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영강 Aug 22. 2024

시티 1번지

시티 1번지의 밤은 과거 워블이 말한 휘황함과는 사뭇 멀었다. 거리를 밝히는 조명의 수도 많지 않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자연스럽지 않았다. 하나같이 무엇에 걸려 있거나, 무엇을 의식하는 듯 보였다. 퓨티와 워블은 음악이 흐르는 건물 아래서 머물고 있었다. 워블은 지금 듣고 있는 것이 말러가 작곡한 클래식이라고 설명해 주었지만, 퓨티는 고개만 위아래로 흔들 뿐, 감정이 크게 요동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퓨티는 그를 단지 시끄러운 소리라고 생각했다.


“전에 말한 적이 있을 거예요.”


워블이 말했다.


“내가 야경을 보며 듣는 클래식을 특히 좋아했다고.”


퓨티는 기억이 났다.


“네, 아이의 태교도 그렇게 하셨다고 말씀하셨어요.”


“맞아요. 그런데 시티가 좀 변해 있네요.”


“원래는 어땠는데요?”


“원래는 지금보다 훨씬 밝고 활발했어요. 물론 가진 자들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요.”


그를 들은 퓨티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풍경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 칠이 벗겨진 건물, 금이 가 있는 유리, 보일 듯 말 듯 한 내부. 퓨티는 이제 그것들이 보석처럼 보이지 않았다.


“제 눈에도 그래요.”


퓨티의 말에 워블은 놀란 듯 소리 냈다.

     

“어머.”


그리고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랑은 다르네요.”


“제가요?”


“눈빛이 꺼져 있어요, 퓨티.”


퓨티는 손가락 뒤로 눈을 비볐다. 그리고 워블이 그를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봤다. 퓨티는 생각했다. 눈빛이 꺼져 있다는 건 어떻게 보인다는 뜻일까. 또, 밝고, 황망하게만 여겨지던 시티가 어둡게 보이는 건 왜일까. 생각이 길어지고, 퓨티의 손에는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찰을 따라 퓨티의 하얀 눈꺼풀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퓨티는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눈을 비빌수록 무언가 계속해서 달라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눈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듯이 뜨거운 눈물을 쏟아 낼 때쯤, 워블의 손이 퓨티의 등을 덮었다. 워블은 말을 하려다 멈추었다. 그리고 워블이 멈춘 순간은 음악이 바뀌는 순간이기도 했다. 말러의 교향곡이 끝나고, 누군가의 서정적인 음률이 유리 틈 사이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음률은 가녀렸으며, 실처럼 공기 위를 사뿐히 떠다녔다. 워블은 또다시 입을 오물거렸다. 아마도 위로보다는 작곡가의 이름을 퓨티에게 말해 주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퓨티.”


워블은 퓨티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워블은 퓨티의 팔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퓨티의 눈가와 손가락이 투명한 물로 흥건했다.


“눈물일까요?”


퓨티는 물었다.


“아뇨.”


워블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죠? 눈물을 흘렸나, 했어요.”


“흘리면 안 되는 이유는 없어요, 퓨티.”


“알죠. 근데 울기가 싫었거든요.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울고 싶어요?”


퓨티는 곧장 대답했다. 네. 울고 싶어요. 가슴에 구멍이 크게 난 줄도 모르고 달렸나 봐요. 모든 걸 털어 냈다고 생각했는데 오만이었나 봐요. 지금 보니 저의 죄가 너무 커요. 죄가 너무 큰 나머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아요.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겠죠. 어느 한 사람도 저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 거예요.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희롱을 저질렀어요. 당신과는 보는 눈이 다른 사람인 척, 당신과는 수준이 다른 사람인 척, 결국 그 오만함이 저를 죄인으로 꽃피우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울고 싶어요, 워블 씨. 눈이 메말라 시뻘겋게 갈라질 때까지 울고 싶어요.


“울어도 돼요.”


워블이 퓨티의 머리를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퓨티는 자그마한 나뭇가지에 머리를 기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꽃은 지고, 잎은 떨어지고,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는 나무. 퓨티는 가지에 대고 속삭였다.


“클래식이란 거 말이에요.”


“네.”


워블이 대답했다.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아까는 조금 그랬죠? 원래 그 사람 곡이 유독 그런 편이에요.”


“저는 클래식이라는 장르가 모두 그런 건 줄 알았어요.”


“어때요, 새로이 들어 본 소감이?”


