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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Aug 20. 2024

F구역 58번지와 여자 가더의 가면

코트의 허리띠에 묶여 있는 가면이 딘의 걸음을 따라 흔들거렸다. 동이 트기 시작하자, 환락가의 불이 하나씩 꺼져 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거리의 복판을 차지하고 있던 무수한 사람들이 환영처럼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딘은 해산을 목전에 둔 듯 보이는 패거리의 앞에 멈추어 서고서 팩에 남은 마지막 담배를 꺼내 입에 문 뒤, 지금까지 입수한 정보를 머릿속으로 되짚어가기 시작했다.


‘여자의 이름은 카리브. 벽이 지어지기 이전서부터 회화 영역으로 정평이 나 있던 인물. 한결같이 그림만을 고집했던 사람. 그런 그녀가 돌연 뒤바뀐 시점은 벽이 지어지고 난 이후. 가더와의 친밀도가 오르고부터. 가더와 가까워진 그녀는 일반 주민을 제외한 나머지, 즉, 가더만을 자신의 의뢰인으로 취급. 가더의 철수 이전까지 막대한 현금을 축적하였을 것으로 예상. 그리고 현재…’


딘은 현재라는 단어 이후로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지금까지의 축약 역시나 확실한 것이 못되었다. 비상등이 켜진 자동차 앞에서 돌리던 스패너를 칠 듯이 휘두르는 사람이나, 취한 몸을 소화전에 기대어 있는 사람이나, 입에 담긴 음식물을 평생토록 가져갈 듯한 사람이나, 말을 섞은 것은 그런 사람들뿐이었기에. 현재라는 단어를 놓고 할 수 있는 것은 상상이 모든 것이었다. 머릿속으로 잇던 문장이 끊기자, 딘은 눈을 떴다. 패거리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그들이 머물던 곳을 보며 딘은 말했다.


“사랑이든 아니든, 보이던 누군가가 사라지는 건 슬픈 일이지.”


딘은 잎이 타고 재만이 기다랗게 남은 담배를 빈 거리 위로 뱉으며 자리에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돌아선 방향으로 보이는 넓은 길에 시선을 두고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타투 있는 여자를 조심하라고 했던 건, 카리브 한 사람만을 두고 한 말은 아닐 거야. 그녀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직업을 전향했을 뿐인 일개 타투이스트에 불과하니까.”


그럼, 대체 왜. 딘은 계속해서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수평을 이루던 저울과도 같은 사고는 이미 한쪽으로 치우치는 중이었다. 현실에서 맞닿았던 입구의 여자는 서서히 잊혀 갔고, 얼굴도 알지 못하는 카리브라는 여자의 형체는 어느새 딘의 머릿속에 깊숙이 각인됐다. 딘은 스스로 생각해 낸 가상의 카리브를 고스란히 떠올려 놓은 채로 넓게 트여 있는 도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거의 환락가의 종착 무렵이었다. 거기에는 삼각형 모양의 표지판이 높게 솟아 있었다. 노란색 바탕에 검은색 글귀였다.


‘F-1’


딘은 치솟은 표지판을 우두커니 쳐다보며 말했다.


“광장까지 도착할 수 있겠지.”


동이 튼 무렵이었음에도 도로는 적막했다. 한 줄의 흰색 차선이 도로를 정확히 절반으로 쪼개 놓고 있었다. 멀어지는 방향, 가까워지는 방향, 양쪽 모두 굽이 없는 완벽한 직선이었다. 그를 본 딘은 왠지 모를 아찔함이 느껴져 표지판 아래의 봉에 몸을 기댄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로의 양옆으로는 닿는 것만으로도 거칠게 쓸릴 듯한 모래와 말라비틀어진 식물들, 그리고 사이사이 웅크리고 있는 바윗덩어리가 보였다. 날씨는 조용했다. 바람이 있었지만, 세기와 온도가 적당하여 부는 것 같지 않았다. 코트의 단추를 잠그든 풀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온도였다. 딘은 조심스럽게 첫걸음을 내려놓았다. 딘의 발아래에서 환락가 바닥과는 전혀 다른 소리가 피어올랐다. 술 취한 쓰레기의 부스럭거림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소리. 딘은 숨을 들이마신 다음, 다시 한 걸음을 앞으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딘은 처음 보는 동물을 대하듯 서서히 자신의 걸음을 길들였다. 그리고, 오롯이 걷는다는 행위에만 온 신경을 집중할 수 있는 순간이 되자, 딘은 목을 앞으로 내밀고 앞뒤로 흔들던 양팔을 코트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 상황 그대로 세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도 딘의 옆으로 지나간 차량은 없었다. 말 그대로 오늘의 도로를 소유하고 있는 것은 오직 딘 한 명뿐이었다.


