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의 실랑이였다. 발단은 택시가 목적지에 멈추고부터였다. 모퉁이에 차를 세운 기사가 돈 받기를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이유를 묻는 딘에게 기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멍청한 회사는 아직 모르는 눈치지만, 나는 알아. 돈의 존재가 앞으로 어떤 대접을 받게 될지 말이야. 그렇기에 나란 사람은 이것까지도 알고 있지. 차에 탄 옷가게 사장 놈이 실은 장사와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다는 사실.”
“언제부터 눈치채셨습니까?”
딘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리고 막 잠에서 깨어, 비몽사몽 한 얼굴로 딘의 옆에 쪼르르 붙은 소년이 그를 보고는 따라 웃었다.
“이곳으로 오자고 할 때부터.”
“하하. 겉에 칠이 된 택시는 앞으로 조심해서 타야겠군요.”
“근데 하나는 아직도 모르겠어.”
“무엇입니까? 기왕 들통 난 김에 말해 드리죠.”
“둘이 형제라고?”
물음을 건넨 기사는 애초에 대답을 듣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는 듯이 곧장 차를 돌려 들어온 길 반대편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멀어지는 후미등을 향해 딘은 한 방 먹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폐를 모른 척한 데서 눈치를 챈 거 같지?”
딘은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띠고 있는 소년을 향해 말했다.
“아니요. 그건 아닐 거예요.”
소년이 대답했다.
“그럼?”
“말한 대로일지도 모르죠. 눈을 감고 사는 사람이 아닌 이상, 시간이 지난 지금은 주변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을 테니까요.”
“…그래, 뭐. 어쨌든 저 영감이 회사에 이르지 않기를 빌자고.”
딘은 힘이 잔뜩 들어간 하관으로 담배를 깨물었다. 그리고 라이터를 쥔 손을 주머니에서 꺼내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구역의 끝. 그 끝을 바라보았다. 장벽은 작열하는 태양을 순식간에 얼려 놓은 것처럼 서늘한 한기를 내뿜으며 지면서부터 솟아올라 있었다. 언뜻 판단한다면 아득해 보이는 벽이었지만, 실상 그렇게 높은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구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옥상에 올라 뜀박질을 하면 너머에 있는 경관이 보일 정도였으니까. 정확히 그만큼이 되도록 설계된 높이였다. 재량껏 볼 수 있을 정도의, 재량껏 희망을 품을 수 있을 정도의. 그리고 그날 밤엔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저 장벽을 넘어가는, 혹은 통과하는 가더의 뒷모습을 본 사람이 말이다. 그래서 혹자들 가운데 누군가는 처참한 의견을 내기도 했다. 저 벽은 넘으라고 지은 것이 아니라 저들의 감상을 위해 존재했던 거야, 라고.
“곧장 가실 거예요?”
소년이 물었다.
“글쎄. 사실 확신하진 못하겠어. 약속을 잊었다고 말한대도 무색할 만큼 긴 시간이 흘렀으니까 말이야.”
“그래도 문은 열어 봐야죠?”
“…그래야지.”
딘은 대답과 동시에 고개를 내려 담배에 불을 붙였다. 또 한 번, 앳됨과 어울리지 않는 소년의 탐스러운 눈빛이 그곳을 스쳐 지나갔다. 굽는 부분 없이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벽과 구역의 끄트머리 사이에는 일정한 너비의 폭이 존재했다. 멀리서 보면 벽의 오랜 부스럼이 땅 위로 떨어져 쌓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검고, 지저분한 것이 전부인 곳이었다. 둘은 거기서 떨어져 벽과 평행한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외곽의 안개는 진즉에 사라지고 없었지만, 분위기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불을 켠 집은 꼽을 정도였고, 색 있는 간판이 달린 가게마저 모조리 불이 꺼져 있었다. 딘은 물론이거니와, 소년 역시도 어느새 분위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처럼 조용히 다리를 내려놓고만 있었다. 아무런 대화 없이 걷기만을 한 시간가량. 마침내 도착한 그곳은 앞서 불이 꺼져 있던 동네보다 좀 더 깊숙한 내곽 지역이었다. 다른 건 없었다. 주변이 온통 침침했고, 기존에 있던 공사판의 투박한 소리가 들리지 않을 뿐이었다.
“다행이다.”
소년이 하늘 아래를 찌를 기세로 뻗어 오른 무성한 나뭇가지를 보며 말했다.
“물론이고말고. 설마 걱정한 거야?”
딘은 소년의 시선을 따라가며 말했다.
