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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Aug 22. 2024

제리의 사과

창문 없는 벽을 보며 카리브는 방의 블라인드를 떠올렸다. 그리고 카리브는 아마도 그 앞에 그대로 있을 32개의 물감 병을 차례대로 진열했다.


“만약 집으로 돌아갔더라면 지금쯤 나는 잉크병 마개를 들고 있었겠지. 그래, 나는 아마도 저것을 꿀꺽꿀꺽 삼키고 있었을 거야.”


그리고 카리브는 이어서 그들 중 하나를 들어 올려 입 안에 털어 넘기는 것처럼 시늉했다.


“일단은 여기까지 밀려왔는데, 사실 잘 모르겠어. 난 당신의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고, 아는 게 없어.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거야? 당신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맞고? 내가 장벽을 넘으면 웃으며 나를 맞이해 줄 거야? 확신이 서질 않아. 내가 고른 이 길이, 그리고 당신이 기다리고 있어야만 하는 그 길이.”


툭 밀면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낭떠러지 앞에 웅크린 사람처럼 카리브는 소리 없이 눈을 감았다. 바깥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카리브는 피식 웃었다. 대충 예상은 했지. 방패막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이전부터 저들은 나와의 관계에 선을 그을 것이라고. 그리고 카리브는 문득 밖으로 나간 퓨티와 워블을 생각했다. 어디든 잘 갔으려나. 이 밤에 갈 곳도 딱히 없을 텐데. 강도를 만나진 않겠지. 아니, 그전에 길을 잃을지도 몰라.


“…하, 뭐래.”


자그마치 500명이야. 저들은 나더러 500명의 총알을 맞아 주길 바라고 있어. 거기 장벽 너머의 그쪽, 듣고 있어요? 저 사람들이 나 보고 500명을 상대하래요. 그것도 혼자서. 그러니까 가더들을 우르르 몰고 와서 나를 지켜 내 봐요. 구역의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의 이야기를 속닥거리고 있고, 나는 빈정대는 그들의 머리통에 총구를 겨누고 싶으니.

     

“좋네.”


한 번의 상상은 또 다른 상상을 불렀고, 카리브는 반대로 장벽을 넘어오는 가더들을 머릿속으로 색칠하며 방문에 기대 있던 몸을 더욱더 깊이 웅크렸다. 딘과 쟝의 목소리가 워블의 노크처럼 문을 두드렸지만, 카리브는 조금의 흥미도 가지 않았다. 대신, 한 가지 사실만은 뚜렷하게 떠올렸다.


‘나는 방패막이야.’


그리고 시간이 흘러, 시끄럽던 바깥의 소리가 조용해지자, 카리브는 잠갔던 문을 열어 고개를 내밀었다. 2층의 조명은 그대로. 1층과 3층의 조명도 그대로. 그리고 그를 제외한 나머지 큼지막한 조명들은 꺼져 있었다. 카리브는 터벅터벅 발소리를 내며 차고 1층의 자그마한 광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3층 어딘가에 조명이 아닌 다른 무언가의 그림자가 자리하고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


“자기는 글렀나.”


카리브는 곧장 계단을 올랐다. 그림자는 제리였다. 제리는 카리브가 2층에 다다랐을 때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첫 문장이 그랬다.


“일어나셨습니까.”


“안 잤어요.”


“아, 그렇군요.”


“설마하니 기다렸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조금 오싹할 것 같으니까.”


“기다렸습니다.”


제리가 기름 묻은 스패너를 걸레에 닦으며 말했다.


“도무지 캐릭터를 알 수 없는 사람이시네요.”


카리브는 제리와의 거리를 조금 더 좁힐까, 고민하다가 선 자리에 멈춰 있기로 했다.


“아까는…”


“여기서 사과까지 들으면 더 오싹할 것 같은데요.”


“그럼, 하지 말까요?”


“네, 하지 마세요. 틀린 표현도 아닌데요, 뭐.”


“카리브 씨 때문에 화를 낸 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화를 내신 줄도 몰랐어요.”     


“화가 나신 목소리시네요.”


“그랬는데, 풀었죠. 빌려주신 방에서.”


“그럼, 제가 사과를 하는 게 더더욱 맞는 것 같은데요.”


