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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Aug 23. 2024

세 집단

덜그럭덜그럭 소리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섬에서 떠밀려 온 쓰레기처럼 울려댔다. 두 마리의 개는 상처를 가득 지닌 채로 바닥을 기었다. 목줄을 쥔 주인은 개들의 속도가 늦춰질 때면 오른손에 쥔 채찍을 바닥에 내리찧으며 수시로 공포감을 주입했다. 수천 가닥의 울부짖음이 그가 가는 길을 따라 족적을 남겼다. 잠들어 있던 사람들이 깨어난 것은 거리가 푸르게 변하는 순간과 개들의 죽어가는 소리가 고조되는 무렵이었다. 창문이 열릴 때마다 주인은 모자를 벗어 낯선 이웃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인사 뒤에는 좋은아침입니다, 라는 말을 빼먹지 않았다.


“어때. 정말 개가 된 것 같지 않아?”


헷이 사슬을 당기며 말했다. 퓨티는 필사적으로 목이 졸리는 것을 막으려 애썼다. 그러나, 워블에겐 남아 있는 힘이 없었다. 그녀는 헷이 당기는 쪽으로 그대로 딸려가 넘어졌다. 퓨티는 언제고부터 눈물이 고이지 않았다. 퓨티는 다른 것을 찾을 생각도 없이, 쓰러진 워블을 일으켰다. 워블의 입가엔 침 자국이 가득했다. 그리고 다시 검고, 굵은 채찍이 바닥을 찧었다. 퓨티는 워블의 양팔을 잡아 땅에 놓았다. 그녀의 팔은 마치 기계와도 같아서, 이제 퓨티의 손길이 느껴지는 때면 저절로 땅을 짚었다. 워블이 자세를 취하자, 퓨티는 헷을 힐끔 돌아봤다. 길들임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반항의 의지는 사라지고, 굴복만이 가슴에 자리한다. 해가 완전히 뜨면 두 사람은 이제 껍데기밖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자, 조금만 더 가면 장벽이야. 힘들 내라고.”


헷이 말했다. 그리고 퓨티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사람의 무릎 높이에서 보는 풍경은 확실히 달랐다. 장벽이 눈동자를 가득 채웠고, 하늘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퓨티는 워블에게 속삭였다.

     

“워블 씨, 장벽이 보여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얼마 안 있으면 장벽에 도착할 것 같아요. …아니, 장벽이 우리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이젠 모든 게 의심스러워요. 손과 발의 감각도,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도, 제 숨소리까지도요.”


그리고 퓨티는 애원하는 투로 목소리를 짜내었다.


“그러니, 뭐라고 대답 좀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워블 씨…”


찢긴 등에는 이제 몸을 가릴 것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곧 있으면 떨어질 실 뭉텅이 하나와 팔랑거리는 스카프의 매듭이 고작이었다. 슬슬 해가 떠올랐다. 그리고 푸른색에 숨어 있던 퓨티와 워블의 모습이 점차 또렷이 거리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1번지 사람들은 해가 뜸과 동시에 눈을 떴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베란다의 창을 열었고, 난간에 팔 한쪽을 올려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들은 곧바로 경악을 보이기보다, 시간을 두고 세 사람을 관찰했다.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이 이른 아침부터 개장수 행세를 하고 있는지가 가장 큰 화두인 듯했다. 물론 그들은 목줄에 걸린 두 여자를 보기는 했다. 하지만 그쪽에는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얼굴들이었다. 헷은 벙실벙실 웃으며 베란다의 사람들에게 일방적인 인사를 건넸다. 대부분은 그를 무시했다. 그러나 눈썰미 있는 몇몇 사람은 그의 인사를 받음과 동시에 창문을 닫고 허둥지둥 옷을 챙겼다. 아마도 곧 있으면 그들은 빌라의 계단을 뛰어 내려와 헷을 향해 부리나케 달려올 것이다. 헷은 벗었던 모자를 다시 눌러썼다. 그리 고, 여전히 베란다에서 담배를 즐기고 있는 무지한 사람들을 위해 검은 채찍을 휘둘러 보였다. 채찍이 얼마 남지 않은 길바닥의 습기와 맞물려 쫙하고 달라붙었다.


“…아니! 이게 뭐야?”


곱슬머리에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목줄에 걸린 것이 개가 아님을 보고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리고 줄줄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당신 제정신이야?”


“미쳤군, 단단히 미쳤어.”


“어휴, 세상에나. 난 또 가더가 돌아온 줄 알았네.”


