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영강 Aug 20. 2024

딘과 시티의 환락가

펍에서 나온 딘은 달아오른 열을 다스리듯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린 후,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베어 물었다. 그리고 아마도 뒤에 있을 소년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라이터의 부싯돌을 돌렸다. 길에는 완연한 어둠이 깔려 있었다. 딘은 펍 위에 매달린 이름 석 자가 내려 주는 흰색의 빛을 따라 걸음을 내렸다. 빛은 앞서 초저녁에 보였던 것보다 훨씬 더 색이 은은하고 길이가 길었다. 불빛이 끝나는 지점까지 다다른 딘은 멈춘 자리를 확인하고서 가지가 무성한 왼편으로 고개를 돌려 그곳으로 몇 걸음을 내디뎠다. 겹겹이 뭉친 잎사귀가 하늘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듯 보이는 그곳에서, 딘은 컴컴한 장벽의 윗부분을 찾아내었다.


“더럽게 높군.”


딘은 그와 동시에 생각을 이어 나갔다. 저 높은 곳을 오르려면 비범한 능력이 필요할 거야. 제일 손쉬운 건 하늘을 나는 능력이겠지. 아주 속 편한 능력이야. 나뿐만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 모두를 실어다 넘길 수 있으니까. 그게 과분하다면, 계단을 만드는 능력도 괜찮겠어. 그 한 주간 몸은 아프겠지만, 적어도 안전한 길 하나를 건사해 놓은 셈이니까. 그리고 딘은 생각에서 빠져나오며 누군가에게 말하듯 혼잣말을 뱉어냈다.


“그래요…, 그러니까, 결국 지금 저희에게는 확언을 할 만한 것들이 아무것도 없는 셈이 되는 겁니다. 하늘을 가로지를 길도, 마음 편히 다리를 올려놓을 발판도, 그 어느 것도요.”


그 뒤로도 딘은 얼마간 장벽을 보며 푸념했다. 벽을 오르는 자신을 상상하면서, 벽에서 떨어지는 자신을 상상하면서. 그리고 입술 바로 앞까지 담뱃재가 타들어 오자, 딘은 그것을 마쳤다. 다음으로 소년과 함께 택시에서 내렸던 곳까지 단숨에 걸음을 옮긴 딘은 그 자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환락가로 방향을 돌렸다. 환락가는 멀지 않았다. 설령 거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조밀하게 붙어 있는 조명들이 매혹적인 여성의 눈처럼 모여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걸을 수 있는 거리라는 신뢰를 사람들에게 안겨 주고 있었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걷기를 10여 분. 입구 바로 앞쪽까지 내밟은 딘은 코트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3시 09분. 딘은 걷었던 소매를 다시 손목까지 내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농밀한 색의 등불 아래에 세 명의 여성이 수증기와 같은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들 중 한 사람이 딘을 쳐다보고는 허공을 응시하며 말했다.


“조심하세요.”


딘은 셋 중 누가 자신에게 말을 건 것인지 정확하게 가려낼 수 있었다. 딘은 왼쪽 첫 번째에 서 있는 여자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무엇을 조심해야 합니까?”


딘이 가까이 오자, 옆의 둘은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여자가 대답했다.


“여자, 특히 타투 있는 여자.”


딘은 코웃음 치며 대꾸했다.


“초면인 사람에게 비밀을 말해 주는 사람보다는 위험할 것 같지 않은데요.”


딘의 말에 여자는 증기를 들이마시고는 그를 입 안에 머금은 채 말했다.


“조금 전 나와 잔 남자는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길래 당신은 어떨지 궁금했어요.”


“그래요, 어떤 대답을 해 드릴까요.”


“그저 알겠다고만 해 줘요.”


여자는 딘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몹시도 슬프고, 몹시도 촉촉한 눈이었다. 딘은 한참 동안 여자와 눈을 맞추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옆으로 발걸음을 내렸다. 그리고 여자의 몸이 자신의 뒤편으로 넘어갈 때 딘은 말했다.


“조심해야 할 건 그것뿐입니까?”


여자는 짧게 네, 라고 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딘이 걸어왔던 길을 그대로 따라 걸으며 입구서 천천히 멀어졌다. 딘은 여자가 떠난 자리에 조금 더 서 있다가, 안쪽으로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거리는 온통 붉은색투성이었다. 입구 바로 앞은 당연했고, 저기 멀리 높게 치솟은 건물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환락가의 사람들 대부분은 건물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리고 남녀 나눌 것 없이 모두가 황폐했다. 얼굴, 옷차림, 전부가 말이다. 딘은 코트의 깃을 세운 채 길의 중앙을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딘은 귀가 가려진 행색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향해 오는 시선은 가리고, 자신은 사각을 철저히 지킨 절묘한 각도로 그들을 관찰했다. 경험에서 고안된 요령이었다. 그렇기에, 무엇 하나 길게 유지되는 것이 없는 이곳 환락가는 딘에게 있어 먹잇감 될 것이 넘치는 그런 장소였다. 딘의 유흥은 간단했다. 장면을 시야에 집어넣고, 그 순간을 기억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그것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연결되어 머릿속에 저장됐다. 딘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어느 가게 앞에 멈춰 섰다. 가면이 매달려 있는 가게였다. 머물러 있는 사람은 없었고, 가게 앞 자그마한 의자에서 나이 든 여주인이 홀로 꾸벅꾸벅 고개 떨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딘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서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딘은 그 상태를 10초가량 유지했다. 그리고 딘은 여주인의 앞으로 소리를 내며 걸음을 옮겼다. 진열대까지 드리운 딘의 그림자에도 여주인은 여전히 자신의 졸음에 빠져 있었다. 딘은 허리를 굽혀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주인장.”


