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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Aug 22. 2024

모자 형제

클래식과 함께한 잠은 누구에게 있어서도 세상 달콤한 밤이었을 것이다. 가게의 불은 새벽이 되어서도 꺼지지 않았다. 밤새 머무르고 있던 길가의 검은색이 점점 옅어져 갔다. 그리고, 두 사람이 기대어 있는 가게의 유리에서 엔틱한 황동색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게의 전부를 어우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퓨티와 워블은 서로에게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퓨티의 품에는 녹색의 백팩이 안겨 있었고, 워블에게는 스카프가 감겨 있었다. 그리고 한 번씩 강한 바람이 불 때면 워블의 새끼손가락에서 찰그랑 소리가 났다. 가게 주인은 끝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홀로 고고한 세계에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거나, 가게 밖에서 나는 불협화음의 존재에 겁을 먹어 나오지 못하는 중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마도 여자보다는 남자일 가능성이 크고, 황혼기를 지나 보낸 노인이기보다는 겉만 늙은 애늙은이이지 않을까. 1번지에서 금관악기를 판다는 건 축제가 이곳까지 번지기를 바라고 있다는 뜻일 테니. 클래식은 계속해서 흘렀다. 작곡가가 일정하게 바뀐다는 건 주인의 섬세함을 말하는 거겠지. 그리고 어제 흘러나왔던 말러의 곡이 다시 나올 무렵, 퓨티는 잠에서 깨어났다. 기시감이라고 말하기에는 모호했다. 여전히 시티는 퓨티에게 낯섦을 자아내는 곳이었으니까. 눈을 뜬 퓨티는 고개를 돌려 자신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확인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고개가 돌아가려는 그때, 퓨티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워블이 어깨 아래로 숨을 내쉬고 있었다. 퓨티는 워블을 깨울까 고민하다, 그녀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퓨티는 워블의 얼굴 주름 중 유독 길게 뻗어 있는 주름 하나를 눈으로 훑어 내 려갔다. 주름진 피부는 굵은 바늘로 장시간 누른 것 같이 파여 있었다. 윤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으며, 애초에 수분이란 게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몹시 푸석했다. 퓨티는 주름이 끝나는 마지막까지 숨을 쉬지 않고 집중했다. 그러다 문득, 워블의 잠잠하던 숨소리가 멈추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언제 깨셨어요.”


퓨티의 속삭이는 목소리에 워블은 살며시 눈을 뜨며 대답했다.


“남의 얼굴을 불쌍하단 표정으로 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누가요?”


“네가.”


“불쌍하단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아니긴. 딱 불쌍한 사람 동정하는 눈이던데.”


“아니에요.”


“정말?”


“정말.”


“아, 워블 씨. 말씀드릴 게 있어요.”


“네, 말해요.”


워블은 기대어 있던 얼굴을 눈치 있게 떨어뜨려 주었다. 그리고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눈으로 퓨티를 바라봤다.


“어제 장벽을 만지고 왔어요.”


“무슨 뜻이에요?”


“장벽 너머에 있는 사람과 대화도 나누었고요.”


“…음, 실제 이야기는 아니죠?”


퓨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를 보니 좋은 말을 들었나 보네요.”


“네. 대부분이 격려의 말이었어요. 먼 곳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고, 시티에 돌아온 걸 환영한다고요. 그들 대부분의 목소리가 마치 레드 할아버지를 품은 듯했어요. 한없이 넓음에도 푸근함을 잃지 않은 목소리. 그런 목소리는 흔치 않거든요.”


“그럼, 결심이 선 거예요?”


“네.”


“잘됐네요. 나도 마침 결심이 선 참이었는데.”

     

“사실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거 아니었어요?”


“뭐가요?”


“장벽을 넘는 일이요.”


“그럴 리가요. 줄곧 고민했는걸요. 답이 정해져 있었다면 그 사람들을 두고 이렇게 나오지도 않았겠죠.”


“아니요. 새끼손가락의 열쇠가 그를 증명해 주고 있어요.”


“열쇠?”


