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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Aug 22. 2024

무리에서 빠져나온 두 사람

퓨티는 팔다리가 후들거렸지만, 한 번을 멈추지 않았다. 뉠 곳을 찾는 데엔 시간이 걸렸다. 도중에 눈을 마주친 사람은 예닐곱 명. 도움을 주거나, 말을 거는 사람은 0. 그리고 그때부터 퓨티의 눈에 씐 최면은 한 겹 두 겹 벗겨져 나갔다. 투명한 유리는 망조를 뜻하는 것이고, 거리에 누워 있는 시인들은 명을 다한 사람. 동시에 퓨티는 빠르게 적응했다. 전과 다르게 보이는 풍경은 괜찮다. 우리를 헤치려는 사람은 이곳에 없다. 목이 죄이는 기분이 드는 건 몸이 피곤하기 때문이다…, 비어 있는 벤치가 모습을 보인 건 퓨티의 속에 자리하고 있던 저와 같은 꺼풀이 스무 장쯤 벗겨진 무렵이었다. 퓨티는 벤치 깊숙한 곳에 조심스레 워블을 내려놓았다. 워블은 악몽을 꾸고 있는 듯했다. 퓨티는 옷소매를 길게 빼내어 워블의 이마에 맺혀 있는 식은땀을 닦았다. 그리고 본인도 벤치에 몸을 앉혔다. 해가 높게 떠 있는 시간임에도 그늘진 곳이 많았다. 퓨티가 있는 곳이 딱 그 경계 부분이었다. 해가 드는 곳과 해가 가려진 곳. 퓨티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장벽이 보이리란 걸 그림자로부터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퓨티는 고민이 되었다. 장벽을 보면 되돌릴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닐까. 장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나 역시 저를 넘고 싶어 하는 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까.


“알 게 뭐야.”


그리고 워블이 눈을 뜬 건, 그러니까, 제정신으로 눈을 뜬 건 한 시간이 지난 때였다. 워블은 목이 마르다고 말했다. 퓨티는 폭포를 떠올렸지만, 시티에 폭포는 없었다. 조명이 꺼져 있는 잡화점이 하나 있었다. 가게의 유리는 깨져 있고, 내부도 엉망으로 망가져 있었다. 워블은 거기서 가장 투명한 병을 가져오면 된다고 말했다.


“그냥 가져와도 되는 건가요?”

     

“…그냥 가져와요.”


퓨티는 좌우를 살폈다. 택시 한 대가 지나가고, 퓨티는 빠른 걸음으로 도로를 건넜다. 신발 아래에서 유리 파편 밟히는 소리가 났다. 사람이 있었다면 퓨티는 아마 인사를 건넸을 것이다.


“투명한 병…, 투명한 병…”


냉장실에는 수많은 라벨이 있었다. 그리고 투명한 병의 종류도 한 가지가 아니었다. 퓨티는 눈치를 보며 투명함을 띠는 모든 병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다시 빠른 걸음으로 도로를 넘었다.


“가져왔어요. 맞게 가져온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워블은 어딘가의 아픔을 참는 듯한 웃음으로 팔을 뻗었다.


“잘 가져왔네요. 하나를 뺀 나머지는 술이긴 하지만.”


“아.”


그리고 워블은 차가운 물을 단번에 들이켰다. 퓨티는 빈 플라스틱병을 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아니, 그냥 이렇게 하면 돼요.”


워블은 손으로 병을 구긴 다음, 도로를 향해 던졌다.


“좀 괜찮으세요?”


“퓨티 양 덕분에요.”


“아, 카리브 씨에게도 후에 감사를 표해야겠네요.”


“기억나세요?”


“거기까지는요.”


그리고 워블은 말을 아꼈다. 눈이 위를 향해 있었다. 퓨티는 침을 삼켰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버릴까 봐.


“저게 장벽이군요.”


워블이 말했다.


“저는 아직 보지 않았어요.”


“왜요?”


퓨티는 솔직히 대답했다.     


“넘고 싶어질까 봐요.”


“넘고 싶었던 게 아니었어요?”


“워블 씨를 배려한답시고 그랬던 거예요.”


“그랬구나. 고마워요.”


워블이 퓨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프지 마세요. 몸도, 마음도. 특히나 소년 때문이라면 더더욱.”


“그럴게요.”


그리고 두 사람은 담소와 함께 거리를 걸었다. 장벽이 둘의 뒤로 멀어져 갔다. 워블은 주로 피크에 대해 말했다. 그가 가지고 있던 권력, 그의 자식을 가졌던 일, 그런 그를 곁에서 바라봐야만 했던 일. 그녀의 말이 끝나고, 각각의 호응을 모두 끝마친 뒤에, 퓨티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다른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데, 두고 온 아버지가 마음에 걸려요. 저는 그날 밤 처음으로 한 사람의 통곡을 보았어요.”


“물론 저라고 아버지의 모든 말소리를 알아듣지는 못해요. 단지 가까이에서 자란 자식이기에, 남들보다는 조금이나마 쉽게 이해를 할 뿐이죠. 그리고 사실, 그날은 말이 없으셨어요. 설령 그게 말이었다고 해도, 울음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을 거예요. 제 아버지는 그만큼 서럽게 우셨어요. 집의 문이 닫히는 그 순간까지도요.”


“그래서 저는 두 배로 살아야 해요.”


두 배. 퓨티는 그 말의 의미를 되새겼다. 아버지, 시티에서의 나. 그리고 워블이 입을 열었다.


“짐을 달고 산다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닐 수도 있어요.”