“네.”
소년의 답에 딘은 슬쩍 미소를 띠었다가 숨기고는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 제아무리 잘난 놈 놀이를 한다고 해도 자연을 함부로 대할 용기가 있는 건 아주 소수의 인간뿐이니까.”
딘의 말에 소년은 잠시 숨죽인 채 뜸을 들이다 물었다.
“A구역의 왕은 소수에 속하는 사람이겠죠?”
소년이 딘의 얼굴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응, 아마 그럴 거야. 이 모두를 통제하고도 숨을 쉴 수 있다는 건, 그만한 배포가 그 사람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걸 테니.”
“그럼, 그만큼 나쁜 사람인 걸까요?”
“몰라. 우리라고 절대적인 신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 그걸 굳이 판단하려고 들지 말자. 인간은 그저 순리대로 흘러가는 걸 내버려두기 싫어하는 욕망덩어리, 그뿐이야.”
“뭐 어쨌거나, 나무가 살아 있어서 저는 그걸로 됐어요.”
딘은 소년이 뭘 말하는지 알았기에,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조금 더 걸음을 내밟았다. 단층의 건물 하나가 시야에 들어올 때까지. 건물의 외관은 간결했다. 가로로의 폭이 길었고, 정면 바로 위에 펍이라는 알파벳 세 자가 적당한 간격으로 붙어 있는 게 고작이었다. 내부에서 새어 나오는 빛은 양이 적었지만, 굵은 검은색 테두리 속에 흰색으로 불을 채운 정면의 조명은 깨나 밝게 빛을 내고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안으로 문을 밀친 딘은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년은 딘이 문을 잡아 놓은 사이에 가게의 안으로 몸을 잽싸게 밀어 넣었다.
“이게 누구야.”
이미 몇 차례의 잔을 비우고, 그 속에 담겨 있던 얼음까지 집어삼킨 듯한 체구를 가진 사내가 의자에서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리고 뒤이어 그를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자리를 차지한 남녀 한 쌍이 차례로 고개를 꾸벅였다. 두 사람은 서로 맞춘 듯이 양복을 입고 있었다. 딘은 능글맞게 세운 상체 아래에 손을 건 뒤, 기름칠이 된 나무 바닥을 소리 나게 찧으며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를 본 사내도 타이밍을 재더니 휘청이며 의자에서 내려와 몸을 세웠다. 남자의 몸이 먼저 기울어졌고, 딘이 자연스레 그를 받는 모습으로 둘은 상대의 품에 끌어안겼다. 오가는 말없이 두 사람은 그저 서로가 서로에게 건네는 살갗의 온기로써 한참을 대화했다. 그리고 딘이 먼저 힘주어 두른 팔을 거둬들이며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함께 해 줘서 정말 고마워. 쟝.”
그리고 그 눈길을 의자에 앉은 둘에게도 고스란히 이어 넘겼다.
“두 분도요. 제리 씨, 페퍼 씨.”
둘은 대칭이 되도록 합을 맞춘 것처럼 시크하게 잔을 들어 보였다. 생긴 것에 어울리는 반응들이었다. 자신이 훤칠하고, 어여쁘다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부류의 사람들.
“저리로 가 앉지.”
쟝이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딘은 대답과 동시에 소년에게 손짓을 보냈다. 그리고 내내 멀뚱히 있던 소년이 몸을 움직였다. 가운데 의자를 딘이, 제리 옆자리를 쟝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페퍼의 옆에 소년이 얼굴을 파묻으며 걸터앉았다. 총 다섯 사람. 나머지 의자들은 전부 공석이었다. 의자에 앉은 딘은 곧장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중심을 잡았다. 그리고 또, 가까워진 두 사람에게로 다시 한번 고개를 떨궈 예의를 차리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이곳 바텐더도 사라진 건가?”
딘은 출렁이는 쟝의 술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사라진 건 아니긴 하지만, 그 부분이 비상이긴 비상이야. 헛똑똑이들처럼 돈 버는 행위의 불필요성을 깨달은 거면 좋겠다만,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꼭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날 이후의 행적도 확인됐고. 그 말인즉, 아직 이 구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 되니까요. 애초에 사라진 건 가더들뿐이잖아요?”
쟝의 대답에 페퍼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제리가 그 틈을 타, 딘 앞에 있는 잔을 쟝의 앞으로 옮겨 주었다.
“그거면 됐습니다. 너무 걱정 안 해도 되겠군요.”
딘은 움직이는 잔을 보며 말했다.
