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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Aug 20. 2024

하이든, 그리고 30번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더 흐른 뒤에야 카리브는 이불을 박찰 수 있었다. 베개 옆으로 드러난 그녀의 귀 한쪽에는 피어싱이 한가득 자리해 있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시작된 것들이었다. 이불의 끝을 놓지 않은 채로 침대에 걸터앉은 카리브는 약하게 떨리는 눈으로 방을 바라봤다. 오늘 역시 조금도 개운하지 못하고, 조금도 덜어내지 못한 낯빛이었다. 카리브는 창가의 블라인드 안쪽에 비치돼 있는 물감 병을 역순으로 읊었다. 그리고 32개의 병 중에 마지막, 심홍색 병에서 눈을 멈췄다. 눈을 멈춘 카리브는 말 뱉는 것을 잊지 않았다.


“빌어먹을 마라카투라.”


“빌어먹을 가더.”


“빌어먹을 시티.”


마치 일종의 선언문을 낭독하듯 카리브는 한 문장을 읽고, 끊어 내고, 읽고, 끊어 냈다. 차이 없는 발악과 반복에서 카리브는 이제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하는 것이었고, 하지 않으면 허전할 뿐이었다. 거기서 얼마간 멍하니 있던 카리브는 한 달 전 여느 날의 자신과 마찬가지로, 제일 먼저 라디오가 놓인 자그마한 나무 탁자로 걸음을 옮겼다. 흰색의 탁자에는 세 개의 수납공간이 세로로 떨어져 있었는데, 셋 모두 카세트테이프가 정갈히 채워져 있었다. 카리브는 두 번째 서랍에서 테이프 하나를 빼내 들었다. 테이프의 전면부에 작은 크기의 필기체로 알렐루야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카리브는 하이든, 그의 곡 중 30번을 가장 좋아했다. 본격적인 변주가 가미되기 전의 마지막 곡이라는 점이 그 이유였다. 카세트테이프 필름의 균형이 한쪽으로 쏠려 있었다. 그리고 라디오에서 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곡이 시작되자 카리브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런 뒤에 눈을 감고서 들려오는 관현악기 소리에 자신의 숨소리를 얹었다. 한숨이 곡에 잊히고, 잊힌 자리 위로 새로이 아름다운 음률이 들어왔다. 카리브는 라디오에 삼켜진 테이프에서 덜컥하고 걸리는 소리가 피어날 때까지 그 행위를 반복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색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그 옆의 갈색 카펫으로 돈들이 한가득 널브러져 있었다. 지폐가 대부분이었고, 작은 동전들이 그들 사이에 간간이 뒤섞여 있었다. 탁자에서 걸음을 물리던 카리브는 발끝으로 지폐의 얇실한 감촉이 느껴지자 아래를 보며 말했다.


“퍽이나.”


그리고 카리브는 발가락 사이로 파고든 동전들을 발길질로 뿌리쳐 냈다. 그녀의 발에서 튕겨 나간 동전들이 고통을 아는 생명처럼 큰소리를 내며 벽으로 가 부딪혀 떨어졌다. 그리고 기어코 자신의 앞으로 되돌아오는 동전 한 닢을 향해 카리브는 말했다.


“있으라고 부탁할 땐 없던 것들이 이젠 발에 치이는 신세라니, 웃겨.”