그리고 딘은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모자에서 흘러내린 솔방울 장식을 그녀의 어깨 앞으로 가지런히 돌려놓으며 다시금 말했다.


“주인장.”


그제야 그녀는 눈을 반쯤 떠올렸다. 그러고도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반이 감긴 눈으로 보이는 사람 형체가 꿈속의 것인지, 현실의 것인지를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딘은 모종의 최면에 걸린 것처럼 그녀가 하는 대로 따라 눈을 깜빡이다가 가까이에 있는 가면 하나를 집어 들며 말했다.


“아직도 이런 걸 내놓으니 손님이 없을 수밖에.”


그때, 여주인이 가슴팍까지 들려 있는 딘의 손목을 덥석 붙잡으며 말했다.


“그따위로 말하지 마. 네겐 이런 것들이라도 내겐 인생의 전부이니까.”


매콤한 그녀의 말투에 딘은 놀란 얼굴로 몸을 뒤로 내뺐다.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 딘은 대꾸했다.


“깨어 있으셨군요.”


그에 여주인이 딘에게 뻗었던 손을 자신의 앞치마에 닦으며 대답했다.


“깨어 있고말고. 이 고귀한 작품들을 몰래 훔쳐 가려는 애송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말에 딘은 대답했다.


“방금은 지나가는 말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내 면전에다 그렇게 말을 했으면 넌 죽었어.”


여주인의 눈은 이제 완전히 뜨여 있었다. 딘은 쥐고 있던 가면을 제자리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주제가 참 다양하네요. 색감들도 훌륭하고요. 특히 가게의 파라솔과 전부 잘 어울립니다.”


그리고 여주인이 대답했다.


“꼴같잖은 지적질이나 할 바에 거기 윗주머니에 들어 있는 담배나 하나 줘 봐.”


“피시려고요?”


“그래. 다들 썩어 가는 냄새를 풍기니 나도 뭔가를 물고 있어야 진정이 되겠어.”


그리고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때 딘은 여주인의 얼굴을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케케묵은 눈가의 검버섯과 힘없이 파인 볼때기까지 모두 다. 딘은 은색의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다가, 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었다.


“가면을 사러 온 손님인 줄 알았더니만.”


여주인이 말했다.


“섭섭해 마세요. 오늘의 저는 애초에 뭘 사기 위해 온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딘은 조금 더 구경을 하고 가겠다는 말 대신에 다른 가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건 무엇을 본뜬 겁니까?”


딘의 물음에 여주인은 실실 웃었다. 그리고 입에 문 담배를 절반 가까이 빨아들인 뒤에야 그에 대답했다.


“여자 가더의 얼굴 가죽.”


그리고 여주인은 자연스럽게 딘의 손에 들린 가면을 자신의 품으로 돌려받아 갔다.


“여자 가더요? 이젠 이런 물건에까지 수요층이 생겼나 보군요.”


“소문을 모르나?”


여주인이 놀랍다는 듯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무슨?”


“자네, 안쪽 사람이 아니었군?”


딘은 코로 나오는 헛웃음을 짧게 내쉬며 대답했다.


“오늘로 두 번째 되십니다. 같은 구역 내에도 장벽이 처져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신 분으로서는.”


여주인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아무튼. 아주 재밌는 사랑싸움이 하나 있었더랬지. 무려 두 가지 금기를 모조리 어긴 커플이야. 가더와 민간인, 여자와 여자.”


“가더와 민간인이 사귀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그렇대도. 이제 그 두 사람은 기약 없는 이별을 한 거야. 그것도 이곳 F구역에서.”


끝으로 여주인은 들릴 정도의 큰 소리로 혀를 찼다. 딘은 말없이 고개 끄덕이기를 반복했다. 적어도 표면만은 그랬다. 속으로는 이미 가정을 시작한 상태였다. 구역에 남은 여자는 어떤 여자이고, 그녀의 직업은 무엇이며, 가더가 철수하기 전에 있었을 마지막 만남에서는 둘 사이로 어떠한 대화가 오고 갔는지. 그러는 중에 여주인이 손을 무릎 위에 놓고 셈을 하듯 차례로 펼치고 있었다. 딘은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봤다.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라. 앞으로 몇 년일 거 같나?”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기간이었으면 저희가 여기에 묶여 사는 일도 없었겠죠.”


그리고 딘은 이어 말했다.


“그 여자, 어디를 가야 볼 수 있습니까?”


“왜, 만나려고? 어림없어. 아무도 못 만나. 찾아가 봐야 헛걸음일 거야. 분명해.”


딘은 여주인이 장소를 모른다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았다. 딘은 이해했다는 표정을 띰과 동시에 고개를 살짝 기울인 뒤, 팔을 올려 손끝으로 진열대를 훑었다. 그러다 이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고서 여주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위로 쳐든 팔을 그대로 아래를 향해 내리며 말했다.


“그 가면을 사겠습니다.”


그 말에 여주인이 웃음과 함께 말했다.


“광장에 있는 사람들은 여기와는 달라서 누굴 희롱하는 가면을 고운 시선으로 봐주지 않을 텐데?”


말을 들은 딘은 가면의 양쪽 볼에 걸려 있는 끈을 코트의 허리띠에 묶으며 재차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겹의 매듭을 허리에 덧댄 다음, 여주인에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