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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Aug 23. 2024

1번지에 도착한 악사들

피리 부는 소년의 등을 떠밀던 바람은 그들이 1번지에 도착하는 순간, 유령처럼 사라졌다. 푸른 색감이 번지의 모든 건물을 뒤덮고 있었다. 마스는 손전등을 껐다. 일렬로 오던 단원들이 부채가 펼쳐지듯 그의 등 뒤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마스는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빠르게 손짓했다. 고가도로에서 멀어지라는 신호였다. 단원들이 흩어지자, 마스는 고갤 숙여 시간을 확인했다. 뿔뿔이 흩어진 단원들은 힘이 빠진 와중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다행히 행인도 없었고, 불 켜진 가게도 보이지 않았다. 운이 좋았다. 이제 남은 건, 기사에게서 들은 말들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마스는 단원들을 조용한 골목으로 불러들였다.


“1번지도 별것 없어 보이는군요.”


첫마디였다.


“깨끗함. 그 이상의 것을 떠올리셨다면, 분명 지금 속으로 실망하고 계실 테죠. 저 역시 그 한 명에 속합니다.”


“우리 피리 부는 소년은 본디 광장이 있는 10번지까지를 목표로 하였었습니다. 목표를 달성하면 미련 없이 해산하기로 서약까지 했었더랬죠. 그런데 지금 우리는 목표를 초과한 곳에 서 있습니다. 그것도 억지에 가까운 강행군을 이겨 내고서 말이죠. 정말이지 여러분들은 놀라운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스는 지휘봉이 든 주머니를 주먹으로 쿵쿵 두드리며 말했다.


“동경하지 맙시다. 우리가 소수이고, 우리가 어느 편에 설지 정해지지 않았어도, 우리는 우리의 길을 나아가면 됩니다. 연주는 고귀한 것이며, 어느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은 문화입니다. 역사가 기억할 것이고, 기록이 우릴 찬양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위해 이곳까지 걸어왔습니다. 부디 걸음을 헛되이 하지 맙시다. 황혼처럼 차가운 눈빛에도 굴하지 맙시다. 한 줄기의 빛 끝에 길이 찾아왔듯 기나긴 어둠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오직 하나…”


마스는 지휘봉을 빼내어 하늘 위로 치켜들었다.


“음악대의 자긍심을 지킵시다!”


단원들은 일제히 손뼉 쳤다. 그때, 누군가 창문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이들을 내려다봤다. 잠을 자르고, 자르고, 잘라서 잔 사람처럼 얼굴이 엉망이었다. 그녀를 가장 먼저 발견한 건 박수에서 빠져 있던 첼리스트였다. 그는 곧장 마스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누군가 우릴 보고 있습니다.”


첼리스트가 눈으로 여자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마스는 옅게 고개를 끄덕인 뒤, 단원들의 박수를 그치게 했다. 그리고 하늘을 보는 척, 뒷짐 진 몸을 돌린 뒤에 여자가 있는 곳을 찾아냈다. 여자는 마스와 눈이 마주치자, 담배를 베어 물었다. 마스는 딱딱한 얼굴을 최대한 움직여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여자는 본 체도 하지 않고서 연기만을 뻐끔거리며 뿜어냈다. 마스는 천천히 원래의 위치로 돌아섰다. 그리고, 참고 있던 숨을 크게 뱉어냈다.


“출발이 좋군요. 감정이 고양되는 기분입니다.”


마스는 지휘봉을 턱시도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마음 같아선 휴식의 자리를 펴고 싶지만, 우리는 조금 더 나아가야 합니다. 곧 깨어날 시선들이 쏠리기 전에요.”


그에 안경잡이가 물었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마스 씨.”


“글쎄요. 우선은 이곳 중심부부터 벗어나 보는 걸로 하죠.”


그리고 첼리스트가 말했다.


“집결지를 정해야 하지 않습니까?”


마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물론 그게 맞는 방법이겠죠. 늘 우리가 써 오던 방법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여기서만큼은 변칙을 좀 두고 싶군요.”


“변칙이라 하심은?”


“흩어지지 맙시다.”


“그렇게 되면 설사 이곳 중심부를 벗어난다손 쳐도 이목이 점차 쌓여 갈 텐데요. 버틸 수 있겠습니까?”


“이목은 우리에게 집중되지 않을 겁니다.”


“그를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58번지에서 올라온 이들이 우리보다 먼저 일을 터뜨릴 테니까요.”


첼리스트는 확신이 들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그저 택시 기사의 주장일 뿐이지 않습니까.”


“아뇨. 주장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가설을 세운 건 저이지만요. 58번지 사람이 택시를 타고 1번지로 직행했다. 유례없는 일입니다. 시티의 바깥쪽에 사는 그들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기에, 전재산을 털어 1번지로 내달렸을까요. 저는 보통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를 들은 첼리스트가 생각에 잠긴 사이,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장벽으로 가려는 게 아닐까요?”


이름 없는 사람의 툭 내뱉은 말은 모두를 술렁거리게 만들었다. 마스는 곧장 손을 들어 침묵을 지시했다.


“장벽이라고요?”


마스는 그를 보며 말했다.


“네.”


“그렇게 생각한 근거를 제시해 주시겠습니까?”


남자는 바이올린이 든 작은 가방을 품에 꼭 안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작금의 F구역은 누구의 통치도 없는 무법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건드리는 사람이 없다는 건, 다시 말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줄곧 58번지에 묶여 있던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그곳에 남을 이유가 없습니다. 어떻게든 물자와 식량이 풍부한 상위 번지로 올라오기를 바랄 겁니다. 그렇기에 마스 씨가 그들과 같은 택시를 탄 건, 행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입니까?”


“누구보다 빨리, 구역에 쏘아올려진 신호탄을 본 셈이 되거든요.”


“신호탄?”

     

“네. 전쟁의 신호탄입니다.”


그에 첼리스트가 다시 대화에 참여했다.


“그럴듯하군요. 하지만 여전히 근거가 부족합니다. 만에 하나 당신이 말한 가설이 맞아떨어진다 해도, 악사들인 우리가 무얼 할 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거기서 마스는 말했다.


“아뇨. 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모든 단원들이 마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음악은 군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악령과 천둥이 나오는 음악으로 불을 지필 수 있는 반면, 고요한 들판의 바람과 풀소리로 불을 꺼뜨릴 수도 있지요.”


그에 첼리스트가 말했다.


“1번지 사람들은 그를 저버린 족속들입니다.”


마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맞습니다. 하지만 결코 과거의 감성 모두를 떼어 내진 못했을 겁니다. 그들의 마음 한편엔 분명 향수가 남아 있을 거예요. 이전의 시간 역시 삶의 일부이니까요.”


“그럼, 우리는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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