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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Aug 22. 2024

무산된 회의와 딘의 진심

“이번이 몇 번째지? 회의가 무산된 게.”


딘은 어둑한 밤하늘을 보며 말했다.


“쉬운 해결책이 있어. 약을 먹어.”


“동족이 되라는 뜻이야?”


“당장의 불을 끄고 보는 것도 나쁜 방법은 아니잖아.”


그리고 쟝은 씨익 웃으며 딘의 눈앞으로 약통을 흔들었다.


“대도는 소년이 되어야 한다고 하더니.”


“네가 그만큼 경직돼 있다는 거야. 내 큼직한 손이 안주머니에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있을 만큼.”


“조화가 안 돼서 그래. 다들 따로 노는 느낌이야.”


“그게 네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리고 쟝은 훔친 약통을 딘에게 건넸다. 딘은 그를 손에 쥐며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사탕이 들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라고 생각하며.


“그때 네가 했던 말을 요즘 되뇌고 있어.”


“무슨 말?”


“내게 변덕이 생긴 것 같다는 말.”


그에 쟝이 말했다.


“그래, 사실이야.”


“그게 언제부터인지 생각해 봤는데.”


“봤는데?”

     

“가더가 철수한 날부터인 것 같아. 그들이 나를 바꿔 놓았어. 아니, 정확하게는 날 들뜬 상태로 변하게 만들었어. 기회가 왔구나. 이제 더는 부끄러운 감정을 느끼며 살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허영심을 심어 놓았어. 거기서부터야. 내게 변덕이 생기고, 약에 대한 반감이 생기고, 일이 뜻대로 되겠다는 희망을 품게 된 시점은.”


“그래도 넌 우리에게 오라클 같은 존재야. 다들 이유 없이 너를 따라나선 게 아니라고. 벽이야 있겠지만, 너를 믿기에 너를 선택한 거야. 나 역시 마찬가지. 그러니 너는 지금의 상황에 보다 당당해져야만 해. 리더가 무너지면 전체가 무너지는 꼴이니까.”


“일주일 뒤로 하자.”


“다른 사람들은 어떡하고.”


“의견을 말하는 거야?”


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리더라며. 따라와야지.”


“나는 좋아.”


“미안하지만, 네 의견은 상관이 없었어.”


그 말을 들은 쟝은 호탕하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하하하! 그래, 그래. 그런데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


“일주일 안에 결정을 내리겠지. 그 안에 오면 동행, 그 안에 오지 않으면 열외. 간단하게 생각하자. 내가 성급했던 면도 없지 않았으니까. 사람이 많을수록 융화가 어렵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어.”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말이야.”


“말해.”


딘은 쟝이 무슨 말을 꺼낼지 대충 예상이 갔다.


“그 사람들까지 끌어들인 이유가 뭐야?”


“통조림 창고에서 만난 사람들을 말하는 거면, 나는 네가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딘의 말을 들은 쟝은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돌덩이처럼 비틀거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한쪽으로 픽하고 쓰러진 자세로 말을 뱉었다.


“설마.”


딘은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그래, 그 설마. 그게 내 답이야.”


“잔인하군.”


그에 딘은 맞받아쳤다.


“아예 모르고 있었다고는 말하지 못할 텐데, 너도?”


“그래서 지금 후회하는 중이야.”


“그것 봐, 알고 있었잖아.”


“자, 워블과 퓨티야.”


쟝이 왼손가락을 차례로 굽히며 말했다.


“그래서?”


딘은 물었다.


“나머지 세 손가락의 이름을 답해 봐.”


“밀고자가 되라는 뜻이야?”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딘은 쟝의 손가락을 비스듬히 바라봤다. 양심이란 게 의식이 아니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었더라면, 딘은 그래,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듣고 후회하는 편을 택했나 보지?”


“어차피 후회는 하는 중이었어.”


“왜?”


“카리브 씨가 방패막이라는 단어로 처음 불렸을 때, 나 또한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거든.”


“제리 씨를 말하는 거야?”


“그래, 네가 제리 씨에게 마구마구 짓밟힌 직후.”


“그래서 내게 그 기억이 없었던 거였군.”


“당연하지. 네가 제리 씨에게 마구마구 짓밟힌 직후이니까.”

     

딘은 쟝의 눈을 초롱초롱하게 바라봤다. 그러다 쟝이 눈을 마주쳐 오는 순간, 가볍게 쥔 주먹으로 그의 배를 올려 쳤다. 쟝은 단말마 비슷한 소리와 함께 한쪽 무릎을 꿇는 척 액션을 취했고, 딘은 꼴좋다는 웃음소리를 내며 아래로 내려간 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앞으로는 쌍방이었다고 회상해 주길 바라.”


그리고 딘은 쟝의 구레나룻을 잡아 뜯으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네게 그런 마초적인 자존심이 있는 줄은 몰랐는걸.”


쟝이 일어나며 대꾸했다.


“자존심이 아니야. 나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고.”


“그럼, 제리 씨는 전력을 다했다는 거야?”


그 말에 딘은 다시 쟝을 초롱초롱하게 바라봤다. 쟝은 노인처럼 껄껄 웃으며 뒷걸음질 쳤다.


“알았어. 뭐 재밌는 이야기라고.”


그리고 무심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근데 그런 거라면 그 사람들한테만 유독 가혹하게 구는 거 아니야?”


“어떤 면에서?”


딘은 물었다.


“특정 지어 어떤 면이라기보다는 전반적으로.”


“내가?”


“응. 방금의 네 말마따나 너는 그 사람들을 바닥 취급하고 있어. 그들을 컨테이너에 부착된 사다리 아래로 보고 있으니까. 내 생각이지만, 그건 일전에 제리 씨가 말했던 반역이라는 표현과 다를 게 없어 보여. 아니, 오히려 네 표현이 좀 더 사실적이고, 더 비참해. 마치 시티를 떠난 그들에게 자유의 시간 따윈 조금도 없었다고 트집 잡는 사람 같아.”


쟝의 말이 끝나고 시간이 흘러갔다. 딘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하지 못했다. 쟝이 너무 정확히 자신을 꿰뚫고 있어서, 꿰뚫린 자신의 본심이 너무도 저질스러운 것이어서.


“입장이 뒤바뀐 거 같은데.”


“무슨 소리야?”

     

“원래는 네가 나처럼 행동했어야 한다고.”


쟝은 대꾸 이전에 썩은 얼굴로 딘을 쳐다봤다.


“책임을 전가하고 싶은 모양인데, 나는 그 상황 이후에 바로 끝냈어. 끝을 내지 못한 건 너야.”


“나는 시작한 적 없어.”


“시작한 적이 없다고? 무슨 뜻이지?”


“너처럼 끝내고 말고 할 자시가 없다는 뜻이야. 처음부터 깊게 뿌리내린 생각이었으니까.”


그에 쟝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럼, 그게 다 연기였다는 거야? 제리 씨와의 다툼, 그때의 네 표정, 억양, 시티 밖 사람들을 아우르던 말들, 그 모든 것들이?”


“거기에 거짓은 없어, 쟝. 그리고 그들을 향한 마음도 변한 적이 없고. 난 딱 거기까지만을 생각했던 거야. 그들이 반역자가 아니라는 사실, 그들에게 덮어씌울 죄가 없다는 사실. 사실, 사실, 사실. 오직 사실 하나에만 집중해 있었던 것일 뿐.”


“전에는 존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쟝이 물었다.


“그건 거짓이었어.”


딘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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