사람, 사람, 사람. 줄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목줄에 걸린 퓨티와 워블의 근처로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헷은 사람들의 재잘댐이 황홀하다는 듯 고개를 연거푸 좌우로 흔들었다. 사람들이 겹겹이 주변을 에워쌌고, 헷의 이야기는 금세 인근에 거주하는 모두의 귀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점차 헷을 둘러싼 사람들의 입에서 큰소리가 튀어나왔다. 설명을 요하는 말들이었다. 헷은 여유로웠다. 인파에 의해 마지막 출구가 막혔음에도 그는 조금도 떨지 않았다. 오히려 홀인원을 직감한 선수처럼 코웃음칠 뿐이었다.


“설명하세요!”


“그래, 아침부터 이게 무슨 난리입니까?!”


“애초에 당신, 1번지 사람이 맞나요?”


여자의 말에 헷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어디에 사시는데요?”


여자가 물었다.


“빌라에 삽니다. 당신처럼.”


“직업이 뭐죠?”


“직업이라…”


그리고 헷은 생각하는 척하다가 퓨티의 등에 채찍을 내리꽂으며 분위기를 순식간에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퓨티는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러나 금방 다시 양팔을 땅에 짚었다. 사람들은 그를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가더가 있을 적엔 조련사였습니다. 말 안 듣는 동물들을 길들이는 게 제 일이었죠. 그 능력 하나로 1번지까지 올라오게 되었고요. 그래서 저는 냄새를 잘 맡습니다. 어느 녀석이 말썽을 피우는 놈이고, 어느 녀석이 순종적인 놈인지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죠.”


“이 여자들은 뭐죠?”


질문한 여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 이 여자들이요?”


채찍의 끄트머리가 살금살금 움직였다.


“이 여자들은 시티 밖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제 판단으로는 불순분자라고 여겨졌기에, 이렇게 결박해 놓은 상태이고요.”


마을 밖이란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증거 있습니까?”


어느 남자가 물었다.


“너무도 많습니다. 일단은 라이선스가 없고, 단종된 트럭을 타고 시티에 입성했으며, 배정받은 집이 없죠.”


“당신은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제가 그 현장에 있었으니까요.”


“이 사람들이 시티 밖에서 들어오는 걸 봤다는 이야깁니까?”


“네,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좀 전까지 대화에 속해 있던 여자가 헷을 향해 질문했다.


“잠시만요. 그럼, 당신 역시 58번지에 있었다는 얘기가 되지 않나요?”


“그렇습니다만.”


“58번지엔 왜 가신 거죠?”


“아아.”


헷은 콧잔등을 손등으로 훑으며 대답했다.


“냄새를 맡았거든요.”


“냄새요?”


“사실 냄새를 처음 맡은 건, 1번지였습니다. 말로는 표현치 못할 고약한 냄새가 코끝을 찔러댔죠. 하지만, 어딘가에서 맡아본 냄새였기에, 저는 장소를 떠올리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늪지대에 서 있는 것처럼 꿉꿉하고, 온 숲이 저를 수렁으로 밀어 넣는 듯한 느낌. 그러던 어느 날, 저는 그곳이 어딘지 기억해 내었습니다. 58번지였죠.”


“단순히 후각만으로 이들을 잡아내셨단 말씀입니까?”


남자가 물었다.


“단순하다기보다는 직감과 실행력, 그리고 운이 좋았죠.”


그 말을 끝으로 헷을 향한 사람들의 물음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헷은 여유와 끈기를 앞세워 모두의 질문에 성실히 대답해 주었고, 완전히 날이 밝을 무렵에는 모두가 헷의 행동을 인정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이제 이 많은 인파의 표적은 퓨티와 워블이 된 것이다.

     

“그럼, 좀 지나가겠습니다.”


헷은 사슬과 채찍을 앞세워, 길을 막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그들은 너무도 손쉽게 길을 열어 주었다. 헷이 인파에서 빠져나와 첫걸음을 내딛자,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헷은 모자챙을 손으로 슬쩍 올리며 대답했다.


“장벽이요.”


“어디요?”


또 다른 누군가가 대답을 확인했다.


“장벽으로 갑니다.”


헷은 분명하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의 장난기도 없는, 표정과 목소리, 그리고 단호함에 사람들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개중 가장 어이없는 표정을 띠어 보이는 건, 길을 터 준 사람들이었다.


“장벽이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거긴 갈 수 없어요!”


어느 남자가 소리쳤다.


“그걸 누가 정했습니까? 제 기억으론 가더들이 그런 말을 하고 떠난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1번지 주민이라면 알 거 아닙니까? 그곳은 불침의 영역이란 것을요.”


남자의 말에 헷은 조롱 발린 말을 완곡히 돌려 반박했다.


“음…, 그랬군요. 그런 게 있는 줄은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게 겁쟁이들만의 암묵적인 사안인 줄로만 이해하고 있어서.”


“필히 겁쟁이가 되어야지요! 거기에 갔다가 무슨 꼴을 당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가더들의 총탄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그들의 총구가 장벽 위에 있던가요?”


헷이 말했다.


