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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Aug 22. 2024

피리 부는 소년

하수구 옆으로 냄새나는 물이 졸졸 흘러갔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깨나 포진하고 있었다. 텅 빈 종이 상자 하나를 맡에다 두고서 머리를 처박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아마 평생을 그처럼 있을 것이다. 만약 그들 중 운이 좋은 사람이 있다면 들을지도 모른다. 시티의 지화는 가치를 소실했고, 그마저도 이젠 바닥을 보이고 있다고. 악기를 등에 업은 단원들이 그들의 그림자를 밟으며 조용히 지나갔다. 그리고 저기 그늘진 자리 한 곳에서 이 모두를 꾸민 지휘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안도에 차 있었다. 표정이 그를 말하고 있었다. 그의 뒤로 손발이 묶인 청년이 보였다. 그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은 듯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청년은 가로등 불이 얼굴을 비추자,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지휘자가 걸음을 멈춰 세웠다. 맞은편에서 다가오고 있던 단원들이 양쪽으로 길을 벌렸다.


“이거, 이거, 오늘은 아주 큰일을 치렀습니다.”


지휘자가 양팔을 치켜들며 말했다.


“오늘은 하늘이 우릴 도왔습니다. 스스로 나서 주지 않았더라면, 알지 못했을 거예요. 안 그렇습니까?”


그리고 지휘자는 몸을 뒤로 돌려 청년을 가리켰다.


“저는 지금 이분께 굉장한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다. 덕분에 많은 걸 지켰어요. 우리 악단의 소중한 것들을 말이에요. 누가 답해 보시겠습니까?”


그에 누군가가 선뜻 답했다.


“이름을 지켰습니다.”


그를 들은 지휘자는 당장이라도 말을 한 그에게로 가 머리를 쓰다듬을 것처럼 제자리에서 몸부림쳤다.

     

“맞아요, 맞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름을 지켰습니다. 저 악마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처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습니다. 다들 기억나십니까?”


대답은 우렁찼고, 끝맺음은 정확했다.


“올려선 안 될 단어였습니다. 의식해서라도 붙잡아야 했을 단어였습니다. 그런 단어를, 여기.”


“이 친구가 뱉어내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과거로 돌릴 수 있는 시계가 있다면, 억만금을 주고서라도 이 친구의 입을 틀어막고 싶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불가능한 일. 우리는 신을 대신해 벌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불가피한 일이었으며, 우리는 최선을 다해 벌을 내렸습니다. 신께서도 보셨을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 다시, 다음 번지로 이동할 수 있는 명분을 얻은 것입니다. 기회를 소중히 여깁시다. 그리고, 실수를 반복하지 맙시다.”


여기저기서 박수가 이어졌다. 지휘자는 박수갈채 속에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한 계단을 오를수록 우리의 수명은 무한해집니다! 무한한 수명 연장으로써 우리의 이름을 지킵시다!”


그 말이 끝이자, 피날레였다. 청년을 붙잡고 있던 단원들은 일제히 힘을 주었고, 그를 냄새나는 물속에다 던져 넣었다. 청년은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검은 구정물 속에서 그의 주둥이가 물고기 아가미처럼 펄떡거렸다. 물에 떠 있던 쓰레기와 정체 모를 찌꺼기들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청년은 한 번의 숨을 들이마시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들을 뱉어냈다. 지휘자는 웃었고, 단원들은 표정 없이 그를 지켜봤다. 거기서 지휘자는 지휘봉을 꺼내 들었다. 눈빛은 물에 떨어진 가로등처럼 은은했다. 음악은 없었다. 지휘자 한 명의 손짓만이 허공을 노닐었다. 그리고 마침내 청년이 내뱉던 공기 방울이 수면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지휘자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달라진 건 없었다. 지휘자는 지휘봉을 다시 집어넣었다. 얼굴에 걸려 있던 웃음도 함께였다. 그리고 지휘자는 구두의 앞굽을 바닥에 내리찧으며 단원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깔끔한 정리이군요!”


“이제 다음 번지로 이동토록 합시다.”


거기서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지휘자는 밝은 얼굴로 그 사람을 지목했다.


“어제부로 쟁여 놓았던 식량이 떨어졌습니다.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다시 비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래요?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먹을 게 떨어지면 안 되죠. 제가 괜찮은 가게를 알아보겠습니다. 남은 식량이 얼마나 됩니까?”


“대여섯 사람 정도 먹을 양이 남아 있습니다. 하루치로요.”


“아이고, 알겠습니다. 제가 하루빨리 가게를 수소문해 보죠.”


그리고 지휘자는 그가 있는 곳을 손끝으로 두 번 두드렸다. 그러자 손을 들고 있던 사람이 팔을 내렸다. 또 다른 사안은 없느냐고 지휘자가 물었지만, 말하는 이는 없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오늘의 연주는 이곳에서 마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식량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잘 해결하겠습니다. 다음 장소는 순리대로 17번지입니다. 차례대로 갑시다. 그리고, 조급해하지 맙시다. 우리들은 피리 부는 소년이 되면 될 뿐입니다. 사람들이 몰려들거든 웃으며 환대해 주십시오. 사람들이 웃거든 더 큰 웃음으로 화답해 주십시오. 우리는 그러면 됩니다. 우리는 피리 부는 소년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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