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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Aug 20. 2024

카리브의 작업실, 그리고 마라카투라

작업실에는 맥없이 끌려다니는 노인의 지팡이처럼 불규칙적으로 울리는 소리가 둘 존재했다. 하나는 프린터에서, 다른 하나는 창문 위에 달린 제습기에서. 벽지 본래의 무늬가 보이는 면은 네 면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가장 많은 것은 화이트보드, 특히 새하얀 보드 위에 덧칠된 유성 잉크의 양이 실로 어마어마했다. 당장에 확인 가능한 분류도 체계적인 수준이었다. 큰 분야의 주제부터 시작해서 작은 사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수작업이었고, 어느 것 하나 대충 필기하여 내버려둔 것이 없었다. 여자가 입을 열겠단 다짐을 시작한 것도 그녀의 시야가 존경스럽기 짝이 없는 카리브의 작업실 내부를 담으면서부터일 것이다. 카리브는 그러했다. 남들의 시선, 가까이로는 동료들의 시선, 그것이 두 번째였다. 다리를 건너가면 가더로부터 죽임을 당한 사람이 나올지언정 카리브는 그것이 두 번째였다. 그 결과로 카리브는 좋은 집을 구했으며, 질 좋은 음식을 매일 섭취할 수 있게 되었다. 카리브는 그 대가가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을 반납하는 것임을 잘 알았다. 돌아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곳. 이제는 꿈에서만이 닿을 수 있는 곳.


“이거 한번 봐 볼래요?”


카리브는 완성한 스케치를 여자의 앞으로 건네며 말했다.


“음…, 열매 수를 좀 더 늘릴 수는 없을까요? 여기랑 여기.”


여자가 자신이 가져왔던 도안을 찾는 눈빛으로 종이의 부분 부분을 집으며 말했다. 처음의 테가 10이었다면 지금은 그의 절반가량이 줄어든 얼굴이었다. 하지만 머리에 물든 은색은 여전히 돋보였고, 긴장도 조금은 풀린 듯이 겉으로 붉은 기가 흐르고 있었다.


“어디에 새긴다고 했죠?”


카리브는 스케치를 다시 자신의 품으로 회수하며 물었다.

     

“어깨에요.”


여자가 손으로 부위를 움켜쥐며 대답했다.


“본인 어깨가 그렇게 굵은 것 같아요?”


카리브는 금방이라도 놓을 듯한 활시위처럼 중지를 엄지로 바짝 당기고서 남은 손가락으로 어깨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열매가 많아야 그림이 풍성해지잖아요.”


여자가 그에 뒷걸음치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요량이라는 걸 알리려는 듯이 계속해서 어깨를 주물렀다.


“풍성해서 뭐 하려고요. 누구 나눠 줄 것도 아닌데.”


“제가 원하는 건 주렁주렁한 마라카투라예요.”


“고집 세네요.”


카리브는 한쪽 다리를 틀어 그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책상 위의 필통에서 새 연필 하나를 꺼내, 뒷부분을 종이에 두드리며 목을 쳐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답답하세요?”


여자가 물었다.


“조금.”


그리고 카리브는 천장의 어느 한 부분에 시선을 고정해 놓은 채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못할 정도는 아니에요.”


“왜요?”


물음을 건넨 여자는 카리브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천장은 작업실의 번잡스러운 네 면과는 달리 색이 새하얬다. 정말이지 하얀색뿐인 공간이어서, 가만히 보고 있다가는 자신이 바라는 그림을 떠올리기는커녕 순수한 벽 속으로 끌려가는 게 먼저일 것 같았다.


“당신은 그쪽에 종사하는 사람치고는 착해서.”


“보통은 어떤데요?”


여자의 물음에 카리브는 눈을 내려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여자의 고개도 그와 동시에 떨어졌고, 둘은 눈이 마주쳤다. 여자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보통은 주머니의 돈부터 집어던지죠.”

     

카리브는 손바닥 위로 바람을 불며 말했다. 카리브의 말에 여자가 몸에 달라붙는 하늘색 재킷 아래를 손으로 더듬으며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주머니에 돈을 가지고 있어요.”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가요.”


여자가 순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카리브는 이마 짚는 시늉을 보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뒤흔들었다. 그러고는 속으로 할 말과 입 밖으로 뱉을 말을 구분 짓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멍하게 벌린 입으로 말을 흘려보냈다.


“복장은 가더인데, 행동은 어린애네.”


“그러는 타투 선생님도 저랑 비슷한 나이 아니신가요?”


여자가 분하다는 말투로 대꾸했다.


“선생님? 내가 왜 선생님이에요?”


“아, 죄송해요. 호칭 부르기가 애매해서요. 뭐라고 불러 드릴까요? 따로 듣고 싶은 이름이 있으세요?”