“그래도 확실히 해 둘 필요는 있었죠.”
딘의 말에 제리가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피부 전반적으로 털이 많은 사람이었다. 특히, 아래쪽으로 발달한 하관의 옆을 타고서 저돌적으로 내려오는 양털과도 같은 수염은 반나절이라도 손보지 않는다면 잔뜩 헝클어질 것처럼 보였다. 깔끔하게 손질해 놓은 지금은 그런 티가 조금도 나지 않았지만.
“사람 바텐더가 일하던 유일한 곳이었으니까.”
제리가 큰 팔뚝 위로 당겨 놓은 셔츠 자락을 두툼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또 하나.”
그리고 제리는 말을 이었다.
“그날, 바깥 구역 인간들이 다녀갔다고 합니다.”
“도둑놈들 말입니까? 어떻게?”
그에 쟝이 처음 듣는다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제리 옆 세 사람의 시선도 그를 향해 나란히 집중되었다. 딘 역시도 전혀 알지 못하는 내용의 이야기였기에 흥미 돋친 눈으로 제리의 입을 눈으로 좇았다.
“글쎄요. 아마도 우연이겠죠. 그렇지 않아도 올 때가 됐다고 짐작하던 차이긴 하였으니까요. 다만 문제는 그들의 이번 등장이 우리에게 난제를 끼얹었다는 점입니다.”
“난제?”
쟝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한 달 전, 구역을 비추던 흰색 사이렌이 꺼지고 그들의 자취가 모조리 사라진 시각. 구역의 광장이 미어터지고, 발을 디딜 자리조차 찾기 어렵던 그때, 그 사람들이 다녀간 거니까요.”
제리가 말을 계속해 나갔다.
“제가 그들을 방관한 의도는 아주 단순한 이유였습니다. 기름 가득한 바다의 뒷배에 불씨 하나를 심어 놓듯이 말이죠.”
“여차할 때 놓을 맞불을 생각하신 거군요.”
쟝이 말하자, 제리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뭐가 난제라는 거예요?”
페퍼가 딘을 건너뛸 만큼 몸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그러니까, 정확히 세 부분입니다. 첫째, 그들이 다녀간 식료품 창고 옆에는 가더의 숙직실이 붙어 있다. 둘째, 그들이 다녀간 그날, 숙직실의 자리가 비워졌다. 셋째, 비어 있는 숙직실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이 우리들이 아닐 수도 있다.”
제리가 말을 마치자, 딘은 감정을 확인하는 여느 때처럼 눈을 감았다. 귓가에 들리는 세 사람의 목소리가 서서히 작아질 때까지 딘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한 달 전의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줄 세우기 시작했다. 더도 말고 정확하게 5초. 그 이상은 유지할 수 없었기에, 딘은 차례가 꼬이지 않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 이미지를 배열시켰다. 맨 처음으로 떠오른 이미지는 그날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저녁 풍경이었다. 해가 있거나 없거나 관계없이 우울한 길거리, 죄다 위축된 눈초리를 하고 길을 걷는 사람들. 하나를 완성한 딘은 그를 놓아준 다음, 다음 것을 떠올렸다. 그때의 나는 어디에 있었지. 아, 불 꺼진 카페. 그날도 나는 카페의 외야에서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었구나. 카페에 있을 때였나? 속으로 중얼거린 딘은 몸의 힘을 조금씩 빼내며 어두워진 눈앞으로 신경을 끌어모았다. 카페 테라스 옆으로 지나가는 고양이까지를 떠올린 딘은 다시 완성한 이미지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그다음, 저 멀리 도로 건너편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행렬을 떠올린 순간, 소리가 들려왔다. 행렬의 소리는 무척이나 난잡했다. 듣기 싫은 갖가지 음들이 갓 오른 신예들처럼 앞다투어 서로를 밀어내는 것 같았다. 그들의 모습이 보이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 부분에서 또렷하던 시야가 날뛰기 시작했지만, 딘은 끊지 않고 떠올린 이미지를 계속 밀고 나갔다. 그리고 그 뒤로 작은 전쟁이 이어졌다. 빈손으로 있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이 손에 무언가 흔들 수 있는 물건을 쥐고 있었다. 밟는 사람이 절반, 밟히는 사람이 절반. 그들의 전진은 퍽 폭력적이었다. 선두에는 스피커를 어깨에 진 청년 무리가 일렬로 걸음을 내리고 있었는데, 외설적인 가사 뒤로 어울리지 않는 현악기 소리가 흐르고 있어서 얼핏 들으면 어느 찬송가를 광적으로 편곡한 느낌도 들었다. 이제는 정말 앞서의 이미지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딘은 멈추지 않았다. 선명함을 위한 5초는 이미 포기한 지 오래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거리의 사람들은 동경의 대상이라도 발견한 듯 자연스레 그리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떨어져 나온 뭉텅이 같던 행렬은 군주가 되어 온 거리를 잡아먹었다. 전진, 전진, 전진. 행렬은 다음 날, 그다음 날까지도 거리를 서성였다.
