에 손을 올렸다가, 다시 내리고는 눈대중으로 남은 종이의 두께를 확인했다. 깔끔히 포개어 있지 않고, 흐트러져 있는 탓에 낱장의 모서리가 세기 좋게 삐져나와 있었다. 퓨티는 눈썹까지 휘어져 내려오는 구부정한 앞머리를 정돈하듯 종이 들을 하나의 것으로 보이게끔 매만진 다음, 뒤로 닫힌 천막을 열었다.


“들어가시죠.”


디케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들은 퓨티는 한 번 포를 힐끔 바라보고는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퓨티의 몸이 단상에서 내려오자, 무리를 유지하고 있던 몇몇이 손짓하며 그녀를 유혹했지만, 퓨티는 조금의 흥미도 없다는 얼굴로 그들을 지나쳐서는 워블이 빠져나갔던 길 그대로 유유히 단상을 떠났다.


“…”


포가 입을 뻐끔거리며 퓨티의 뒤로 팔을 뻗었다.


“어서 끝내시고 뒤를 따라가세요.”


디케이가 어정쩡하게 친절한 말투로 포를 향해 말했다. 그래, 그러지. 포는 속으로 대꾸 한 뒤, 계단을 올랐다. 누군가가 단상에 오를 때면 찰나라도 그 뒷모습을 흘기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포의 뒤, 단상에 오른 포의 뒷모습은 남은 사람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쳐다보는 이가 없었다. 아예 존재조차 부정하는 얼굴들이었다. 가는 팔로 몸이 들어갈 정도로만 막을 젖힌 포는 목덜미를 타고 내려오는 곳을 손으로 살짝 당겨 입구의 왼쪽으로 쏠리게 했다. 줄에 있을 때부터 포의 눈은 그곳을 향해 있었다. 정중앙에서 살짝 벗어나 내부가 미세하게 보이는 끝자락. 안으로 들어온 포는 강박과도 같은 정밀함을 가진 세공사처럼 빛이 들어오는 나머지 틈을 손끝으로 짚어 가며 빠르게 눈을 돌렸다. 처음은 큰 곳, 다음은 중 간, 그리고 손톱처럼 아주 작은 틈까지도 포는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음을 알았다는 것처럼 포는 상자를 향해 몸을 날렸다. 퓨티가 만져 놓은 종이들이 우스꽝스러운 무늬가 박힌 포의 셔츠 하단과 부닥쳐 휩쓸리다시피 쓰러졌다. 포는 팔을 상자에 집어넣어 중요한 지점을 찾아 나가듯 섬세하게 손가락을 휘둘렀다. 살 끝에 달라붙는 건 거의 대다수가 부드러운 면적이었다. 간혹 도톰하고도 까끌까끌한 것이 닿기도 했지만, 수가 아주 적었다. 포는 얼굴을 찌푸린 채 휘젓기를 계속하였다. 방향은 왼쪽, 한 방향으로만 저었다. 그리고, 맨살에 엉기듯 손에 붙은 종이들을 상자의 벽면으로 밀어 그대로 들어 올렸다. 몇몇 품에서 벗어난 종이들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포의 손 반대편에는 이미 볼펜이 쥐어져 있었다. 포는 속으로 초를 세기 시작했다. 빠르게 나오던 사람들, 느리게 나오던 사람들, 그들 중간 지점을 정확하게 계산했다. 열일곱 정도가 최선이라고 포는 생각했다. 그리고 펜을 들어 맨들맨들한 종이의 정중앙에 그대로 찔러 넣었다. 그 뒤로는 멈춤 없이 척척 진행되었다. 왼손의 감각이 살아날수록 행동에 가속이 붙었다. 세 장에 구멍을 뚫은 포는 약지와 새끼에 그를 끼고서 통 안에 떨어뜨렸다. 포는 무지하지 않았다. 투표가 끝난 뒤, 눈이 시뻘걸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구멍의 위치를 각각 다르게 찍어 냈다. 어떤 것은 굵게, 어떤 것은 가늘게, 포는 차분하게 한 장 한 장에 차이를 두었다. 찍어 낸 세 장의 종이를 통에 넣기를 네 차례, 포는 손안에 남은 종이 다섯을 본 순간 목덜미 뒤로 찌릿함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주어진 시간을 모두 소모했음이 주는 신호라고 포는 생각했다.