“그쪽이 계속 선생님 호칭을 쓰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요?”


카리브는 연필을 잡고서 말했다.


“누명이에요. 저는 오래 볼 사람과는 확실한 거리를 정해 놓는 편을 선호하는걸요.”


그에 카리브는 비웃는 듯한 얼굴을 여자의 앞으로 내걸며 말했다.


“오래 볼 사람?”


“네. 오래 볼 사람. 저희 지금도 벌써 한 시간이나 넘게 서로를 보고 있어요.”


한 시간? 카리브는 슬그머니 눈동자를 움직여 시계를 쳐다봤다. 줄줄이 놓인 화이트보드 사이 한 구역, 시계는 카메라의 화면처럼 네모로 트여 있는 공간에 매달려 있었다. 시간을 확인한 카리브는 헛기침과 함께 여자를 향해 말을 뱉어냈다.


“음…, 꽤 흘렀네요.”


그에 여자가 말했다.


“저도 사실 방금 보고 말씀드린 거예요. 전혀 몰랐어요.”


“그래요. 나도 몰랐어요. 이렇게 길게 끌 생각은 없었는데.”


카리브는 다시 한번 시계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여자의 눈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안 들어도 될 소리가 하나 더 늘겠네요.”


“신경 안 써요. 그런 사람이 한둘 있는 것도 아니고.”


여자는 숫자를 강조해 말하며 일어날 생각이 없다는 듯이 책상 안쪽으로 몸을 더 말아 넣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눈을 둔 카리브와 시선을 나란히 하며 말을 이었다.


“리미트가 있나요?”


“리미트요? 당연히 아무런 리미트도 없죠, 내가 사장인데. 미안해요. 괜한 소리를 했어요. 차라리 다른 얘기를 할걸.”


말을 하는 카리브의 아랫입술이 가지런한 윗니를 살포시 떠받치며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여자도 따라 웃었다. 둘 사이에 핀 첫 웃음이었다. 내내 들이는 힘없이 때에 맞게 때우던 자리로 드리운 카리브의 미소는 한껏 아름다웠다. 카리브의 봉긋하게 뜬 앞머리가 위아래로 찰랑거렸고, 그 한 번을 따라 귓등 뒤로 넘긴 머리까지도 바람을 맞은 것처럼 예쁘게 움직거렸다. 그리고 둘은 짧게 찾아온 침묵을 조금의 불쾌함도 없이 받아들였다. 또다시 작업실은 한적한 지팡이 소리가 들리는 공간으로 뒤바뀌었다. 카리브는 여자의 웃는 얼굴을 보며 먼저 미소를 거둬들였다. 카리브의 미소는 사그라지는 시간이 너무도 빨랐지만, 여자는 그보다 좀 더 오래 미소 띤 얼굴을 유지했다.


“그래서 어떡할래요?”


카리브는 여자의 얼굴에서 눈을 돌리며 말했다.


“선생님이 정해 주시는 대로 할게요.”


여자가 대답했다.


“음. 오늘은 일단 돌아가고, 내일 다시 와요. 가는 김에 정리도 좀 해 오고요. 마음에 드는 도안을 발견하면 새로 가져와도 돼요.”


말을 마친 카리브는 종이 위에 도안을 소리 나게 펼쳐 놓았다.


“버리신 줄 알았어요.”


여자가 카리브의 손 틈으로 보이는 빨간 열매를 보며 말했다.


“말이 되는 소릴. 여기가 복잡하긴 해도, 쓰레기장은 아니에요. 아무튼 오늘 이 도안은 그쪽…”


그대로 말을 끝맺었으면 될걸, 라고 생각한 순간, 카리브는 멈칫거렸다. 그리고 여자는 행동이 빨랐다.


“안 돼요. 이름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규정이에요.”


여자의 말 다음으로는 카리브 자신도 늦었다는 걸 안다는 얼굴이 이어졌다.


“오늘 미안할 짓을 많이 하네요. 그쪽한테.”


그에 여자가 말했다.


“별일들도 아니었는걸요. 다음에 새 도안을 가져다드릴게요.”


“오늘 들고 온 것도 나쁘지 않았어요. 열매가 좀 컸을 뿐이지.”


카리브는 덮고 있던 손을 옆으로 치워 손톱으로 도안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자는 해맑은 표정으로 웃었다. 그리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인사했다.


“안녕히 계세요.”


카리브는 앉은자리에서 눈을 들어 올리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한마디 없이 줄곧 여자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문에 가까워지자 비로소 입술을 떼었다.


“가능한 일찍 줄을 서도록 해요.”


