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다 할 화해 없이 문을 차고 나간 딘의 뒤로 남겨진 이들의 분위기는 의외로 아무렇지 않았다. 분위기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쟝의 역할이 컸다. 특유의 서글서글한 입담으로 순식간에 사람들을 한데 묶었고, 제리와 페퍼 또한 쟝의 말에 맞춰 큰소리로 웃음을 내뱉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불이 켜진 펍을 빠져나와 쟝의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도로를 달리는 도중에도 수다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창밖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결국 문을 닫고 말 거라는 이야기겠죠.”
그리고 쟝은 백미러에서 소년과 눈이 마주치자, 늘그막에 가까운 얼굴을 익살스럽게 지어 보였다. 소년은 앞니 두 개를 드러내며 빙긋 웃었다가, 옆자리에 있는 페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우리의 운전사 씨가 그렇대.”
페퍼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너는 그날이 오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게 뭐야?”
그에 소년이 기댄 머리를 옆으로 돌리며 대답했다.
“저는 우선 왕의 침실을 마음껏 돌아다녀 보고 싶어요. 아! 물론 조금도 씻지 않은 상태 그대로요!”
“왕? 왕이 누군데?”
페퍼의 물음에 쟝이 핸들에서 한 손을 놓으며 말했다.
“한 명밖에 더 있습니까. 시티 내 최고구역을 총괄하는 지도자, 그 사람이 왕이지요. 저도 딘 녀석에게 귀가 닳도록 들은 터라 지금은 그러려니 하고서 입 밖으로 내곤 합니다. 조금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표현이기는 하지만요.”
“뭐야, 그게. 이봐, 꼬마. 앞으로 왕이라는 단어는 금지야.”
페퍼가 소년의 귀를 힘껏 잡아당기며 말했다. 소년은 페퍼에게 끌려가면서도 입을 앙다문 채로 또박또박 말을 뱉어냈다.
“왜요? 너무 정확한 표현이라서요?”
그리고 무척이나 호탕한 웃음소리가 짧고 굵게 차 안을 울렸다. 웃음을 터뜨린 쟝은 백미러로 소년을 한 번 쳐다본 다음, 조수석에 앉은 제리의 표정을 요령껏 확인했다. 제리는 조용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좋고 안 좋고의 문제가 아니야. 너무 거북스러워.”
“거북스럽다는 건 사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왕이라는 단어를 씀에 있어, 그 정도는 극복한 사내라고요.”
“뭐라는 거야, 요 땅딸막한 게.”
페퍼는 이번에는 소년의 팔을 붙잡고 그의 팔목 위로 자신의 손바닥을 강하게 내리쳤다. 소년은 자신이 매를 맞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표정으로 벌겋게 변해 가는 자신의 팔목과 페퍼의 손바닥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쩍쩍 달라붙는 살 소리가 그친 건, 줄곧 등받이에 기대어 앞 유리만을 보고 있던 제리가 입을 열었을 때였다. 제리는 말을 꺼내기 전, 조수석 창문을 최대한으로 내렸다.
“딘 씨는 어디로 갔을까요.”
뒤의 두 사람은 대꾸하지 않았다. 쟝 역시도 두 사람만큼은 아니었지만, 곧장 그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애초에 제리의 행동과 말이 오묘했다. 정말로 딘의 행선지가 궁금한 것인지, 소년을 맡기듯 내버려두고 갈 만큼 성을 보인 딘의 상태가 궁금한 것인지.
“아- 제리 씨, 우선은 말이죠. 그러니까, 두 분 사이에 아무래도 불협화음이 일었던 건 사실입니다만, 딘 그 친구가 그렇게까지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단단히 정해 놓았던 길을 함부로 벗어난다거나, 소리 없이 자취를 감춰 버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친구의 입장으로서가 아니라, 사람을 보는 객관적인 눈으로써요. 객관적인 눈.”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아까는 딘 씨에게 너무했었지요. 실상 자리에 가만히 있던 건 그이고, 일을 만들어 먼지를 일으킨 건 저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제리는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얼굴로 반듯하게 접혀 있는 셔츠 소매를 손목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을 이었다.
“오늘의 달은 무척이나 아름답군요. 딘 씨가 동승해 있었더라면, 그에게 저 달을 눈에 담으라고 권하였을 것 같습니다.”
제리의 말을 들은 쟝은 목을 운전대 앞으로 비스듬히 내밀어 슬며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은 검정뿐인 하늘에 홀로 떠 있었다. 별은 없었다. 어두운 밤하늘에 잡아먹히지 않고 떠 있는 건 둥글고 푸르른 달 하나가 전부였다.
“먼 옛날의 사람들은 달을 토끼의 집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제리가 멀찍이 놓은 시선을 그대로 둔 채로 말했다.
“토끼요?”
쟝이 모르는 말투로 되묻자, 뒷좌석에 있던 페퍼가 입을 열었다.
“어, 저 그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오늘처럼 달이 크게 떠오르는 날이면 축제를 벌이기도 했다고.”
“그렇습니다. 축제를 벌였다고도 하죠. …우리의 조상들은 퍽 낭만의 시대에 살았었나 봅니다. 지금의 시티에는 달을 보며 감상에 젖을 사람이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요. 순수한 감상에 젖어 있기에는 너무도 멀리 와 버린 시대입니다, 제리 씨.”
