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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Aug 22. 2024

딘의 선포

딘은 회의를 잡지 않았다. 그저 선포했다. 자신을 포함한 이곳의 모두는 일주일 뒤에 장벽에 오를 것이라고. 이외에 쓸모없는 의문은 가볍게 묵살했다. 특히 딘의 그 말을 들은 카리브가 시티 바깥에서 온 두 여인, 퓨티와 워블의 이름을 끈질기게 거론했지만, 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들에게도 동등한 시간을 주었습니다. 일주일 내에 돌아온다면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고, 일주일이 지나고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두 번 다시 그 두 사람과 마주할 일이 없겠죠.”


딘의 말을 들은 소년과 페퍼는 달리 말이 없었다. 문제는 제리였는데, 그는 딘의 앞에서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 역할은 거기까지입니다.”


“물론입니다. 그건 진작에 약속되어 있던 일이니까요. 그런데 정말 장벽에 올라 보지 않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번 한 번으로 끝날 일도 아니잖습니까. 저는 뒷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날에 모일 인파들을 생각하면 안전을 위해서라도 누군가는 아래에 있는 것이 맞을 테고요.”


옳은 말이었다. 카리브를 지지하는 예술가들이 머무르는 번지는 1번지가 아니라 광장이 있는 10번지 근방이었으니까.


“그때 만났다고 한 청년을 기억하십니까?”


제리가 딘의 얼굴 앞으로 스패너를 닦던 걸레를 내밀며 물었다.


“장벽 앞에서 만났다는 그 청년 말인가요? 전에도 말씀하셨죠.”

     

“네. 아무래도 계속 신경이 쓰여서 말입니다.”


“제리 씨 생각은 어떠십니까? 그때 들은 말로써는 별 볼 일 없는 사람 같던데요. 우리의 앞으로 나타나기만 했지 제대로 된 협박조차 없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의도가 없지는 않을 겁니다. 뒷배에 누가 있는 게 아니라면 혼자의 몸으로 그렇게 나서기가 쉽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그리고 제리는 담배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걸리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동료들이 하나둘 증발할 거라고 했거든요, 그놈이.”


“아,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결국엔 허풍일 거라고 결론짓지 않았는지요.”


“허풍이라…”


말끝을 흐린 제리는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그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던지라.”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말씀이시군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거기서 딘은 슬쩍 제리를 떠봤다.


“저는 변절을 꾀한 자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의 가능성을 제시하라고 한다면, 우리와 비슷한 계획을 도모 중인 제3의 집단이 있다고 판단하는 게 맞겠죠. 이를테면, 다리 한쪽을 다른 데에다가도 걸쳐 놓았다던가, 하는.”


그리고, 두 사람이 서 있는 철제 난간이 흔들거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흥분이라기엔 강도가 약했다. 오히려 제리는 그 찰나에 생긴 시간을 즐기는 듯 보였다. 쫓기는 티 하나 없이,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제리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담배에 붙은 불씨가 차차 꺼져 갔다. 그리고 모두 타 버린 담배에서 타이어 타는 듯한 냄새가 번질 때쯤에 제리는 혀로 담배를 툭 밀어뜨리며 말을 뱉어냈다.


“저를 의심하고 계셨군요.”


딘은 저에 대한 자신의 대답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걸 빠르게 알아챘다. 셀 수 없는 모래알들이 모래시계의 좁은 구멍 속으로 지체 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얼마인지도 모를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제리가 딘을 기다려 주지 않은 건, 아마도 그의 귓가에 들리던 모래 소리가 그쳤기 때문일 것이다.


“요약해서 말씀드리자면, 저는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반걸음 정도 물러나 있는 사람일 뿐이죠. 그러나, 인정합니다. 물러나 있는 사람치고는 격한 모습을 자주 보인 것도 사실이니.”


그리고 제리는 덥수룩한 수염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까?”


딘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런 것 같더군요.”


“아, 이 질문을 잊을 뻔했네요.”


“말씀하세요.”


“소년의 손을 빌려 쓴 편지는 무슨 뜻이었습니까?”


철제 난간이 이번엔 확실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제리는 거짓을 입에 담는 소인배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고민의 틈도 없이 곧바로 답을 했다.


“그걸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만, 이미 탄로가 난 마당에 의문을 품을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딘은 부릅뜬 눈으로 제리를 바라봤다.


“이유를 묻고 있습니다.”


“이유라…, 글쎄요. 한참 전의 일이라서.”


“전이요? 최근에 보낸 것이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네. 58번지에서 창고를 관리할 당시에 보냈던 것입니다. 그때 몇몇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돌았죠. 재고가 맞지 않는다. 누군가가 물품을 빼돌리는 것 같다. 저는 그곳의 총책임자였기에 그 문제를 하루빨리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더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할 처지가 될 게 뻔했으니까요. 그때부터 공식적인 서류가 아닌, 저 혼자만의 일지를 적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시점에 재고가 비고, 물건이 사라지는 주기는 어떻게 되는지를요.”