최선의 표현이었다고 카리브는 생각했다. 또, 여자가 금방 알아들었다는 듯 고갯짓을 했기에, 그럴 것이라고 카리브는 생각했다. 여자의 모습이 사라지자, 금방 새로운 누군가가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와 똑같은 차림에서 아래위의 면적만을 잔뜩 늘려 놓은 듯한 몸을 가진 남자였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는 카리브를 발견하자마자 도안과 돈을 집어던졌다. 카리브는 덧없는 눈으로 떨어지는 도안을 쫓았다. 처음엔 닥친 상황만을 눈에 담아 혼란스러워했다면, 지금의 카리브에겐 그 둘을 잘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거듭된 횟수에 요령이 생긴 것이다. 카리브는 의자에서 몸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무리 중에 반듯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종이를 찾았다. 구김 없이 평평하게 바닥과 붙어 있는 것이 딱 하나 보였다. 카리브는 그 순간 한숨을 내쉴 뻔했지만, 턱에 힘을 주어 그를 가까스로 틀어막았다. 그리고 비슷한 무렵에 남자가 의자에 몸을 싣는 소리가 났다. 그를 들은 카리브는 덤덤히 마음을 다잡았다. 절대 먼저 말을 건네지 않으리라, 절대 상대보다 많은 말을 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카리브는 양쪽 볼을 이로 콱 깨물어 얼굴 구석구석에 잡혀 있을 성난 근육들을 풀어냈다. 남자의 목소리는 소음과 같았다. 음정에 조금의 질서가 없었고, 늘어놓는 말에도 두서가 없었다. 아주 길고도 꽉 찬 말이었지만, 결국은 아랫사람에게 부탁의 예절을 갖출 줄 모르는 흔한 어른에 불과해 보였다. 카리브는 언젠가부터 고개로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종반에 이르러서는 남자조차 자신이 무슨 말을 잇고 있는지 모른다는 눈치였다. 카리브는 40분이 넘어가는 무렵에 스케치를 완성하였다. 그로부터 도출되는 결말은 모두 엇비슷했다. 카리브로부터 건네받은 스케치를 숨길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 그리고 모두에게 해당하는 사항은 아니었지만, 스케치를 들고 나갈 때는 들어올 때 없던 동작 하나가 추가되었다. 인사였다. 소음을 내뱉던 남자 역시 그런 유형이었다. 본인이 던진 돈을 본인이 밟으며 허리를 굽히는. 카리브는 당황하지 않았다. 수없이 목격한 장면이었다. 카리브는 속으로 속삭였다. 더, 더, 조금만 더. 바닥으로 내려가던 남자는 1초를 채 채우지 않고 허리를 들어 올렸다. 굽혔던 남자가 눈을 맞춰 오자 카리브는 웃음으로 화답하는 한편, 홀로 아쉬워했다. 저 무렵에서 일 센티만 더 떨어졌으면 신기록인데, 라고. 그 뒤로 세 사람이 추가로 카리브의 작업실에 들어왔다 나갔다. 셋 모두 별 특성도, 개성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도안이라고 가져온 것들조차 주인과 마찬가지로 별 볼 일 없었다. 차라리 돈을 던졌던 남자의 경우가 나았다. 적당히 교감신경을 증폭시키고, 확실한 거리를 형성하여 끝에 이르러서는 널브러진 돈과 괜찮은 스케치밖에 남는 것이 없는. 마지막 의뢰인과 함께 일어나 작업실을 닫은 카리브는 문에 달린 잠금장치를 모조리 걸어 잠갔다. 그리고 카리브는 조심히 얼굴을 문에 대고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예상 그대로였다. 줄의 여섯 번째에 서 있던 남자의 목소리가 꽤 가까운 거리에서 번지고 있었다. 그는 금방 작업실을 나선 사람에게 무어라고 딴지를 거는 중인 듯했다. 카리브는 남자의 말에 집중하며 작업실을 빠져나갔던 여자를 떠올렸다. 은색의 머릿결 아래로 숨은 주먹만 한 머리, 여우를 닮은 듯 한 말투, 어떻게 봐도 어울리지 않는 유니폼.


‘잘 돌아갔겠지.’


속으로 생각한 카리브는 구태여 입을 다문 남자들 사이로 걸어 나가는 여자의 뒷모습까지를 상상했다. 목부터 어깨, 등, 허리, 골반, 제대로 보지도 못한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갔고, 어느새 제법 그럴듯한 곡선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카리브는 자신이 만든 반쪽짜리 인간을 감상하며 어정쩡하게 기댄 몸을 똑바로 돌려놓았다. 분이 가라앉지 않은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여전히 문밖을 떠돌고 있었지만, 카리브는 이제 그에는 조금도 관심이 가지 않았다. 카리브는 눈을 감고서 앞치마에 손을 넣어 리모컨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작업실의 숨을 하나둘 꺼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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