“…”


포는 입을 뻐끔거리며 급하게 자리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왼손에 쥔 다섯 장의 종이는 구겨짐 없이 나풀거리도록 상자의 옆에 떨어뜨렸다. 처음 있던 자리 그대로 볼펜을 내려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귓가에 들릴 정도의 거센 심장 소리. 포는 지난밤 바의 조경을 떠올리며 몸에 들어간 힘을 조율했다. 그리고 등 뒤로 덮여 있는 천막을 힘없이 움켜쥐었다. 바깥의 빛이 천막 안에서 있었던 일과 별다를 것 없다는 듯이 포의 얼굴을 내리쬐었다. 마을의 모두가 투표를 끝마쳤다는 소식은 마지막으로 천막에 들어간 디케이가 가득 찬 투표함을 들고 나오는 모습을 보임과 동시에 번져 나갔다. 천막에서 나오자마자 퓨티를 찾아 나선 포는 얼마 가지 않아 그녀를 발견했다. 퓨티는 워블과 만나야 한다며 포에게 말했지만, 포는 완강히 손을 낚아채어 퓨티의 걸음을 단상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피크는 워블을 찾으러 가지 않았다. 포와 함께 단상으로 돌아와 피크의 그 같은 모습을 본 퓨티는 자신의 아내를 여전히 알지 못하는 피크에 화가 난 듯 포의 팔을 연신 뿌리치려 했다. 단상 아래를 이루고 있던 무리 여럿은 그대로였다. 그러다 디케이가 투표함을 단상의 정중앙에 대뜸 내려놓자, 다들 길고양이라도 된 것처럼 놀란 얼굴로 어깨를 가슴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디케이는 자신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남자에게 다가오라는 손짓을 보낸 뒤, 투표함 옆에 멈춰 섰다.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투표함을 보면서도 그랬고, 디케이의 손가락을 보면서도 그랬다. 디케이는 차분한 눈빛을 유지하며 가까이 있는 모든 사람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디케이와 눈이 맞은 사람들 모두가 처음 남자가 그랬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 뒤로도 디케이는 손을 빳빳이 쳐들고서 무리의 한 명 한 명에게 요청의 눈길을 보냈지만, 군집해 있는 사람들은 이미 굳어 있었고, 홀로 돋보이는 대상이 되기를 승낙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혼자서는 개표하기가 힘이 듭니다. 한 분만 단상에 올라와 도움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디케이가 멀리 나무 그늘에 있는 사람들에까지 닿을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에 무리에 섞이지 못한 이들이 모여 있었다. 나무 아래의 그들은 모두 개인이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행위조차 쉬이 취하지 않았고, 대부분 목석처럼 단상을 향해 눈을 고정해 있었다.


“아무도 없으십니까?”


디케이가 한 번 더 나무 아래를 보며 말했다. 그늘에는 조건이 있었다. 첫째로, 종이에 구멍을 낸 자들이어야 했고, 둘째로, 수다스럽지 않아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 자리는 투표를 마치고 온 순서대로 머무를 것. 따라서 그곳 맨 안쪽에 서 있는 사람은 홈이었다. 홈의 얼굴은 모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내가 돕지.”


말소리는 디케이가 처음 도움을 청한 군중들 사이에서 피어났다.


“피크.”


다급히 고개를 돌린 디케이가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내가 하는 게 맞아. 굳이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말이야. 그래도 반대에 있는 사람 중 한 명인 내가 자네와 합을 이뤄야 그림이 맞지 않겠나.”


그리고 피크는 디케이가 서 있는 단상 정중앙으로 올라섰다. 옆으로 온 피크에 디케이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고마움을 표했다. 피크는 디케이 손에 들린 상자를 힐끔 쳐다보고는 단상 아래로 눈길을 돌려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어찌 됐건 투표는 끝이 났습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닥친 상황을 너그러이 수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돌이킬 방법은 없습니다. 결과에 따라 마을은 유지되거나, 변화할 것입니다. 저는 지킴이 폐지에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그렇기에 여기 있는 우리의 동료, 디케이와 개표를 함께한다고 해도 형평성에 어긋나는 행위가 되진 않을 거라 사료됩니다.”


말을 마친 피크는 반응을 살피듯이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마다 눈을 던졌다. 그리고 별다른 대꾸를 내미는 이가 없자, 눈길을 거두고서 디케이를 바라보았다.


“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디케이의 목소리와 함께 개표가 시작되었다. 상자는 피크가 들었다. 디케이는 상자에 손을 넣어 휘적이지 않고, 간결한 동작으로 종이를 꺼냈다.


“첫 번째 장! 백지입니다! 반대표 하나!”


디케이는 첫, 그리고, 반대. 두 단어에 힘을 주며 소리쳤다. 그리고 처음으로 상자에서 빼내든 종이를 왼손에 쥔 채 다시 상자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두 번째 장! 백지입니다! 반대표 둘!”