워블은 열쇠가 걸린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그 순간, 퓨티는 워블을 향해 말을 던졌다.


“저희가 타고 온 트럭이 지금 어디에 세워져 있죠?”


퓨티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리고, 말을 들은 워블은 무언가를 준비하듯 조금 더 아래로 상체를 숙였다. 아마도 그렇게 솔직한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이는 건, 워블에게도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을 것이다. 주름 맺힌 살점이 잊힐 만큼 부풀어 오름과 동시에 언제고 처져 있던 입꼬리가 끝을 모르는 채 치솟아 오르는, 말하자면, 광휘로 가득 찬 여인의 향기. 워블은 그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한 상태로 퓨티에게 대답을 건넸다.


“58번지. 아이를 만났던 곳.”


“그것 보세요. 정해져 있었잖아요.”


“너무 나쁜 사람 취급하진 말아요. 난 세상을 얻은 기분이었으니까요.”


“그 아이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어머, 퓨티. 그건 납치범한테나 할 말 아니에요?”


“어떻게 하는 방법에 납치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달리 일을 꾸밀 생각은 없어요. 그냥 그들 속에 있을 거예요.”


퓨티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말씀해 보세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우선은 그곳으로 돌아가도록 해요. 이야기는 그다음에.”


워블은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일어난 자리에서 찰그랑 소리가 울렸다.


“웃지 말아요.”

     

워블이 일어나는 퓨티의 머리를 톡 치며 말했다. 그리고 워블은 이대로 발을 떼는 게 아쉬운지 가게 내부를 훔쳐봤다. 아마도 사람 행색을 한 누군가를 워블이 발견했더라면, 그녀는 지금 당장에 떠나기를 마다했을지도 모른다. 퓨티는 가게의 블록에서 내려와 워블의 팔을 당겼다. 그래요, 워블이 말했다. 길은 조용했다. 저 멀리 장벽 아래 그늘진 곳을 제외하면 모든 건물이 남청색으로 보였다. 온도는 초가을쯤의 쌀쌀함이 느껴지는 정도. 워블이 블록에서 내려오자 퓨티는 자연스럽게 워블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처음과 같이 두 사람은 1번지를 걷기 시작했다. 퓨티의 화두는 길을 걷는 한동안에도 트럭 열쇠에 있었으나, 워블은 언제나 비슷한 대답을 내놓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대화가 끝나고부터는 설명의 시간이 이어졌다. 워블은 퓨티에게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려 줬다. 퓨티의 눈길이 닿는 곳이면, 워블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특히, 길가의 가로등이 꺼지는 순간, 퓨티는 어느 때보다 놀란 모습을 보였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워블도 그랬다. 그녀 역시 이제야 깨달은 듯했다. 가더들이 철수한 지 한 달이 넘어가는 지금, 어째서 그들은 아직도 전기를 공급하고 있는 걸까. 그때부터 워블은 말을 아꼈다. 퓨티는 워블이 그처럼 변하자, 더 이상 질문을 건네지 않았다. 그러나 퓨티는 관찰을 계속했다. 퓨티는 작은 물건보다 큰 물건에 관심이 있었다. 이를테면 주택, 자동차, 유리, 도로, 시계, 간판. 그리고 퓨티는 곧잘 적응해 나갔다.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58번지에서 1번지까지 오는 길에 잠을 자고 있었다는 것, 그게 아쉬웠다. 퓨티는 입을 앙다물며 그 사이에 있을 법한 것들을 상상했다. 워블에게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워블은 아직도 변한 모습에서 되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덧 길이 밝아졌다. 워블의 왼편으로 커다란 시계탑이 서 있었다. 퓨티는 워블을 힐끔 쳐다보고는 한 번 더 눈을 돌려 탑을 올려다봤다. 숫자는 얼핏 읽을 수 있었다. 퓨티는 소리 내 말했다.


“5에 하나, 1에 하나.”


“아니다. 2에 좀 더 가까운 건가?”


“아아- 영 모르겠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덤덤하게 있을걸.”