“그러다가 그들을 발견한 것이로군요. 그 뒤로는 전에 말했다시피 방관을 한 것이고요.”


“그렇습니다. 컨테이너가 맞물리는 구석 자리에 배기관만 한 구멍이 하나 있습니다. 사이로 오가는 것이라고 해 봐야 쥐새끼들뿐이니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지요.”


딘은 방금 제리가 말한 구멍이 무엇인지 단번에 떠올랐다. 그러나 그를 보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구멍을 그들이 사용했나요?”


“맞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던 거죠? 창고 바로 옆에는 가더들이 머물고 있었을 텐데요.”


딘의 물음에 제리는 두 번째 담배를 입에 물며 불을 붙였다. 그리고 연기가 폐에 가득 찰 때까지 빨아들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딘은 그를 보며 펍에서 오고 갔던 대화를 회상했다. 그러다 정확히 한 단어를 포착해 내었다.


보험.


“제가 도왔습니다. 사실상 방관만 한 건 아닌 셈이지요.”


제리는 물고 있던 담배를 반대손으로 옮기며 말을 이었다.


“가짜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더군요. 도망자는 즉각 사살이지만, 수확 따위를 위한 외출은 허가가 나던 때이기 때문에 그를 파고든 듯합니다. 머리를 잘 쓴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킴이라는 지칭을 이미 알고 계셨겠군요?”


“그건 아닙니다. 제대로 대면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순전히 관찰과 조달만 했습니다. 한번 날짜를 기록하고 보니, 오는 날이 일정하더군요.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 혹은 일요일. 주말. 창고의 직원들이 조기퇴근을 하는 날입니다."


“흥미롭군요. 그럼, 그들이 가져가고 난 이후에 비게 되는 자리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양이 적다고 한들 금방 탄로가 날 텐데요.”


“하하하.”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낸 제리는 또다시 담배를 혀로 밀어내 바닥에 떨어뜨린 다음, 세 번째 담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불을 붙이려던 손을 내린 후, 말했다.


“머리를 좀 썼습니다. 쓰레기장에 있는 통들을 닦고, 그 안에 무거운 돌을 넣어 새것처럼 보이게끔 포장했죠. 보통은 맨 앞에 있는 것부터 선출이 되기 때문에, 한 달 정도의 기간이라면 들키지 않는 데 문제가 없었습니다.”


딘은 보험이라는 단어가 입에서 맴돌았지만, 참았다.


“선행을 하셨군요.”


“아니요. 저를 위해 한 일이었을 뿐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그 당시에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으니까요.”


“그 그림에 소년의 편지도 포함되어 있습니까.”


딘의 말에 제리는 버티기를 포기했다는 듯이 공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손짓을 딘을 향해 들어 보였다. 딘은 짧은 시간을 예상했지만, 시간이 길어졌다. 제리는 차고의 천장에 눈을 올려둔 채로 혀를 날름거렸다. 입술이 적셔지고 마르기를 여러 차례, 그럴 때면 눈의 명암도 함께 변하곤 했다. 딘은 생각했다. 밝은 눈이 보이는 건 빠져나갈 구멍을 찾았기에 그런 것이고, 어두운 눈이 보이는 건 찾은 구멍이 다시 막혔기에 그런 것이라고. 딘은 시험해 보기로 했다. 자신의 예상이 맞는지. 그리고 때마침 제리의 눈이 다시 어둡게 변하였다. 그때, 딘은 말을 걸었다.


“생각을 길게 하시네요.”


“어떻게든 좋게 풀고 싶어서 그런가 봅니다. 일전의 일도 있고 하니.”


“제가 화라도 낼까 봐 그러십니까.”


딘의 대답을 들은 제리는 줄곧 손가락 사이에 끼고 있던 담배를 조용히 케이스에 집어넣었다.


“이미 화가 나 계신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럼, 어느 부분에서 화가 나 있는지도 알고 계시겠군요?”


“물론입니다.”


“그럼, 그냥 말씀하십시오. 어차피 풀고 갈 문제였으니까요.”


“둘 다 말씀드리면 되겠습니까.”


“네, 둘 다.”


딘은 둘 다, 라고 연거푸 중얼거리는 제리의 목소리와 그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 제리는 천천히 손을 올려 넥타이를 풀었다. 그리고 공허한 웃음이 터졌던 때와 비슷한 시간이 흘러갔다. 딘의 손톱과 난간의 봉이 부딪히며 작은 무기를 제련하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누가 보면 재촉의 행동으로 보였겠지만, 딘의 경우에는 아니었다. 애당초 간사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랄까. 손톱을 굳이 봉에 대고 두드리는 것도 아마 그곳이 손톱과 가장 인접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리에게 들릴 쇳소리까지는 생각지도 않을 사람이다.


“…음.”

     

제리가 입을 열었다.


“정리가 다 되셨습니까.”


딘은 난간에서 몸을 떨어뜨리며 말했다.