“…그래, 이제 좀 정리가 됐어.”


딘은 자리에 양발을 가지런히 놓으며 말했다. 그때가 도로에 내디딘 딘의 다리가 처음으로 멈춰 선 순간이었다. 딘의 뒤를 받치고 있던 장벽은 이제 높게 치솟은 건축물이 아닌, 땅과 평행한 하나의 직선이 되어 있었다. 딘은 주머니에서 새 담뱃갑을 꺼내, 떠는 손으로 비닐을 잡아 뜯었다. 담배를 입에 문 딘은 말을 이었다.


“망할 놈의 이미지가 계속해서 끊겼던 건 만난 경험이 없기 때문이야. 내가, 그 사람과.”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 직접 대면해 봐야만 해. 그녀를 만나면 모든 걸 정리할 수 있을 거야. 내가 무엇 때문에 이 고생길에 올랐는지 나조차도 의문인 상황이니까 말이야.”


말을 마친 딘은 다시 걸음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혼잣말을 계속했다. 딘의 혼잣말 가운데, 도로 주변 풍경이 차츰 변해 갔다. 특히 눈에 띄는 그곳은 마치 물과 기름과도 같은 경계였다. 경계가 있음으로써 차이는 더욱 적나라하게 두드러졌다. 지금껏 이어져 오던 모든 것에 저주가 스며들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보석처럼 빛나던 모래는 깡마른 해저에 처박힌 듯 회색빛이 돌았고, 중앙을 지키고 있던 흰색의 차선 또한 여기저기 긁히고 뜯긴 양 추레하고 볼품없었다. 그리고 저기, 멀지 않은 자리에 전과 같은 모양의 표지판이 또 하나 서 있었다. 그에 딘은 발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그리고, 표지판과 자신의 거리가 약 열 걸음 안쪽으로 좁혀지자, 속으로 말했다.


‘구역 내의 모든 번지가 이와 같은 간격으로 벌어져 있었더라면, 현재의 시티는 곧 터질 듯한 기다란 뱀의 형태를 띠고 있었겠지.’


딘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표지판 앞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곤 녹이 잔뜩 끼어 있는 더러운 봉에 손을 갖다 댈 엄두는 차마 내지 못한 채로 반대쪽으로 몸을 넘기어 삼각형 뒤에 있는 글귀를 올려다보았다.


‘F-10’


그리고 그곳에는 아까의 표지판처럼 단순히 알파벳 하나와 10이라는 숫자만 쓰여 있지 않았다. 표지판 속에는 붉은색 라카로 쓴 단어들이 각기 다른 글씨체로 덮여 있었다. 모두가 극단적인 뜻을 지닌 단어였다.


멸망, 죽음, 환멸, 치욕, 고통, 붕괴.


“겨우 1과 10이지. 똑같이 숫자 하나만큼의 차이일 뿐이야. 다른 점이라곤 한 자릿수와 두 자릿수라는 것밖에 없어.”


“정말 그것밖에 없지. 그것밖에 없는데, 왜 우리는 한 자릿수에 올라 살기를 집착했던 걸까.”


그리고 딘은 침에 젖어 필터가 물렁해진 담배를 껌처럼 질겅질겅 씹으며 표지판에 있는 눈길을 거둬들였다. 도로와 맞닿아 있는 F-10의 입구는 이전의 풍경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환락가와 비슷한가, 그것도 아니었다. 환락가는 무엇엔가 취한 사람들이 흘리거나 떨어뜨린 것들이 모여 쓰레기가 되어 있었다면, 이곳은 보이는 것 자체로 쓰레기 더미를 연상시켰다. 길가에 줄지어 있는 나무들부터 그러했다. 그들의 가지에는 잎이 없었다. 도리어 길게 늘어뜨려진 폭죽의 잔해들이 많았다. 아마도 한 달 전의 소동에 쓰인 물건인 듯했다. 그리고 표지판에서 떨어진 지 얼마 안 되는 곳에서 직선으로만 이어지던 길이 갈라졌다. 길은 동서남북, 정확히 네 방향을 가리켰다. 광장이었다. 그곳이 광장이라는 것은 고개를 들면 알 수 있었다. 하늘이 온통 거울투성이었으니까. 공중의 길처럼 촘촘하게 이어져 있는 거울은 양옆 폭이 넓고, 무척이나 반질거렸다. 딘은 고개를 들어 거울 속 자신과 얼굴을 마주했다. 그리고 근처의 행인 몇몇을 향하여도 그와 비슷한 눈빛을 보내었다. 딘은 마지막으로 보라색 블라우스와 색을 맞춘 우산을 쥔 여인을 쳐다본 다음, 나지막이 말을 뱉었다.


