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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Aug 22. 2024

무한한 수명

무한한 수명. 지휘자가 뱉었던 그 말은 많은 이들에게 먹혀들었다. 계단은 어디에서 나오고, 무엇이 수명을 무한히 연장시키는가. 연주를 끝낸 연주자들은 지휘자를 중심으로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광란의 시간에 보였던 천박한 표정, 몸짓, 언행, 그들과는 반대되는 모습이었다. 흔히 교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 말이다. 또한, 그들은 척을 했다. 격식 있는 사람인 척, F구역의 사람이 아닌 척, 부족함이 없는 척. 그래서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밤 중에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몰려오더라도 절대 길바닥에 몸을 뉘지 않는다는 것. 축제에 영혼을 바친 만큼, 해가 지는 시간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단, 오늘은 아침까지의 시간이 평소보다 짧았다.


“자, 이제 해가 뜨기 시작하는군요.”


지휘자가 하늘을 보며 말했다.


“오늘은 비록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었습니다만, 여러분들의 망설임 없는 협력으로써 기분 좋게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어딘가에 기대어 있던 몸들을 하나둘 떼어 내기 시작했다. 야밤의 음기란 음기는 모조리 빨아먹은 듯한 얼굴들. 나아가서는 피곤한 기색조차 허락하지 않는 듯한 얼굴들. 젖을 탐하던 남자는 유독 초롱초롱했다. 아마 그는 내일 밤이 다 되어서야 잠이 들 것 같다. 연주자들이 차지한 골목 앞으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앞만 보고 걸었다. 뚱한 표정으로 보아 밤새 울린 음악 소리에 잠을 설친 모양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또 한 사람.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골목으로 고개를 돌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 지나가는 것이 보이고 얼마 있어, 지휘자는 조용히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피 묻은 칼을 정돈하듯 갈색의 지휘봉을 허공에 탁탁 털고는 하늘에 비추어 손잡이부터 끝까지를 손수건으로 닦아 냈다.


“그럼.”


지휘자는 연주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인사를 하는 그는 아무하고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침묵이 뭉쳐 있는 공간에 대고 고개를 숙이는 것과 같아 보였다. 지휘자의 인사를 받은 연주자들도 그러했다. 지휘자는 골목 밖 사람들 사이로 걸어갔다. 그리고, 사라졌다. 아마 그는 그 길로 이미 털렸거나, 자력으로 털 수 있을 만한 식료품 점을 물색할 것이다. 이젠 남겨진 사람들의 시간이었다. 그들은 공정했다. 누가 그를 붙잡았고, 발버둥 치는 그를 향해 결정타를 날린 것이 누구이며, 오물을 입에 머금은 그의 모습을 보며 웃음소리를 새어 보낸 사람은 누구인지. 찾지 않았다. 죄책감을 서로 떠민다. 그것도 아니었다. 첼리스트가 가방을 꾸리며 말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몇몇이 남자의 말을 따라 했다. 정말이지 하수구 청년의 이야기는 조금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누군가는 있었다. 그는 완곡하게 말했다.


“트럼펫 연주자가 구해져야 할 텐데.”


깡마른 안경잡이에 머리는 새치로 거뭇했다.


“구하겠죠, 뭐.”


맞은편 벽에 기댄 여자가 말했다. 지휘자의 손짓에 맞춰 불길을 넘나들던 무용수였다.


“마스 씨에겐 그만한 여유가 없을 것 같아서요.”


“우리 멋대로 행동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안경이나 깨끗이 닦고, 짐이나 챙기세요. 해산해야죠. 내일 밤을 위해서.”


여자의 말에 안경잡이는 멍한 표정으로 있다, 포기한 얼굴로 땅에 내려놓은 가방 손잡이에 주섬주섬 손가락을 걸었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짐 챙기기를 마친 단원들이 하나둘 골목에서 빠져나갔다. 작별 인사는 없었다. 모두가 나가고, 텅 빈 골목으로 햇살이 내리쬐었다. 굳이 뭔가를 암시하는 것이라 치부한다면, 정화가 아닐까. 밤새 퍼진 인간의 왜곡된 행복 분출과 그로부터 패여 버린 땅바닥의 발자국들을 위한. 빈 골목은 조용했다. 조금의 찬 바람도 불지 않았다. 옆으로 보이는 담벼락에는 낙서가 많았다. 어른의 눈높이에서 쓰인 것과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쓰인 것이 있었는데, 보통 높은 쪽에 쓰인 어른의 문구들이 부정적이었다. 신을 조롱하는 것도 있거니와, 대부분이 눈에 담아서 좋을 건 없는 내용들이었다. 검은색과 흰색 털이 예쁘게 난 고양이 한 마리가 담벼락에서 뛰어내렸다. 몸집이 작아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보였지만, 사실은 아닐 것이다. 눈동자가 그를 말해 주고 있었다. 사람의 손길 따위에 기대어 봤자 남는 것이 없다는 걸 안다는 눈이었다. 고양이는 뛰어내린 자리에 가만히 주저앉아 골목의 출구를 바라봤다. 조심스레 들어 올린 발 하나가 그쪽을 향하는가 했지만, 이내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어진 작은 하품. 하품의 진동에 녀석의 눈에 껴 있던 눈곱들이 가루가 되어 바람과 함께 날려 갔다. 눈곱이 사라지자 녀석의 눈이 잘 보였다. 퀭한 눈이었다. 양안의 초점이 모두 나가 있고, 무언가를 집중하여 보았던 적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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