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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Aug 19. 2024

시티의 화가, 카리브

켜켜이 잠가 놓은 실내는 며칠은 묵은 듯한 어둠으로 가득했다. 굉장히 너저분하고, 굉장히 질서 없는 방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카리브는 눈을 떴다. 그녀의 베개로 빠진 것인지 굽이진 것인지 모를 여러 갈래의 머리카락들이 엉켜 있었다. 카리브는 자는 새에 위아래가 뒤집힌 이불을 실눈으로 보며 신경질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양쪽을 두고 고민했다. 물감을 마시고 죽어 버릴까, 밖으로 나가 작업실로 걸음을 내려놓을까. 카리브가 지금과 같은 폐인으로 전락한 것은 오래전부터 조짐을 보였던 것이 아닌, 하루아침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해가 질락 말락 하는 늦은 오후, 타투이스트인 그녀의 일과는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이제 막 술을 몇 모금 삼킨 사람들이 지하에서 기어 나와 어슬렁거리는 곳, 그녀의 작업실은 그 바로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따지자면, 카리브는 딱히 타투에 흥미를 두고 있던 편이 아니었다. 그녀가 생업 삼아 하던 것이 그림 그리는 일이었다는 게 유일한 공통분모였다. 물감을 푼 물과 붓, 카리브의 전문이었다. 저 세 가지만 있으면 그녀는 세상 모든 것을 그릴 수 있었다. F구역에서만 놓고 본다면, 카리브는 최고의 화가였다. 그리고 그녀가 가진 능력에 대한 소문은 위로도 퍼져나가 있었다. 특히나 태평스러운 가더들, 그들에게 말이다. 구역에 배치되어, 하는 것이라곤 도망자들을 색출하고, 포획하는 것뿐인 말단의 공무원들. 카리브에게 접촉해 처음 제안을 건네온 것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네 그 솜씨로 내 등을 마구 휘저어 줬으면 하는데, 어때. 나를 위해 도안을 그려 주지 않겠나. 보수는 네 하루 벌이의 석 달 치를 쳐주도록 하지.”


“도안이요? 제가 그림을 그리긴 하지만, 그쪽과는 분야가 달라서요.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저 말고 다른 전문인을 찾아가시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실 거예요.”

     

“아니. 네 그림은 뭐랄까…, 말로 못 할 생동감이 있어. 먹지에 찍혀 나오는 계산적인 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한 자릿수에 거주하는 병신들보다 백 배는 나을 거야.”


낯선 대우와 처음 듣는 칭찬. 그 말을 들은 카리브는 얼굴을 붉혔었다. 그리고 그때의 얼굴을 몹시 빼닮은 색 한 점이 지금 침대의 창문 옆, 블라인드를 투과하여 물감이 담긴 병과 만나 마치 꽃잎처럼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빌어먹을 마라카투라. 바닥을 본 카리브는 속으로 생각했다. 새로이 날을 맞이하는 순간이면 여지없이 찾아와 눈앞을 가로막는 형상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회상처럼 작용했다. 연회색 가지에 옹기종기 매달려 있는 초록색과 붉은색 열매. 마라카투라는 카리브의 손을 거쳐 간 마지막 작품이었다. 카리브의 본격적인 개시 이후에 단지 숨소리에서마저도 거칢과 고지식한 면모가 드러나는 인간들이 발길을 이었다. 그들이 의뢰로 들고 온 문양들도 하나같이 호전적인 것들이 주였다. 한때, 강함의 역사였던 투사의 투구나, 날붙이, 방패, 피칠갑 된 깃발에 이르기까지. 그와 같은 것을 그린다는 행위는 카리브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으니까. 다만, 벌이와는 별개로 카리브는 나날이 굽어 갔다. 작업을 마치고 불을 끄는 때면 자신을 닮은 누군가가 힘없이 속삭였다.


‘이제 그만 도망쳐. 다시 원래의 네 붓을 들어.’


그러면 카리브는 이불 속으로 도망쳤다. 알고 있는 목소리, 알고 있는 말뜻, 참에 가까운 모든 사실이 자신을 옥죄는 시간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기에. 똑같은 밤을 지새운 날, 카리브가 눈을 뜬 그날은 다를 것 없는 평일 수요일 오후 무렵이었다. 그리고 카리브는 그날, 그녀를 처음 발견했다. 그녀는 줄의 중간쯤에 서 있었다. 자신의 얼굴 길이를 살짝 웃도는 은색의 단발머리에 너무나도 평온한 눈빛을 가지고 있는 여인. 그녀는 그간의 여자 가더들과 비교하여도 훨씬 왜소한 편에 속하는 여인이었다. 카리브는 홀린 듯이 발걸음을 옮겼었다. 무엇 하나 눈에 담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사람, 끔찍한 수요일 오후를 토요일처럼 느끼게 해 준 그녀를 향해.