“택시 기사는 저 거울 속 세상을 두고 밝다 표현했던 건가.”


그리고 딘은 허리띠에 손을 가져가 가면이 단단히 묶여 있는지를 확인했다. 또한 환락가에서부터 올리고 있던 깃을 반듯하게 펼쳐 아래로 내리는 것 역시 빼먹지 않았다. 구역의 중심부답게 광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들의 분위기도 먼젓번의 1번지와는 달랐다. 얼굴에 여유가 있었다. 딘은 앞으로 굽은 어깨를 가볍게 털어 다시 힘을 넣은 다음, 자연스레 걸어가 그들 사이로 몸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일부러 보이게끔 매단 가면이 관심 있는 사람의 눈에 띌 수 있도록 이리저리 요란스럽게 발자국을 찍어댔다. 소식이 온 건, 허기가 느껴져 그도 모르게 음식점으로 몸이 이끌리는 순간이었다. 딘은 첫 느낌을 음험함이라 생각했다. 음험함은 그의 등 뒤에서 시작됐다. 딘은 보다 확실한 신호를 기다리고 싶었지만, 스타카토처럼 정확하게 끊어져 전달되어 오는 촉감에 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딘과 눈을 똑바로 마주칠 수 있을 정도로 키가 큰 여성이었다. 인상적인 것은 키 하나만이 아니었다. 오른쪽 눈가에서 사선으로 꺾이는 곳에 있는 점 하나, 콧등에서 사선으로 꺾이는 곳에 있는 점 하나. 흔히 매력점이라고 불리는 점을 두 곳 모두에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눈이 매우 컸다.


“이봐요.”


여자가 바람에 날린 치마를 옆으로 감아 한 손에 쥐며 말했다.


“네?”


딘은 남자가 아니란 사실에 놀랐지만, 티를 내지 않으며 답했다.

     

“꼴을 보니 한 자릿수 구역에서 온 사람 같은데, 그쪽이 이전에 얼마나 잘난 사람이었는진 몰라도,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어요. 구역을 담당하고 있던 가더들이 몽땅 철수했다고요.”


“저는 단지 사람을 찾고 있을 뿐인걸요.”


“찾는다고요? 카리브를? 그년을 왜 찾죠?”


“카리브, 그 사람이 이 가면과 관련 있는 게 맞습니까?”


“맞냐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년 때문에 한동안 광장이 난리가 났었는데. 아- 그렇구나. 당신, 한 자릿수 구역에 거주하는 사람이 아니군요?”


그게 또 얘기가 그렇게 되나, 딘은 입술에 침을 바르며 생각했다. 그러는 와중에 여자가 말을 계속했다.


“이젠 눈앞에 보이는 옷으로도 분간할 수 없는 세상이 돼 버렸네요. 그래요, 정말이지 깜빡 속을 뻔했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딘은 물었다.


“사람요! 당신 같은 사람! 복장만 멀쩡하지, 실상은 하위 번지에 배정되어 살고 있던 사람!”


여자는 말을 끝낼 때까지 딘의 인중 높이로 치켜든 손가락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딘은 삿대질을 치우라는 말도, 당신이 세 번째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의 성미로 인해 흐트러진 앞머리를 조용히 손으로 빗어 넘길 뿐이었다.


“어디로 가야 그녀를 만날 수 있습니까?”


딘은 잔잔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요. 알려 주지 않을 거예요.”


여자가 단호히 말했다.


“오해가 있으신가 본데, 저는 이름 없는 당신에게 볼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카리브라는 재능 있는 사람을 만나러 온 것이지.”


“뭐라고요?!”


“처음으로 제게 말을 걸어 주신 분이라는 데에 있어서는 각별한 고마움을 표합니다. 그러니 감사의 표시로 재밌는 예언 하나를 건네 드리죠. 이제 곧 세뇌가 풀릴 겁니다. F구역 전체에 퍼져 있는 암세포 같은 세뇌가요.”


딘의 말에 여자는 당황한 듯 잠시 얼었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 정체가 뭐죠?”


그에 딘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58번지, 이 구역의 끝에 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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