퓨티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음악에 집중했다. 절정으로 치닫는가 하면, 아직은 아니라며 다시금 잔잔하게 깔리고, 잔잔함이 이젠 끝이라고 말할 무렵에는 색소폰이 소리를 죽이며 또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묘한 소리야. 마치 자기들끼리 말을 하는 것 같아.


“적어도 외롭진 않겠어요.”


퓨티는 말했다.


“왜요?”


워블이 물었다.


“악기가 여러 가지잖아요. 혼자 소리 낼 일은 없을 테니까.”


“솔로로 나설 때도 많아요.”


“정말요?”


퓨티가 말하자, 워블은 빙긋 웃었다.


“순수하네요, 퓨티는. 아니면 아직 어린애거나.”

     

“어린애는 아닐 거예요. 어린애라기엔 너무 어른 같은 짓을 많이 해서.”


“꼭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네.”


“보세요. 하는 짓이 어린애는 아니죠?”


그 말에 워블이 품에 있던 퓨티를 떼어 냈다.


“전에 말했죠. 나쁜 건 모두 나에게로 넘겨요. 내가 다 책임질게요. 방금처럼 울고 싶어질 때나, 마을이 생각나서 죄책감이 느껴질 때나, 언제고부터 소리 없이 찾아올 오한이나, 모두 나에게로 넘겨 버려요. 그러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예요. 해방을 바랐죠? 내게서 가져가요. 퓨티의 해방.”


퓨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기적인 해방은 싫어요. 함께 누려요, 워블 씨. 저와 함께요.”


“함께 누리려면 많은 힘이 들 텐데도요?”


“괜찮아요.”


“지금 그 말, 후회하지 않겠어요?”


“네.”


퓨티의 대답에 워블은 고맙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워블의 표정을 본 퓨티는 준비했다. 가느다란 심호흡이 가게의 악보에 맞추어 합을 이뤘다. 하나, 둘. 퓨티는 속으로 숫자를 세며 어둑한 밤거리 한 곳에 눈을 올려놓고 초점을 흐렸다. 그러다 워블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완전히 흐려져 겹치어 보일 때, 퓨티는 얼른 고개를 돌려 밤하늘 아래를 바라보았다. 홀연한 어둠이 희게 빛나는 달을 받치고 있었다. 퓨티는 워블의 팔을 붙잡았다. 워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겁먹지 말아요.”


워블은 계속해 말했다.


“우리는 사형대 옆에서도 잠을 잤던 사람들이에요. 그에 비하면 저런 벽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단지, 우리의 키를 웃돈다는 이유로 높은 척을 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런 상대에게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저것은 우리를 더욱 내려다보겠죠. 저 단순하고도 미약한 건축물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지 말자고요. 강한 건 우리 쪽이니까.”


퓨티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뭐라고 대답할 여유 따윈 이미 퓨티에게 사라진 지 오래였다. 퓨티는 견고하고, 촘촘한 장벽의 단면에 순식간에 함락되어 버렸다. 워블의 목소리가 작아지고 있구나, 라는 것을 느낀 시점에는 몸과 마음이 장벽 바로 앞까지 달려 나가 있었다. 장벽은 고요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이따금 떨어지는 돌조각이 바닥과 부딪히며 나는 것 정도. 퓨티는 집요하게 파고들지 않았다. 우선은 눈에 보이는 것부터, 그리고 마음이 이끄는 것부터 장벽을 관찰했다. 퓨티는 손을 뻗어 장벽의 표면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뾰족하진 않지만, 오돌토돌 튀어나온 부분이 많았다. 퓨티는 그 촉감을 가까운 과거에 느낀 적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이 지킴이가 드나들던 쥐구멍이었다는 걸 퓨티는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손을 내린 퓨티는 하늘 높이 솟구친 장벽을 따라 고개를 치켜들었다가 아래로 내렸다. 소리는 없는 걸까. 속으로 말한 퓨티는 양 손바닥을 장벽에 대고서 천천히 왼뺨을 붙였다. 모든 것은 퓨티의 상상 아래. 소리는 다양했다. 멀리서 오셨네요, 라고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부터 그렇다고 대답하는 여인의 목소리까지. 퓨티는 그들의 사이에 대고 말했다.


“네, 정말 멀리에서 왔어요.”


“당신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곳에서. 아니, 정확히는 당신들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제 출발지는 그런 곳이에요. 외롭고, 황망한 곳. 누구의 삶도 기록되지 않는 곳.”

이전 04화 무산된 회의와 딘의 진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