“여기에 있는 거 맞아요?”


카리브는 물었다.


“네.”


여자가 대꾸했다. 겨우 한 음절짜리 대답이었지만, 떨림이 있었다. 가까이서 그를 들은 카리브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 정말로 보이는 것만큼이나 작은 사람이구나.

     

“원하는 도안이 있나요?”


카리브는 다시 여자를 천천히 훑으며 확인했다.


“…아.”


여자는 이번에도 비슷한 길이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여자는 매우 느린 움직임으로 가슴 옆쪽에 자리한 포켓을 열어 손수건처럼 접혀 있는 종이 하나를 카리브에게 내밀었다. 작은 종이는 검은색 단일 잉크가 번져 뒷면까지 물이 들어 있었다.


“이게 뭐예요?”


카리브는 건네받은 종이를 유심히 바라보며 물었다.


“…마라카투라.”


여자가 대답했다.


“발음이 어렵네요. 그게 이 열매의 이름인가요?”


“네. 커피콩 중 하나예요. 그들 가운데에서는 가장 덩치가 크죠. 그래서 좋아하는 녀석이에요.”


“단지 크기가 커서요?”


이어지는 카리브와 여자의 대화에, 줄의 틈을 좁히고 있던 몸집 굵은 남자들의 시선이 퉁명스럽게 날아왔다가 튕겨 나갔다. 그마저도 반사적이었을 뿐, 애초에 진정으로 관심 있는 눈초리는 한 가닥도 존재하지 않았다. 카리브는 시선을 느꼈다. 그리고, 시선을 느낀 카리브는 오히려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여자도 싫지만은 않은 듯이 말을 내뱉었다.


“그런 것도 있고, 제가 커피를 워낙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열매 생긴 게 제 취향이기도 해서…”


카리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이걸 참고해서 그쪽 체형에 맞게 선을 그려 볼게요.”


카리브는 손의 종이를 앞치마의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아, 감사합니다.”


카리브의 화답에 여자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 순간 여자의 입가로 미소 비슷한 것이 떠올랐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어색해 마치 날 때부터 웃는 것을 금기시 당한 사람 같았다. 그리고 사내들 사이에서 작게 빈정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그들 중 처음으로 운을 뗀 남자가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

     

“오호, 여자끼리 정을 나누는 건 시티 법 위반인데.”


가더 특유의 빳빳한 복장 규정을 제멋대로 훼손하고 있는 것부터 자신이 꽤 경력에 찬 인물이라는 사실을 과시하고 있는 남자였다. 카리브는 그로부터 받은 것과 똑같은 말투로 대꾸를 건넸다.


“성희롱도 명백한 시티 법 위반이라는 사실은 모르나 봐요?”


“어이쿠, 미안. 내 사과하지. 사전 차단이 일인 걸 어떡하겠나.”


“근데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여기 있는 우리들은 신고 정신이 너무도 투철하거든.”


남자가 마치 동료들을 소개하듯, 어깨까지 쳐든 양손을 앞과 뒷사람의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그럴 일 없네요.”


딱 잘라 대답한 카리브는 홀로 굳어 서 있는 여자의 팔목을 세차게 낚아채며 줄에서 한 걸음 물러나, 남자의 근방에 있는 모두를 향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저분의 말 한마디로 인해 오늘 여러분의 귀중한 순번이 더럽혀졌습니다. 거기에다 또 한 가지, 여러분은 동료의 실언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사람 나서서 만류하려는 이가 없었죠. 돈을 쥐고 있는 사람은 여러분일지 몰라도, 거래에 응하는 사람은 접니다. 제가 못하겠다면 그걸로 그만인 거죠.”


카리브의 도박과도 같은 엄포는 의외로 꽤 먹혀들었다. 말속에 특정인을 넣은 것이 적중했다. 잡음이 일던 줄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모두의 신중한 눈길이 둘에게로 집중돼 있었다. 카리브는 숨을 고르며 그들을 타이르듯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조용해진 순간, 카리브는 승기를 예상했다.