“네, 완벽하게요.”


“좋습니다. 이제 이야기를 들을 일만 남았군요.”


그리고 딘은 코트 속에 손을 넣어 제리에게 자신의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 담배를 받아 든 제리는 고개를 꾸벅이고는 손바닥 너머에 숨어 불을 붙였다. 라이터의 불씨가 옮겨 붙는 그 순간에 제리의 얼굴에 덮여 있던 어둠이 일순 걷혔다. 딘은 그를 보며 생각했다. 적어도 제리가 거짓된 말을 하진 않겠구나, 라고.


“편지의 내용도 물론 알고 계시겠군요.”


“네. 너무도 짧은 문구였기에.”


“먼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 하는 말입니다만, 그때의 저와 지금의 저는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실제로 많은 게 변했어요. 삶의 공간, 식사의 재료, 정신의 상태, 여러 가지가요.”


딘은 제리의 눈을 보며 딱 한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같은 짓을 일삼던 처음 몇 달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눈치를 채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죠. 가더들은 사건을 종결지었고, 모든 걸 제게 일임하고서는 더 이상 창고에 감시를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달이 흐르고, 또 달이 흘러갑니다. 모두가 괜찮은 상황이라 느껴지는 그때,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죠. 분명 딘 씨께서도 그날을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한 시간에 걸쳐 총성이 이어지던 죽음의 밤을요.”


그래. 기억이 안 날래야 안 날 수 없는 밤이었다. 딘은 눈을 감지 않고도 그날을 또렷이 떠올릴 수 있었다. 처음 그 소리가 들린 건, 불면에 시달리던 소년이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박차는 때였다. 뇌를 칼로 도려내는 듯한 사이렌, 사냥개와 같은 가더들의 발소리, 무수한 남녀들의 비명. 그리고, 탕. 총탄에 맞은 누군가의 피가 창문에 튀었다. 딘은 욕설과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황급히 커튼을 쳤다. 그리고 정확히 5초의 시간이 흐른 뒤, 현실로 돌아왔다.


“기억합니다.”

     

그리고 딘은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이어 말했다.


“그 이후로 일이 틀어지게 된 건가요?”


“일이 틀어졌다…, 그걸로는 부족합니다. 밥을 먹는 게 어렵다. 숨을 쉬는 게 곤욕스럽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게 두렵다. 그런 접근으로 가야 그나마 한 가닥의 평안을 챙길 수 있죠. 내가 잘못해서 일이 틀어진 게 아니라는 마음이 불안을 가라앉혀 주니까요.”


“제 기억으로는 그와 비슷한 시기에 일을 그만두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


“그랬죠. 정확히는 트라우마 때문이었습니다.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었어요. 어딜 가나 혈흔이 보이더군요. 아니, 그땐 제가 오히려 핏자국을 찾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같이 일하던 동료들의 핏자국 말입니다.”


“살아남은 사람은…”


“없습니다.”


1층 바닥으로 또 하나의 담배꽁초가 떨어졌다. 지난번 두 개비와는 달리, 끈기 있게, 마지막까지 타오를 줄 아는 놈이었다. 딘은 그 자리에서 바로 속도를 냈다.


“그럼, 편지가 작성된 건 그 무렵이겠군요.”


딘의 예상대로 제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더는 참을 수가 없더군요. 아시겠지만, 그 일이 있기 한참 전에도 소문은 돌고 있었습니다. 시티를 빠져나간 반역자들이 여전히 시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소문은 소문이었을 뿐, 어느 한 사람도 확실한 물증을 잡아 내지 못했죠. 심지어 가더들조차도요. 그게 제겐 행운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언제, 어느 곳으로 시티에 들어오는지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워블과 퓨티, 그 두 사람도 그들 중 한 명이었나요?”


제리는 고개를 저었다.


“늘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백발의 여자. 아주 키가 크고, 상당한 미인이었죠. 대화는 하지 않습니다. 제가 통조림을 건네주면 그 여자는 아주 빠른 속도로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흰 불빛의 모든 패턴을 알고 있다는 듯이 성큼성큼 달려 나갔죠. 솔직히 표현하자면, 멋있더군요.”


“일을 그만두고부터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저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시티에 들어왔을 텐데요.”

     

“아, 저 역시 회사에서 나온 이후로는 보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새로 들어온 사람과 대화가 잘 통해서요. 이리저리 찔러보던 와중에, 불쑥 물었더니 그렇게 하겠다고 하더군요. 만약 그 사람이 저를 고발했다면, 저는 아마 이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가더에게 뼈가 분질러졌겠죠.”


그에 딘은 낮게 깐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후견인의 손을 타고 간 편지라는 셈이군요.”


제리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소년의 필체를 빌린 건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여기서 말을 더 해 봤자, 변명밖에 되지 않겠지요.”


딘은 몸을 돌려 난간의 봉을 잡았다.


“아뇨. 모두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편지의 글귀는 무슨 뜻이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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