카리브는 제자리에서 회전하는 동전을 발바닥으로 지그시 누른 뒤, 부엌으로 몸을 이끌었다. 부엌이라고 구분 지어져 있는 공간은 가벽은커녕, 침대가 놓여 있던 안방의 공간면적에 절반도 채 미치지 못했다. 부엌에는 정확히 있어야 할 것만 두 가지 자리해 있었다. 오른 벽면에 붙박인 싱크대와 1구짜리 가스레인지, 그리고, 구석진 모퉁이에 서 있는 이끼의 색을 닮은 냉장고 한 대. 카리브는 먼저 싱크대 수도꼭지 입구에 손가락을 넣어, 고여 있는 물로써 눈을 씻었다. 그녀의 가늘고 길게 치솟은 속눈썹 아래로 물기를 머금은 퀭한 눈이 억지처럼 희미하게 빛나다 금세 사라졌다. 그리고 옆으로 빠져나간 한 개의 자그마한 물방울이 눈동자의 끝을 타고 카리브의 뺨 아래쪽으로 흘러내렸다. 카리브는 가만히 기다렸다가 물방울이 더 이상 흐를 힘없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자, 손등으로 그를 닦아 냈다. 부엌에서의 일은 거기까지였다. 카리브는 들였던 발걸음을 돌려 다시 침실로 향했다. 바닥에 쌓인 돈, 창가의 물감 병, 라디오와 나무 탁자, 1인용 침대. 그것들을 제외하면 나머지 모두는 그녀의 옷가지였다. 카리브는 사방 온 곳에 아무렇게나 고꾸라진 옷들을 둘러보다, 자신에게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남색 셔츠를 주워 들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잠그는 게 가능한 단추란 단추는 모조리 채워 목 근처까지를 가렸다. 그녀의 하의는 늘 단벌이었다. 살에 딱 달라붙는 어두운색의 청바지. 바지를 올린 카리브는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을 허리에 놓고 반 바퀴를 빙 돌려, 배꼽 아래로 넘어오는 셔츠를 바지의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현관 옆에 모여 있는 실내등 스위치들을 하나하나 켜 둔 상태로 설정해 놓은 뒤, 문의 잠금을 차례로 풀어 나갔다. 복도에는 어떠한 기척도 없이 조용했다. 총 5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빌라, 카리브는 그중 꼭대기 층에 거주했다. 카리브가 층을 하나씩 내려갈 때마다 색이 다른 센서 조명들이 그녀를 비춰 왔다. 그리고 다다른 1층, 1층에는 그전 층들과 달리 조명이 매립되어 있지 않았다. 대신, 그보다 훨씬 폭이 넓고, 밝기가 강렬한 무엇이 존재했다. 출구의 자동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온 카리브는 본능에 따라 고개를 올려 눈이 부신 빛을 쳐다봤다. 시계였다. 디지털 형식의 시계. 좌우의 너비가 길고, 빌라 겉면적의 반을 차지하다시피 매달린 시계는 마치 밤을 날려 버릴 시한폭탄의 모습으로 시간을 나타내고 있었다. 초를 나타내는 숫자 옆에 붙어 빠르게 올라가는 소수점 두 자리가 특히 그런 면을 더했다. 시계 아래에 선 카리브는 치솟는 숫자들을 잠시 감상한 뒤, 화단에서 삐져나온 작은 나무가 가리키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날은 거의 저물어 화단의 사이마다 조명이 켜져 있었다. 카리브는 벤치 하나를 붙잡아 몸을 앉힌 뒤, 양팔을 걸치고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가까운 데서 들려오는 거리의 팡파르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


“축제, 축제, 축제.”


“여전한 분위기구나.”


카리브는 비아냥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카리브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저기에 끼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해. 일단 내가 저들과 섞이고 싶지 않다는 게 첫째, 둘째는 내가 돈을 너무 많이 벌어서.”


“그래, 돈이 문제야. 원래라면 한 자릿수 번지에 배정될 수 있을 정도의 액수이니까. 그래서 내가 저기에 끼지 못하는 거야.”


“이 모든 게 꿈은 아니겠지? 아니야, 사실은 꿈속인 게 아닐까? 현실의 나는 여전히 푼 돈에 그림을 그려 주는 생계형 화가이고, 떨어진 물감을 사지 못해 허덕이며, 먹고 싶은 음식보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고르는 추한…, 됐어. 그만. 겨우 얼마 전까지의 일들인데 까마득한 기억을 더듬는 기분이야. …아무튼, 이 재미없는 이야기의 결론은, 현재의 나는 어느 누구 부럽지 않게 잘되었다는 거.”


그리고 카리브는 때가 된 걸 알았기에, 고개를 들어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검은 형체로만 보면, 대충 예닐곱 명은 넘어 보였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팔목에 무언가를 길게 두르고 있었다. 해를 등지고 있는 탓에 정확한 색을 유추하기는 어려웠지만, 대충 불그스름한 띠였다. 그리고 그들 중앙에 유독 그림자가 짧은 것이 하나 있었다. 짧은 그림자는 다른 이들보다 걸음을 재촉하는 느낌이 있었다. 그러다 문득, 짧은 그림자가 걸음을 멈춰 세웠다. 짧은 그림자는 한쪽 팔을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양옆에 있던 다른 그림자들이 짧은 그림자 하나를 따라 일제히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모여 있던 모두의 팔이 하늘을 향하자, 중앙에서부터 큰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배신자 카리브는 물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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