“그런 의미로, 줄에 서 계신 동료 여러분들께서 저분을 대신해 양보를 해 주셔야겠습니다. 이 여성분을 오늘의 첫 손님으로 데려가도 불만 없으시겠지요?”


보통 카리브가 한 사람과의 거래에 소모하는 시간은 40분 내외였다. 몸의 부위를 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구도와 색, 상호 간의 의견 절충, 그리고 마지막 스케치까지를 모두 포함한 시간이었다. 줄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은 해가 지는 무렵부터였고, 그날의 마지막 의뢰인을 정하고 줄을 자르는 것은 그녀 작업실 건너편에 자리한 술집에 손님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무렵이었다. 많아야 하루에 일곱 사람. 지금 시비를 건 남자가 있는 위치는 앞에서 여섯 번째였다. 그러니까, 그 때문에 오늘을 날릴지도 모르는 인물만 근방에 여럿인 셈이다.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


남자가 두 사람에게로 거리를 좁히며 말했다. 여자는 움찔거렸지만, 카리브는 아니었다.


“저를 협박하기보다는 같이 계신 분들에게 사과부터 하는 게 우선 아닐까요?”


“내가? 내가 왜 사과를 해야 하지? 내가 질서를 흩뜨렸나?”


남자가 주변을 조금도 돌아보지 않고서 말했다.


“질서는 다수가 무너뜨리는 게 아니에요. 언제나 소수죠.”


말을 뱉은 카리브는 조금의 틈도 두지 않았다. 행여 그들이 자세를 바꿔 동조의 시간을 가지는 일이 없도록 재빨리 움직였다. 몸들이 붙어 있었고, 시선들이 모여 있었기에 카리브는 생각한 것보다 반 박자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그 누구일지언정 멀쩡한 논리를 걸고 늘어질 수 없게.


“상황이 꼬였다고 해서 근무에 연장은 없습니다. 오늘도 원래와 비슷한 시각에 작업을 마감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내일의 줄은 별개 사항입니다.”


대개는 허탈에 가까운 탄식이었다. 그리고 표정 구기는 게 극명히 두드러지는 사람이 딱 두 사람 있었다. 그 말을 면전에서 들은 남자와 남자 바로 뒤에 있던 사람이었다. 특히나 뒷사람은 기분이 상했다는 티를 행동으로 여가 없이 나타내 보였다. 카리브가 몸을 돌릴 때부터 품에 넣은 손을 꼼지락거리던 그는 카리브가 뒤돈 순간, 쥐고 있던 종이를 뭉쳐 그녀의 등 뒤로 집어 던졌다. 카리브는 무언가가 자신에게 날아와 부딪혔다는 것을 인지했지만, 이미 끝난 싸움에 일말의 흥미도 없었다. 그리고 내도록 조용히 다물고 있던 여자는 카리브가 잠긴 작업실의 문을 열자마자 입을 열었다.


“어쩌려고 그러셨어요?”


실내인 탓도 있었겠지만, 밖에서의 목소리와는 분명 결이 달랐다. 보다 얇고, 보다 가냘팠다.


“이제 와 따지기에는 늦지 않았어요?”


카리브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의외인데요. 내가 너무 겉모습만 봤나 봐요.”     


“상대가 가더인걸요.”


그 말에 카리브는 여자의 배꼽 아래에 있는 버클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말했다.


“그쪽은 가더 아니에요? 똑같은 가더 감싼 건데 뭐가 문제예요. 저들은 오래됐고, 당신은 탱탱해서?”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아시잖아요.”


카리브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능청스러운 걸음걸이로 입구에 선 여자를 작업실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너무 뜸을 들이지도, 너무 재촉하지도 않는 걸음이, 살포시 등에 얹은 손처럼 보여 떠미는 모양새였지만, 퍽 유순한 태가 돌았다. 그리고 어느덧 여자의 몸이 기다란 책상 앞 의자에 닿는 때가 되자, 카리브는 미끄러지듯 맞은편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으며 말했다.


“이렇게 새로운 의뢰인과 마주할 때면 늘 하던 말이 있는데 그쪽도 한번 들어 볼래요?”


“왜 저에게는 선택권을 주시는 건가요?”


여자가 물었다.


“음- 좋은 질문이에요. 라고 말해 주고 싶지만, 딱히 특출난 이유는 없어요. 매번 거기서 거기인 대답들만 들어서 그런 걸지도요. 하지만 굳이 꼽자면, 그쪽이 가져온 도안이 제일 정상적이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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