“또 혼자 눈 감고 있다.”
소년이 엎드린 자세 그대로 입술을 실룩이며 말했다. 그러자, 누군가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쟝이 거들었다.
“보나 마나 그 잘난 놈의 기억력 타령이겠지.”
“타령까진 한 적 없어.”
딘은 눈을 뜨며 말했다.
“그래서 얼마나 유지할 수 있다고?”
쟝이 상체를 우측으로 틀며 물었다.
“길면 5초 정도.”
“언제의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으니까 그만하도록 해.”
“난 별말 하지 않았어. 엉큼한 자식.”
조롱이 한가득 섞인 쟝의 목소리가 한 곳에서 삐끗하며 튀어 올랐다. 그때야 느긋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제리도 킥킥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이내 웃음소리를 줄이며 말했다.
“어디까지 거닐다 오셨습니까?”
“우선은 그날 밤 광장의 사람들을 보고 왔습니다.”
딘은 왼손으로 미간을 꼬집으며 대답했다.
“하하, 그렇군요. 하지만, 그날은 정말 광장에 나가지 않고는 못 배길 하루였으니까요.”
그 말을 들은 딘은 장단을 맞춰 주었다.
“중요한 얘기 중에 흐름을 끊어 죄송합니다.”
제리는 미소와 함께 신사적인 얼굴을 지어 보였다.
“무슨 말씀을. 별로 재밌는 이야기도 아니었는걸요. 평소에 하던 지루한 의혹 제기죠. 결국 제가 하려던 말은 다시 세 가지입니다. 바깥 구역 인간들이 시티의 가더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바깥 구역 인간들이 비어 있는 가더의 숙직실을 먼저 발견했다. 마지막, 바깥 구역 인간들이 온 그날에 맞추어 가더가 물러났다.”
이번엔 눈을 감을 새도 없이 긴밀한 대화들이 오고 갔다. 먼저 목소리를 낸 사람은 페퍼였다.
“세 개나 되면 좀 위험한 거 아닌가. 보통 때도 저렇게 해서 맞아떨어진 게 50%는 넘을 텐데.”
그리고 쟝이 말했다.
“자리 비우는 사람 따로 있고, 머리 써야 하는 사람 따로 있군.”
“결국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의심하시는 거군요.”
딘의 말에 쟝이 반문했다.
“바깥 놈들? 그놈들을 왜.”
“제리 씨가 말한 세 가지 의혹에 빠지지 않는 것이 가더뿐만이 아니야. 모두 그곳 사람들이 등장한다고.”
“그놈들은 그럴 능력이 못 돼. 지금도 겨우 도둑질로써 배를 채우고 있는 족속들이니까.”
그때 말을 듣고 있던 제리가 쟝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놀랍게도 딘 씨의 말이 제가 하고 있는 생각과 일치합니다.”
제리는 손을 올린 그대로 말을 이었다.
“비록 평범한 의혹이지만, 그들을 제시하는 데엔 이유가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도둑이라는 점. 그 점이 가장 크게 작용합니다. 그들이 탈출을 꾀한 게 벌써 10년이 넘었죠. 그리고 작금의 시간까지 알게 모르게 그곳으로 빠져나간 사람들을 합치면 수십이 훌쩍 넘을 겁니다. 꽤 많은 숫자이지요.”
그리고 제리는 양복의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은으로 된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담배의 끝이 불붙기 바로 직전, 제리는 멈칫하더니 입에 문 담배를 다시 손으로 빼내며 텁텁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기를 들 시기가 지나도 한참이 지났다는 뜻이지요.”
제리의 말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 없는 술집의 술은 금방 동이 났다. 마지막 모금을 넘긴 제리가 못내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줄곧 아무것도 마시지 못한 소년이 그의 축축한 수염 근방을 탐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제리는 본인이 뱉은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는지를 모른다는 사람처럼 침묵을 이어 갔다. 반대로 페퍼는 단념했다는 듯이 혀를 입 밖으로 내밀고 있었다. 쟝도 마찬가지. 딘 홀로 제리를 따라 진지했다. 딘은 소년이 있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시늉을 하다가 곧장 반대로 고개를 틀어 제리를 향해 말했다.