“물론 사라졌지만, 그래도 너무 위험한 곳입니다.”     


“돌로 건설된 벽이 위험하단 뜻인지요?”


남자는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얼버무렸다. 거기서 또 다른 누군가가 입을 열어 왔다.


“왜 하필 장벽입니까? 이들을 그곳으로 데려가는 이유는요?”


헷은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표정을 바꿨다.


“거기서 일이 터질 거거든요. 아무도 생각지 않은 일이 말이죠. 그 누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말입니다.”


“어떤 일을 말하는 겁니까?”


“우선은 저를 따라오시겠습니까? 시간이 없거든요. 지체했다간 그들을 놓칠 수도 있어서.”


그 시각, 장벽.


하늘엔 구름이 잔뜩 껴 있었고, 딘의 목소리가 울렸다.


“제리! 리프트를 내려요!”


“길이가 조금 짧지만, 그래도 오를 순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은 구멍은 모두 뚫었어요. 접착제가 굳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제리가 말했다.


“좋군요.”


그리고 그는 딘을 조용한 곳으로 불러냈다.


“딘,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나쁜 소식이요?”


“네. 이쪽으로 대규모 인원이 접근하고 있어요.”


“위쪽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데요?”


“저도 몰랐습니다. 카리브 씨의 망원경을 통해 점을 발견했죠.”


“사람이던가요?”


“틀림없습니다.”


딘은 말했다.

     

“서둘러야겠군요.”


“그것도 그건데…”


“또 뭐가 남았나요?”


“페퍼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제리가 딘의 어깨너머로 눈짓하며 말했다.


“제가 가 보겠습니다. 제리 씨께선 쟝과 함께 리프트에 올라, 망원경으로 다시 한번 확인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딘은 제리의 어깨를 툭툭 친 뒤, 트럭 구석으로 뛰어갔다. 페퍼는 만원 열차에 갇힌 사람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딘은 조심스레 그녀를 향해 걸음을 내밟았다. 페퍼는 작은 발소리에도 놀랄 만큼 긴장에 녹아들어 있었다. 어깨에 앉은 손이 벌벌 떨렸고, 동공은 푸른 눈을 모두 뒤덮을 만큼 확장되어 페퍼를 검은 눈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그녀 옆에는 카리브가 어깨를 토닥이고 있었다.


“페퍼 씨.”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페퍼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더욱 웅크렸다. 딘은 손을 내밀며 다시금 페퍼를 불렀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페퍼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불쌍해 보였다.


“무척 힘들어 보이시는군요. 인데놀을 드릴까요?”


페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약은 이제 소용이 없어요. 공포가 가시질 않아요.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밤을 새워서 그런 건지, 커피를 마시지 않아서 그런 건지, 저조차도 답답해요. 제가 이렇게 걸림돌이 될 줄은 몰랐어요.”


“걸림돌이라뇨.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다 괜찮습니다. 저 또한 사다리에 발을 올릴 때면 어떤 사람이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며 추락할 수도 있고, 위만을 쳐다보며 오를 수도 있겠지요. 중요한 건 과정이 아닙니다. 결과만이 저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페퍼 씨도 사다리까지만 용기를 내 보세요. 그때가 되어서도 공포를 느끼신다면, 오르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강요는 없습니다. 스스로를 지키세요.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페퍼 씨는 충분히 용기를 내신 겁니다.”


페퍼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중 나와 있는 딘의 손을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뒤에선 리프트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소년이 쪼르르 달려와 셋에게로 말했다.


“리프트가 멈췄어요!”


딘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딘은 페퍼를 리프트까지만 데려갈 요량이었다. 페퍼는 발을 내딛기 전, 기다리라고 말했고,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혀 밑에 넣었다.


“스스로 가 볼게요.”


페퍼가 말했다.


“얼마든지요.”


제리와 쟝의 머리 뒤로 붉은 사다리가 보였다. 검은색과 붉은색의 조화가 너무도 잘 어우러져 마치 원래 있었던 구조물처럼 보였다. 비유하자면, 거인을 위한 손잡이 같아 보인달까.


“딘!!!”


리프트 위에 있던 쟝이 아래를 보며 소리쳤다.


“어마어마한 인파야!! 1번지 사람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어!!”


딘은 순간 이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제리와 쟝이 리프트에서 내려왔다. 쟝은 땅에 발을 붙이자마자 불평했다.


“어쩐지 일이 술술 잘 풀린다 싶더니만. 쳇.”


딘은 제리를 바라봤다.


“제리 씨, 그들이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좀 전에 제가 본 이미지와 겹치어 계산해 본다면, 10분 내외가 될 것 같습니다.”


“…10분. 10분으로는 부족합니다. 접착제가 완전히 굳으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해요. 방법이 없겠습니까?”


“기관총이 있으면 쓸어 버리면 되는데, 개놈들.”