“안 받고 싶어요. 다혈질이신 분의 사과는 더욱이요.”


그 말에 제리는 걸레와 스패너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혈질인 건 인정합니다. 그러니 지금 사과를 받으세요. 그렇지 않으면 언제 다시 돌변할지 모르니까요.”


카리브는 표정 변화 없이 대꾸했다.


“어떻게 돌변하는데요?”


“어둡고, 진지하고, 솔직하게요.”


“어둡고, 진지한 것만 빼면 흥미가 돋네요. 게다가 솔직하게 변한다니, 상상이 안 가는데요?”


거기서 제리는 카리브를 향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지금 솔직해져 볼까요?”


카리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카리브 씨에 대해선 별 감정이 들지 않습니다.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다는 쪽의 의견에 가까워요.”


“그러면요?”


“저는 시티 밖에 있는 사람들이 두렵습니다.”


그리고 제리는 1층과 2층으로 고개를 내려, 듣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왜 그들을 두려워하는 건데요? 설마 아까 한 말이 진심이었던 거예요? 원래는 마을이 아니라 무기였다는 말.”


“네, 맞습니다.”


“이해가 안 돼요. 그들은 시티가 싫어서 도망친 사람들이잖아요. 그런 그들이 무슨 용기가 있어 다시금 시티로 돌아오겠어요?”


“당장만 하더라도 벌써 두 명의 사람이 저희 눈앞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앞으로 더 많은 인원이 시티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죠. 그리고 그들이 시티에 모인다면 어떤 일을 계획할지 알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아니요. 그건 정말 과잉 반응인 것 같아요. 그래 봐야 수십 아니에요? 게다가 시티 밖은 황무지예요. 다들 먹는 것도 부실해 영양결핍 상태로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요. 그들이 시티로 온다고 한들, 이곳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 거예요. 무기? 그들이 구역의 사람들에게 악의가 있을까요? 가더가 아니라?”


거기서 제리는 또 카리브를 향해 한 걸음을 다가왔다.


“그들이 도망칠 때를 기억하십니까?”


“미안하지만, 거기까지는 알지 못해요. 저는 58번지까지 내려가 살아 본 적이 없어서요.”


“그게 핵심입니다. 마을 밖 사람들은 대부분 58번지에 거주하던 사람들일 거예요. 페퍼가 말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58번지에 살았던 적이 있었다고요.”


카리브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네, 들었어요.”


“저는 둘 모두를 봤습니다. 어둠 사이를 뚫고 달려가는 도망자들의 뒷모습과 그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쫓아가는 가더들의 뒷모습을요.”


그리고 제리는 양손으로 사이렌을 묘사했다.


“그러면 머지않아 사이렌이 울립니다. 사이렌이 울리면 커다란 흰색 불빛이 그들을 따라가기 시작하죠. 그때부터는 잔인한 총성이 뒤따릅니다. 총성이 울리는 때면 사람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오고요. 그렇게 새벽이 지나고 날이 밝아오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람들은 피로 흥건한 길을 내밟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새벽의 총성, 다음날의 길거리, 그 모두를.”


카리브는 대답 없이 제리의 눈을 바라봤다. 솔직해진 제리의 눈은 슬픔을 담고 있었다. 카리브는 그런 제리를 무표정하게, 경멸스럽게, 부럽게, 이다음을 기다린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속삭였다. 저 사람에게 다음은 없어.


“담배 있어요?”


“네.”


카리브는 한 손으로 담배를 받았다. 담배가 타는 동안 카리브는 생각을 정리했다. 제리는 겁이 많은 사람. 스스로 두려움의 울타리에 자신을 가둬 놓은 사람. 솔직한 모습을 누구에게나 보일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카리브는 모두 태운 담배를 제리에게 건넸다.


“남의 집 바닥에 버리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제리는 인자하게 웃으며 꽁초를 은색 케이스에 집어넣었다.


“방금 좀 부럽다고 생각했어요.”


카리브는 말했다.


“무엇을요?”


제리가 물었다.


“또, 스스로 반성도 했고요.”


제리는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무엇을요?”


“저도 같았거든요.”


“도통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그거잖아요. 사실은 도망자가 되고 싶었던 사람.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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