퓨티는 대답했다.


“타고난 성격이 그런걸요.”


“그래도 최대한 짐을 더는 방향으로 인생을 잡아 봐요. 짐에 짓눌린 상태로 살아간다는 게 괴로운 일이거든요. 게다가 내 말은 들을 만도 하잖아요? 그 분야에 있어 최고의 탐구자니까.”


퓨티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것도 버릇이에요.”

     

“응? 뭐가요?”


“항상 관찰자처럼 말씀하시는 거요.”


“관찰자?”


“네. 한 번씩 그러세요. 꼭 ‘아니, 난 됐어. 너희들이나 맘껏 즐겨.’라고 하시는 것 같아요.”


그 말에 이번엔 워블이 웃었다.


“아니. 한 문장이 빠졌어요. ‘어차피 너희들한테도 관찰자 한 사람이 필요한 거잖아?’, 이 정도는 되어야 진정한 관찰자라고 할 수 있죠.”


“이거 보세요. 제 말이 맞죠?”


“그래요, 잘났어요.”


“워블 씨, 저 아직 장벽을 돌아보지 않았어요.”


“그래요, 그것도 잘났어요.”


“워블 씨는 장벽을 넘고 싶으세요?”


“네.”


“소년 때문이시죠?”


워블은 뜸 들이지 않고 대답했다.


“네.”


그리고 워블은 입술을 꽉 깨물고는 쓴웃음으로 말했다.


“스스로는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요.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거든요. 살해당한 자식이 있다는 그 자체로의 진실이 아니라, 자식이 살해당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한 부모라는 사실을요. 퓨티는 이해 못 하겠지만, 이보다 더한 부끄러움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그럼요. 제가 감히 어떻게 알겠어요. 하지만요, 워블 씨. 지금껏 곁에서 바라본 한 사람의 입장으로는 워블 씨께서는 못나지 않으셨어요.”


“그전까지는 못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고요?”


그에 퓨티는 솔직하게 말했다.


“네.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그랬어요.”


“어떤 사실요?”

     

“우선은 피크 씨가 1순위예요. 그런대로 마을 내에 소문이 번져 있었거든요. 피크 씨의 노력에도 워블 씨는 좀처럼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고요.”


“그 소문은 나도 익히 들어 봤어요. 누가 맨 처음 말을 꺼낸 건지도 알고 있고요.”


“그럼, 진작에 난간에서 내려오셨어야죠. 마을 사람들이 워블 씨를 두고서 감히 조롱하지 못하게요.”


“그들이 뭐라고 하든 아무 의미 없다는 걸 퓨티도 알고 있잖아요? 그 사람들은 그저 식충이일 뿐이에요. 단지 시티에서 도망 나왔다는 긍지 하나로써 아까운 세월을 흘려보내는 고지식한 사람들이죠.”


“그런 무식한 사람들의 입에 워블 씨의 이름이 오르내렸잖아요. 저였더라면 그를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지 않았을 거예요. 따끔하게 혼을 내줬을 거라고요.”


“앞으로는 그렇게 할게요. 다음이 있다면.”


그리고 두 사람은 목적지 없이 걸음을 내밟았다. 시티의 풍경을 보던 퓨티는 생각했다. 더러워. 질서 없어. 이제 남아 있는 꺼풀은 한 장이었다. 장벽. 퓨티는 아직껏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본능이 시키는 일이기도 했고, 시티에게 속은 자신을 향한 분풀이 행세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어느덧 1번지 끝까지 내려와 있었다. 퓨티는 표지판을 손으로 가리켰다. 워블은 친절한 미소로 설명해 주었다. 표지판이 삼각형인 이유부터 아래로 갈수록 표지판이 더러워진다는 사실까지. 그에 퓨티는 표지판이 더러워지는 이유를 물었다.


“날씨 때문인가요?”


워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티의 날씨는 우리가 살던 곳과 비슷해요. 가끔 인공우를 떨어뜨리는 일이 있는데, 그것도 예전에나 그랬지, 지금은 어떨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면 표지판이 왜 더러워지는 건가요. 퓨티는 물었다.


“마을에서 집을 배정받던 때가 기억나요?”


“나요. 피크 씨께서 직접 저와 아버지를 데려다주셨어요.”


“그렇죠?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요. 시티에는 센터라는 곳이 존재해요. 센터는 극소수의 인원으로만 구성되어 있어요.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름은 무엇인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해요. 그것에 대해 저는 이렇게 결론 내렸어요. 처음부터. 그래,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구나, 라고요.”


“장벽이 있기 전에는 센터에 가 볼 수 있었나요?”


워블은 또 한 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도한 사람이 없어요.”


“왜요?”


“A구역까지의 거리를 가늠조차 하기 어렵거니와, 이유가 없죠. 당장에 처해 있는 삶이 여유를 내주지 않으니까요. 나 역시도 시티에 머물면서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네요.”


“저는 달랐을 것 같아요.”


어떻게 달랐을 것 같아요, 라는 워블의 물음에 퓨티는 대답했다. 모험을 걸었을 것 같아요. 잃을 게 없잖아요. 가만히 변화를 기다리기보다는 제가 먼저 변화를 일으키는 편이 낫죠.


“가더가 무섭지 않아요?”


그 말에 퓨티는 일순 눈부심이 느껴졌다. 짧은 회상이었다. 흰색 불빛. 불빛에 갇힌 여자, 굳어 버린 여자아이, 두 번의 총성. 장면들이 지나가고, 퓨티는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막진 않을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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