디케이는 둘, 그리고, 반대. 두 단어에 힘을 주며 소리쳤다. 그리고 디케이는 자신의 왼손이 종이로 두툼해질 때까지, 똑같은 말과 똑같은 표현을 이어 했다. 디케이는 어떠한 내색도 비추지 않았다. 상자를 양손으로 받치고 있는 피크 역시 부동을 유지했다. 반듯한 종이가 나오기를 열두 장째. 디케이는 똑같은 자세로 상자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때, 손끝서부터 시작된 움찔거림이 디케이의 머리끝까지 크게 튀어 올랐다. 그를 본 눈치 빠른 사람 몇몇이 옆 사람과 쑥덕거렸다. 동시에, 들어간 디케이의 오른손이 상자에 한동안 머물렀다. 시간이 지체되자, 그 모습을 보던 피크가 몸을 숙여 나지막이 말했다.


“하던 대로 해. 자네가 그러면 보는 사람도 따라서 불안해져.”


디케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상자에서 손을 꺼냈다. 구멍은 왼쪽 아래 모서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디케이는 종이 가운데에 있는 두 손가락을 오른쪽으로 옮기며, 담아져 있던 숨을 단번에 내뿜었다.


“열세 번째 장! 찬성입니다! 찬성표 하나!”


그리고 디케이는 사선으로 손을 쳐들어 구멍 너머로 보이는 작은 풍경을 흡족한 눈으로 바라본 다음, 흰색 가운의 주머니에 종이를 집어넣었다. 불쑥 등장한 한 장의 찬성표. 그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시큰둥했다. 무리 지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갈라지고, 그들이 서로 간의 거리를 벌리기 시작한 것은 디케이의 오른 주머니가 두툼히 부풀어 오른 듯 보이는,  바로 그 무렵이었다.


“거짓이야!!”


그리고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의 고개가 그를 향해 넘어갔다. 디케이는 상자에서 이미 반쯤 종이를 들어 올린 상태였기에 그를 무시코서 행동을 이으려 했지만, 피크가 상자를 올려 손을 가렸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디케이가 상자 속에서 손을 꺼내며 말했다. 얼굴은 말을 뱉기도 전부터 구겨져 있었다. 그러자, 군중 속에 묻혀 있던 사람이 옆쪽으로 빠져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는 이제 금방 씻고 나온 사람 마냥 머리가 젖어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의 상태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굵다랗고 짤막한 다리가 두드러지는 레깅스와 배꼽을 기점으로 말려 올라간 윗옷이 유독 뭔가 급해 보였다.

     

“머릿수! 머릿수가 달라요!!”


여자는 디케이를 향해 대답하는 대신 자신을 보는 모든 이들에게로 목소리를 내밀었다.


“머릿수라고 하셨습니까?”


디케이는 여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그러나 여자는 처음부터 디케이와의 대화를 위해 입을 연 것이 아니라는 듯이 조금의 눈길도 주지 않고서 혼자만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우리 마을의 거주민 수는 총 45명입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결과가 난 표는 32장이고요. 아무리 봐도 결과가 이상합니다! 조작이 아니고서야 나올 수 없는 수치라고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모두가 조용한 가운데, 디케이가 말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피크도 가만히 있지 않고 말을 얹었다.


“준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천막이 설치된 이후, 제가 따로 확인까지 하였으니까요.”


“그럼, 이 결과를 어떻게 설명할 거죠?”


여자가 단상 쪽으로 삿대질하며 되물었다.


“지금 본인의 행동이 모순적이라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말을 들은 디케이는 곧장 반박했다. 그리고 디케이는 그것으론 성에 차지 않는다는 얼굴로 안경을 치며 뒷말을 덧붙였다.


“자그마치 열두 장이었습니다. 개표 초반 연속으로 나온 반대표의 숫자는요.”


그에 여자가 대꾸했다.


“그게 어떻단 거죠?”


“14대 18. 현재까지의 집계 상황입니다. 지금 부인은 그 뒤로 추가된 6표까지 의심하고 계시는 겁니다. 의도의 본질은 교차로 쌓여 나간 찬성표의 입장들을 깔보시는 거겠지만요.”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에요. 열두 번의 연속쯤은.”


여자의 대답에 디케이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낮은 확률이지만, 충분히 나오는 게 가능하죠. 그런데 부인은 왜 그보다 낮은 확률에만 이의를 제기하시는 겁니까?”


“계산해 봤거든요.”

     

여자가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다리 길이만큼 무리에서 몸을 더 떨어뜨린 다음, 딱 그만큼의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그게 조작된 결과가 아니라면, 여기 서 있는 사람 대부분이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게 돼요.”


여자의 말이 있고, 사람들은 더욱 침묵했다. 그리고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단상의 두 사람을 흘겨봤다. 어서 빨리 어느 한쪽의 결과를 보이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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