그리고 쟝은 고개를 정면으로 되돌리며 계속해 말했다.
“그렇기에 우리의 목표가 더욱 또렷해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장벽을 오르는 것. 그리고 너머의 풍경을 보며 마음껏 흐느끼는 것.”
“흐느낀다…, 흐느낀다는 행위를 쟝 씨의 입을 통해 들으니, 단어의 무게가 실로 사실적으로 느껴지는군요. 정말이지 깊게 와닿는 표현입니다. 그때의 저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요. 환희, 슬픔, 보람, 절망, 희망, 좌절…, 골백번을 상상한대도 감히 알 수 없겠지요. 그 순간을 실제로 닥쳐 보지 않고서는.”
“그거 아십니까, 이제 금방 제리 씨가 줄을 세운 감정의 종류가 좋고 나쁨을 반복하며 나열되었다는 거.”
쟝의 말에 제리는 이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소리 내 웃었다. 꿈꾸는 청년과도 같은 웃음이었다.
“하하하. 그랬습니까. 어느 쪽이 됐든 하나의 감정만으로는 오래 지내지 못할 모양이군요. 결국 양쪽 모두를 느껴야 한다면, 모쪼록 좋은 쪽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동감입니다.”
그리고 소년이 어른 둘의 대화에 틈이 생기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쟝의 말이 끝나자마자 쏜살같이 말을 뱉어내었다.
“그럼, 그날을 성공적으로 지새고 나면, 문을 닫은 가게에 남은 물건들을 제가 다 가져 버려도 되나요?”
그에 페퍼가 소년의 볼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뭐라고? 요 녀석이. 안 돼.”
그리고, 운전대가 내리쳐지는 여러 번의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쟝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래! 물론이지. 물론이고말고. 모두 다 가져. 거기 있는 모두를 네 것으로 만들어 버리라 이 말이야.”
“쟝! 그건 반인륜적인 일이에요. 애를 범죄자로 만들 셈이에요?”
“안 될 거 있습니까. 머지않아 무법지대가 될 곳입니다. 질서도, 법도, 양보도 없는 곳에서 젊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싸움이에요. 힘이란 말입니다. 그 누구도 남을 지키려 들지 않을 것이고요. 혹시 압니까? 저 친구가 훗날 시티의 제일가는 대도가 되어 있을지.”
“아니요. 꿈에서라도 그건 절대 안 되는 일이에요. 지금 같은 평화가 영원토록 이어질지도 모르잖아요?”
“페퍼 씨, 그건 제 사지를 걸고 단언합니다만, 절대, 절대, 이어지지 않을 겁니다. 지금의 F구역은 꺼지기 직전의 성냥이에요. 불이 꺼지면 다들 괴물이 되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제리가 굵다란 시가를 품에서 꺼내 들며 말했다.
“제 팔다리도 걸지요.”
“제리! 당신까지!! 아이 앞이란 걸 잊었어요?!”
“쟝 씨의 말에 공감하기에 그렇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아이는 강해져야 해요. 앞으로 있을 세상을 버티려면 그 방법밖에 없을 테니까요.”
말을 들은 페퍼는 꼬집고 있던 소년을 옆으로 밀치며 양 좌석의 가운데로 몸을 집어넣었다. 무서울 정도로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이 주황색 조명과 만나 고주망태가 된 술집 여인의 낯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양쪽 좌석 등받이 위로 손을 올린 페퍼가 고개를 들이밀며 팽팽하게 늘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요들! 우리가 뜻을 모은 건 장벽을 오르려는 청렴한 이상주의 때문이에요. 고향이 망하기를 바라고, 그런 고향을 등지고 떠나려는 파렴치한이 되기 위함이 아니라.”
“그거야 당연한 말씀이지요. 페퍼 씨. 오해를 하실까 말을 덧붙입니다만, 저는 어린애 마냥, 편 가름 놀이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페퍼 씨가 떠올리고 있는 상상도를 부정하는 것뿐이에요.”
그리고 제리는 가까이 다가온 페퍼의 얼굴에서 떨어지며 조수석 서랍 위에 놓인 라이터를 쥐어 들었다. 새파란 불꽃이 일순 강렬한 소리를 내며 솟아올랐다. 제리는 불이 붙은 시가를 눈을 감은 채로 천천히 들이마신 뒤, 연기를 넓게 퍼뜨려 창밖으로 내뿜고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려놓으며 말했다.
“말씀대로 저희는 이상주의자입니다. 하지만 수식어를 붙여야겠죠. 겁쟁이 이상주의자, 라고요. 부정하지 못하실 겁니다. 장장 1년에 걸친 시간, 내곽 어느 곳에서 파견되었는지도 모를 사람들이 땅을 파고, 차곡차곡 벽을 쌓아 나가는 걸 보고만 있던 것이 우리의 민낯이었으니까요. 누구 하나 그들을 향해 적개심을 표출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사건이 되어 버린 지금, 당시의 상황 속에서 분노를 삼키고 있던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페퍼 씨, 우리가 사는 구역에는, 이곳 F구역에는 평화란 단어가 안착될 수 없습니다.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