쟝이 말했다.


“쟝 씨.”

     

제리가 담배를 입에 물며 말했다.


“총을 가져오셨죠?”


“이건 위협용밖에 되지 못할 겁니다. 저 많은 사람을 상대로는 새총에 불과해요.”


“제게 주시겠습니까?”


“총을요?”


“네.”


쟝은 잠시 멈칫거리더니 제리에게 총을 건넸다. 그리고 딘은 눈치가 빨랐다.


“제리 씨는 어쩌시려고요.”


제리는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글쎄요. 어차피 누군가는 차를 빼야 하니까요. 운전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저밖에 없지 않습니까. 제가 해야죠.”


제리의 말에 아무도 대꾸하지 못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페퍼조차도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모두가 아는 단어였다. 희생. 딘은 고개를 숙여 제리에게 사과를 건넸다.


“죄송했습니다.”


제리는 포옹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딘의 귀에 속삭였다.


“어떻게든 오르세요. 또, 페퍼를 부탁합니다.”


이어서 쟝도 제리와 포옹했다. 그리고 소년이 쪼르르 달려와 안기었다. 페퍼는 움직이지 않았고, 카리브는 포옹을 거부했다.


“아, 저는 됐어요. 그냥 감사만 표할게요.”


그에 제리는 카리브에게 말했다.


“망원경은 돌려 드리죠. 어차피 지금부터는 스코프로만…”


카리브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리의 손에 쥐인 망원경을 잽싸게 낚아챘다. 제리는 웃으며 말했다.


“부디 많이 보시고, 많이 그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피리 부는 소년들.


“저는 이제 모르겠습니다, 마스 씨.”

     

안경잡이가 말했다.


“원래 모르는 게 정상입니다.”


마스가 대답했다.


“길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합니다.”


“저도 지금 그를 이상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아까 골목에서 눈이 닿은 여자를 제외하곤 사람을 못 봤어요. 가게의 불이 모두 꺼져 있는 것도 이상하고요.”


“이렇게 되면, 아까 그 남자의 말에 신빙성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정말 장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게 아닐까요?”


그에 첼리스트가 대답을 가로챘다.


“속도를 높이시죠. 이제 확실해졌습니다.”


마스는 그의 말에 순순히 응했다. 체력이 바닥난 단원들의 발걸음이 마지막으로 박차를 가하였다. 얼마를 걸었을까. 사실 얼마를 걸었다고 한들, 이제 이들에게 무의미하긴 했다. 팔은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 지 오래였고, 다리의 감각 또한 사라진 지 오래였으니까. 나아진 건 없었다. 어둠에 싸인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는 것, 그리고 방해꾼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장벽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단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눈이 좋은 첼리스트는 장벽에 박힌 사다리를 단번에 캐치해 냈다. 그는 무리에서 빠져나와 가방이 거세게 흔들릴 정도로 내달렸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붉은 사다리뿐만이 아니었다.


“사다리가 있습니다.”


무리로 돌아온 첼리스트가 마스에게 말했다.


“어떤 사다리를 말하시는 건지.”


“장벽! 장벽을 오르고 있습니다! 그때 택시를 탔던 그 사람들이요! 서둘러야 합니다!!”


“장벽을 오르고 있다고요?”


첼리스트의 고성과 동시에 마스를 포함한 단원들은 달리기 시작했다. 두 다리를 분주히 움직이던 마스는 하나의 생각밖에 없었다. 누구의 편에 서야 하는가. 그리고 미래를 상상했다. 소수의 편에 선다면 사람들의 북적거림이 들리지 않도록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야 할 것이고, 다수의 편에 선다면 잔잔한 클래식으로써 그들의 목소리를 부각시켜야 할 테니. 하지만 사실, 마스는 알고 있었다. 어느 쪽이 되든 소수의 단원으로는 누구에게도 큰 도움이 되지 않으리란 걸. 그걸 알면서도 마스는 달릴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죄책감이었다. 그날 밤, 청년의 말을 조금 더 귀 기울여 들었더라면, 조금 더 자존감을 내려놓고 그의 말을 경청했었더라면…, 개미 떼와 같은 사람들이 목전에 모여 있다. 마스와 단원들은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총소리가 났다. 비명이 사방에서 들려왔고, 한 몸으로 뭉쳐 있던 인파들이 순식간에 지키고 있던 자리를 이탈했다. 제리의 목소리였다.


“여긴 내 구역이야! 당장 꺼져!!”


그리고 또 하나의 목소리가 울렸다.


“총으로는 날 막을 수 없어!! 당장 저들을 끌어내리지 않으면 이 두 여자의 목을 칼로 썰어 버릴 거야!!!”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현장에 마스는 발걸음을 멈췄다. 안경잡이가 마스를 향해 말했다.


“마스 씨, 아무래도 저희가 길을 잘못 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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