“그들이 무기를 가져갔다고 한들,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제리는 잔에 묻은 물기를 화장품처럼 손바닥 전체에 골고루 펴 바르다 대답했다.
“글쎄요. 어쩌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이라는 건 자명한 사실 아니겠습니까.”
“단순히 시티에 살지 않아서요?”
딘은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는 사람처럼 말했다.
“단순하다고 표현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제리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고, 딘과 눈을 마주한 뒤에도 그 얼굴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딘은 한 발 앞에 마찰이 기다리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멈출 수 없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자존심, 혹은 취기. 확실한 건 없었지만, 딘은 둘 중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단순한 무리라고 생각지 않고 있었군요?”
딘은 제리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제리는 언제든 붉게 뒤바뀌는 것이 가능한 눈을 하고 있었다.
“반역입니다, 딘. 단순한 사람은 반역자가 될 꿈도 꾸지 못하죠. 두려워서요.”
제리가 답하자, 그저 지나갈 헤프닝 정도로 둘을 바라보던 양옆 두 사람의 눈동자가 심각하게 변해 가기 시작했다.
“반역이요? 그들이 우리에게까지 반역자입니까? 한때는 구역을 공유하고 살던 동료들입니다.”
그리고 딘이 말을 끝내는 그때, 쟝이 달아오른 분위기를 꺼뜨리려는 몸짓으로 제리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이래서 술이 필요한 건데.”
쟝은 딘을 향해 멈추라는 눈짓을 보냈다. 딘은 그를 봤지만, 못 본 척하였다. 그리고 딘은 제리의 차례를 가로채며 말을 덧댔다.
“도둑질을 방관한 건요?”
“이봐! 딘!!”
쟝이 소리쳤다.
“오래전 이야기를 꺼내시는군요.”
반대로 제리는 평온하게 목소리를 냈다.
“가더가 물러난 지금에 와서 할 말은 아니지만, 제가 그곳에 있을 당시엔 언젠가 분명 쓸 데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도둑맞은 물건들이 겨우 통조림이었지요. 따지고 봐도 손해 볼 투자는 아니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딘은 이미지를 떠올려 볼 필요도 없이 확실히 깨달았다. 지금 피어난 자신의 투기는 술이나 분위기에 휩쓸려 돋아난 것이 아닌, 아주 오래전부터 이입된 존중심 때문이라는걸. 참기를 멈춘 사람들을 향한 존중, 탈출을 감행한 사람들을 향한 존중, 새 삶을 얻은 사람들을 향한 존중. 존중이라는 사실을 속으로 확인하고 나자, 딘은 제리가 뱉은 말에서 단어 하나가 거슬렸다.
“겨우 통조림이라고요?”
그리고 제리가 딘의 속내를 눈치챈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틀린 표현도 아닙니다. 말 그대로 통조림은 어디까지나 비상식량일 뿐이니까요. 부유하지 않은 우리로서도 통조림을 식사의 주된 재료로 사용한 적은 없습니다.”
그에 딘은 말했다. 대화로 느껴지기에는 아슬아슬한 목소리였다.
“그들을 조롱하지 마십시오. 최소한 여기 있는 사람들의 배 이상의 용기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반역을 용기라고까지 말하는군요, 딘.”
그리고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제리의 얼굴에서 딘은 멀어졌다. 정확히는 두 사람이 동시에 떨어졌다. 쟝이 제리를, 페퍼가 딘을, 소년도 페퍼가 딘을 붙잡은 틈에 의자에서 몸을 내렸다. 그리고 소년은 벌어진 두 사람 사이로 들어가 우뚝 섰다. 나이 어린 사람의 참가는 나이 든 이에게 수치스러운 시간을 떠안겨 주었다. 젊음이 넘치는 인간 앞에서 딘을 포함한 네 사람은 대화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간 듯 말이 없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무리의 가운데를 점령한 소년은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밝고도 순조롭게 첫 단추를 끼웠다.
“싸우지 마세요. 우리가 이런다고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떠난 사람들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사라진 가더들이 나타나 영문을 들려주지도 않을 거예요. 여기, 우리의 상대는 시야에서 벗어난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아니잖아요. 당장에 문을 열고 나가면 보이는, 언제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차가운 눈이 달린 벽. 장벽 하나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