“그래, 괜히 호들갑을 떨었어. 사실은 그다지 놀란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보여 주기식 엉덩방아 한 번에 사람이 입을 다물 줄 누가 알았겠어. 상상도 못 했다, 정말.”


워블의 입꼬리는 아아- 하는 퓨티의 탄식서부터 이미 움직거리고 있었다.


“1인극이라도 하는 거예요?”

     

워블이 참던 웃음을 한 번에 터뜨리며 말했다.


“제가 뭐 하려고요. 보는 사람도 없는데.”


“잠시 생각할 게 있었어요. 삐치지 말아요.”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셨는지 설명해 주시면 풀게요.”


그 말에 워블은 걸음을 멈춰 세웠다.


“이상한 게 있어서요.”


“제가 못 알아들을까요?”


“네.”


“약소하게 알려 주시면요?”


“약소라는 단어도 알아요?”


“마토 씨네 심부름을 가면 책을 종종 읽었거든요. 대부분이 전문 서적이라 볼 수 있는 건 몇 없었지만.”


그에 워블이 이해했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그가 소설 이야기를 꺼냈을 때 흥미를 가졌던 거군요? 그들은 상대적으로 읽기가 수월한 책이니까.”


퓨티는 홈과 사형대에 갔던 그날이 떠올라 기분이 오묘했지만, 부정하지는 않았다. 퓨티가 고개를 끄덕이자 워블이 말을 이었다.


“어디 보자, 그럼 나도 그와 비슷하게 설명해 볼게요.”


그리고 그때, 키가 무척이나 큰 사내 둘이 길모퉁이에서 튀어나왔다. 워블은 즉시 퓨티를 길의 안쪽으로 옮겼고, 숨을 죽인 채 퓨티의 손을 놓았다. 한 명은 흰색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다른 한 명의 얼굴은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눈 밑에 검은 칠을 진하게 그려 있는 사람이었다. 장신인 사람답게 그들의 보폭은 널찍했다. 이쪽에서 조심성을 띠어도 금방 거리가 좁혀질 만한 속도였다. 조금만 더 있으면 스쳐 지나갈 거리가 되었다. 워블은 조금 더 퓨티를 안쪽으로 밀어 넣었고, 몸으로 밀침과 동시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가만히 따라와요. 절대 아무 말 하지 말고요.”


모자를 쓴 사람이 워블을 슬쩍 보더니 도로에 대고 침을 퉤 뱉었다. 그리고 동행 중인 남자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소곤거렸다. 이제 세 걸음이면 닿을 거리가 되었다. 퓨티는 워블의 신발을 보며 걸음을 맞추었다. 두려움이 들진 않았다. 상황 자체를 이해 못 한 것도 있었지만, 워블의 걸음이 너무도 당당했기에 퓨티는 안심을 느꼈다. 그리고, 모자를 쓴 사내와 워블의 어깨가 스치듯이 부딪히며 지나갔다. 워블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역겹게.”


검은 칠을 한 사내가 말했다. 그 소리를 들은 워블은 퓨티를 앞쪽에 내버려둔 채 홀로 뒤돌아 대꾸했다.


“조용히 가던 길 가도록 해요. 우린 짐승들과 어울릴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어이, 늙은이. 다시 말해 봐.”


언성이 높아지자, 그를 기다렸다는 듯이 모자 쓴 사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존댓말을 했다.


“짐승은 그쪽 두 사람이 아닌가요?”


여전히 입술 위로의 얼굴은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근거라, 보통 사람 같았으면 근거를 논하지 않았겠죠. 우릴 정신 나간 사람 취급하며 제 갈 길을 갔을 겁니다. 그러나, 당신께선 근거를 대령하라고 하시는군요.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되십니까.”


퓨티는 사내의 말을 정확히 이해했다. 워블이 고개를 숙이라고 한 것도, 당당하게 저들을 상대하던 워블이 한순간에 벙어리가 돼 버린 것도. 모두. 그리고 퓨티는 지난밤, 페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랬던 자기 동료들이 모두 증발해 버렸대요. 거짓말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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